‹ 목록으로 마법서야, 인생 좀 바꿔줘

2화

'원숭이여.' "제 이름은 이도현인데요." 헌책방 바닥에 주저앉아서 나는 손에 붙은 책을 노려봤다. 떼어지지 않았다. 억지로 잡아당겨도 마치 접착제로 붙인 것처럼 손바닥에 딱 고정돼 있었다. 손가락 하나씩 힘을 줘서 떼어보려 했다. 엄지, 검지, 중지. 다 해봤다. 소용없었다. 살갗이 아릴 정도로 잡아당겼는데도 책은 꼼짝하지 않았다. 마치 손바닥 자체가 표지의 일부가 되어버린 것 같았다. '네 이름 따위 알 바 아니다. 너는 나의 그릇으로 선택받았을 뿐이다.' "그릇? 무슨 그릇이요? 밥그릇?" '무지한 원숭이답게 비유도 참으로 저급하구나.' 말투가 예스러웠다. "~하마", "~것이냐" 하는 식으로 끝맺는 종결어미가 자꾸 귀에 걸렸다. 사극에서나 들을 법한 말투였다. 방금 전까지 헌책방 서가를 구경하던 평범한 오후였는데, 갑자기 웬 사극 톤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리는 상황이라니. 이게 정상일 리가 없었다. "저기요, 일단 이거 떼어지긴 하는 거예요?" '네가 자격을 갖추기 전까지는 불가하다.' "자격이 뭔데요." '그것을 알려줄 이유가 없다.' 이 책, 성격이 참 별로였다. 나는 손바닥에 붙은 표지를 다시 한 번 흘겨봤다. 낡은 갈색 표지에는 금박으로 박힌 제목 외에는 아무 글자도 없었다. 저자도, 출판사도. 그냥 낡은 가죽 표지였다. 이런 걸 이만 원이나 주고 산 게 억울해질 지경이었다. 헌책방 주인은 여전히 나타나지 않았다. 아까부터 계산대 뒤편에서 뭘 하는지 기척도 없었다. 나는 결국 책값이라고 생각되는 이만 원을 계산대 위에 올려두고 도망치듯 그 가게를 나왔다. 혹시라도 주인이 나와서 이 책이 손에서 안 떨어진다는 걸 보면,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감도 안 잡혔다. 손에는 책이 붙어 있었다. 밖에서 보면 그냥 책을 들고 있는 걸로 보였다. 다행이었다. 안 그랬으면 진짜 정신병자로 보였을 테니까. 나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책을 옆구리에 낀 자세를 하고 골목을 빠져나왔다.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오는 내내, 책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게 더 불안했다. 옆자리에 앉은 아저씨가 내 손을 힐끔 쳐다보는 것 같아서 괜히 책을 가방 쪽으로 슬쩍 돌려놓기도 했다. 손목이 이상한 각도로 꺾여서 좀 아팠다. 혹시 이거, 방금 헌책방에서 있었던 일이 다 내 환청이고 착각이었던 건 아닐까. 그런 실낱같은 희망을 붙잡고 있었는데, 지하철 창문에 비친 내 손을 보니 책은 여전히 딱 붙어 있었다. 착각이 아니었다. 집에 도착해서야 다시 그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네 이름이 무엇이라 했더냐.' "이도현이요. 근데 왜 갑자기 물어봐요." '기억해두려 함이다. 계약자의 이름을 모르는 것도 예의가 아니지.' "방금까지 관심 없다면서요." '관심이 없는 것과 예의를 차리는 것은 다른 문제다.' 말이 되는 소리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그냥 책을 방바닥에 내려놓으려 했다. 손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발로 밀어봐도, 다른 손으로 잡아 뜯어도 소용없었다. "이거 진짜 안 떨어져요?" '말했지 않느냐. 자격을 갖추기 전까지는.' "그러면 자격은 어떻게 갖추는데요." '힘을 한 번 써봐라.' "무슨 힘이요." '내가 네게 준 것 말이다.' 나는 그런 걸 받은 기억이 없었다. 그런데 책을 만진 순간부터 뒤통수가 이상하게 뜨거웠다. 마치 뭔가가 안쪽에서 자리를 잡는 느낌이었다. 손으로 뒤통수를 만져봤다. 딱히 열이 나는 것도 아닌데 감각만 뜨거웠다. 이상한 일이었다. '확률을 뒤틀어보아라.' "확률을 어떻게 뒤틀어요?" '원하는 것을 상상하고, 그것이 이루어지길 바라라. 그게 전부다.' 너무 단순해서 오히려 못 믿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판타지 소설에나 나올 법한 설정인데, 실제로 겪고 있으니 오히려 허탈했다. 확률을 뒤튼다니. 로또 1등이라도 시켜준다는 건가 싶어서 순간 기대감이 스쳤다가, 이내 그런 편한 전개는 없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마침 책상 위에 굴러다니던 동전이 눈에 들어왔다. 오백 원짜리였다. 며칠 전에 자판기에서 거스름돈으로 받은 건데 그냥 방치돼 있었다. "이거, 던져서 앞면이 나오면 되는 거예요?" '그런 것도 좋다.' 동전을 던졌다. 천장까지 튀어 올랐다가 바닥에 떨어졌다. 방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앞면이었다. "오, 됐다." '그것은 확률이 오십 퍼센트였다. 아무 의미도 없는 성공이다.' 갑자기 기가 죽었다. 뭔가 대단한 걸 해낸 것처럼 잠깐 신났던 게 부끄러워졌다. "그럼 뭘 하라는 거예요." '더 낮은 확률로 해보아라.' 생각해봤다. 뭐가 좋을까. 방 안을 둘러보면서 낮은 확률이라고 부를 만한 게 뭐가 있을지 고민했다. 로또는 당장 살 수 없었고, 카드 뽑기 같은 것도 없었다. 서랍 속에 넣어둔 편의점 폐기 도시락 쿠폰이 떠올랐다. 매달 세 번, 무작위로 당첨자에게 라면 한 봉지를 더 주는 이벤트였다. 당첨률은 십분의 일이었다. 사장님이 매번 종이를 접어 상자에 넣고 마감 시간에 랜덤으로 뽑는 방식이었는데, 나는 지금까지 두 달 넘게 알바를 하면서 단 한 번도 당첨된 적이 없었다. 그게 억울해서 이번엔 확실히 기억하고 있었다. "됐다, 그거로 해보자." 다음 날 출근해서, 사장님이 뽑는 그 이벤트를 앞두고 나는 속으로 되뇌었다. 제발, 이번엔 당첨되게 해줘. 앞치마를 두르고 진열대를 정리하는 척하면서 계속 마음속으로만 빌었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게 도시락을 정리하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이 상황이 웃기면서도 진지했다. 확률을 뒤튼다는 게 정말 가능한 건지, 아니면 그냥 우연이 겹치는 건지 아직 확신이 서지 않았으니까. 뒤통수가 뜨거워졌다. 책은 여전히 손에 붙어 있었지만, 이번엔 겉옷 안쪽에 감춰서 사장님한테 들키지 않게 했다.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로 계속 도시락 진열만 만지작거렸다. 사장님이 상자에서 종이를 뽑았다. 종이를 펼치는 그 짧은 순간이 이상하게 길게 느껴졌다. "어? 도현씨, 오늘 당첨이네." 십분의 일이 맞았다. 별거 아닌 것 같았다. 그런데 뒤통수가 화끈거렸다. 마치 뭔가가 소모된 느낌이었다. 라면 한 봉지를 받아서 가방에 넣는 동안에도 그 열감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두통 비슷한 게 슬며시 올라왔다. '봤느냐.' 책이 말했다. 그날 밤, 집에 돌아와서였다. '그것이 첫걸음이다.' "그런데 몸이 왜 이렇게 피곤해요. 라면 하나 더 받은 걸로 이렇게 지칠 일인가." 책상에 엎드려서 팔을 베고 누웠다. 눈이 자꾸 감겼다. 하루 종일 서서 일한 것보다 그 짧은 순간의 확률 뒤틀기가 더 사람을 지치게 만든 기분이었다. '확률을 뒤트는 것은 공짜가 아니다. 낮은 확률을 끌어올릴수록 대가는 커진다. 명심하여라, 원숭이.' "자꾸 원숭이라고 부르지 말라니까요." '적당한 호칭 아니냐. 인간이라 부르기엔 아직 격이 부족하니.'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그럼 당신은 뭐라고 불러요. 이름 있어요?" '있다. 다만 알려줄 생각은 없다.' "뭐예요, 그건." '그냥 책이라 불러라.' 결국 나는 그날부터 이 물건을 그냥 '책'이라 부르기로 했다. 그게 이 존재가 허락한 유일한 이름이었다. 이름도 안 알려주면서 내 이름은 꼭 기억해두겠다는 게 이상하게 얄미웠지만, 딱히 따질 힘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날 밤, 잠들기 전에 책이 한마디 덧붙였다. '명심해라. 이 힘은 뇌와 직결되어 있다. 무리하게 쓰면 위험할 수 있다.' 그때는 그 말을 그냥 흘려들었다. 라면 한 봉지 받은 것 정도로 두통 좀 온 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인가 싶어서, 대충 이불을 덮고 눈을 감았다. 뒤통수의 열감은 자는 사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지금 생각하면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경고라는 게, 처음 들을 땐 항상 그렇게 시시하게 느껴진다는 걸 그때는 몰랐다. 나중에 뒤통수가 아니라 온몸이 뜨거워지는 날이 오고 나서야, 그날 밤 책이 흘리듯 던진 그 한마디가 얼마나 무겁게 들렸어야 했는지를 깨닫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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