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마법서야, 인생 좀 바꿔줘

5화

며칠이 지났다. 그 카드를 받은 이후로, 뭔가 확실히 달라진 게 있었다. 확률을 뒤틀 때 뒤통수가 뜨거워지는 정도가 훨씬 덜해졌다. 대신 가끔 눈앞이 하얘지는 순간이 왔다. 짧게, 한두 초. 처음엔 그냥 어지럼증인가 했다. 두 번째는 아니었다. 세 번째쯤에는 확실히 알았다. 뭔가가 몸 안에서 넘실거리고 있었다. '그게 회로가 넓어진 대가다.' 책이 말했다. '넓어진 만큼, 통제를 못 하면 그대로 넘쳐 흐른다.' "넘쳐 흐르면 어떻게 되는데요." '네 정신이 먼저 무너진다.' "구체적으로요." '구체적으로 알고 싶으냐.' "네." '모른다.' "방금 무섭게 말해놓고 모른다는 게 어디 있어요." '무섭게 말한 것과 아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나도 네가 넘치는 걸 직접 본 적은 없으니까.' 기가 막혔다. 위엄 있게 경고를 하더니 결국 아는 게 없다는 소리였다. 근엄한 종결어미로 사람 겁줘놓고 뒷북치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였다. 무서운 말이었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그 힘을 계속 시험해보고 싶어졌다. 이상한 일이었다. 눈앞이 하얘지는 그 짧은 순간, 뒤통수 안쪽에서 뭔가가 부풀어 오르는 느낌이 드는 그 순간이 무섭기는 한데, 동시에 그 다음이 궁금했다. 넘치면 어떻게 되는지, 그 끝까지 가보면 뭐가 있는지. 망했다. 이거 완전히 중독 초기 증상이잖아. 그날, 차승훈이 말한 그 경매가 열렸다. 인사동에서 멀지 않은, 조용한 골목 안쪽 건물이었다. 밖에서 보면 그냥 오래된 사무실 같았다. 간판도 없었고, 창문에는 블라인드가 처져 있었다. 초인종을 누르자 안에서 사람이 나와 나를 확인하고서야 문을 열어줬다. "이도현씨, 맞으시죠." 정장을 입은 남자가 물었다. 나는 고개만 끄덕였다. 명함에 적힌 이름 하나로 여기까지 들어올 수 있다는 게 신기하면서도 께름칙했다. 안내받은 방에는 사람이 열 명 남짓 있었다. 정장을 입은 사람도 있었고, 캐주얼한 옷을 입은 사람도 있었다. 다들 나이가 있어 보였다. 나만 어색하게 어린 편이었다. 의자에 앉아서 슬쩍 주변을 둘러봤다. 다들 표정이 비슷했다. 무심한 듯 여유로운 듯, 그러나 눈은 앞에 놓인 유리 상자에서 떠나지 않는 그런 표정. 골동품 좋아하는 부자들 모임인가, 잠깐 그렇게 생각했다가 곧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눈빛이 너무 진지했다. 취미로 온 사람들의 눈빛이 아니었다. 경매 물건은 유리 상자 안에 담긴 낡은 반지였다. 겉보기엔 그냥 오래된 골동품 반지였다. '그것이 저들이 원하는 물건이군.' "저게 뭔데요." '설명하기 복잡하다. 다만 저 반지가 상위자와 연결된 물건이라는 것만 알아두어라.' "상위자가 뭐예요." '너보다 훨씬 위에 있는 존재를 그렇게 부른다. 자세한 건 지금 말할 상황이 아니다.' "항상 지금은 말할 상황이 아니라고 하네요." '항상 지금이 그런 상황이니까.' 말이 안 통했다. 근엄한 목소리로 저런 걸 뻔뻔하게 말하니 반박할 타이밍도 놓쳤다. 뭔가 거대한 이야기가 밑에 깔려 있는 것 같았지만, 지금은 그걸 파고들 여유가 없었다. 경매가 시작됐다. 경매사가 시작가를 부르자마자 여기저기서 손이 올라갔다. 숫자가 빠르게 뛰었다. 이런 데서 부르는 단위는 확실히 달랐다. 백만 단위로 시작해서 순식간에 억 단위로 올라갔다. 낡은 반지 하나에 저 정도 돈을 쓴다는 게, 상위자니 뭐니 하는 말을 안 들었으면 이해가 안 될 일이었다. 나는 손을 들지 않았다. 대신 뒤통수에 힘을 모았다. '저 낙찰 확률을 조작하는 것이 목표다. 네 손으로 직접 부를 필요는 없다.' "그럼 어떻게 낙찰이 되는데요." '경쟁자들이 실수를 하게 만들면 된다. 숫자를 헷갈리게, 타이밍을 놓치게.' 그 말을 듣는 순간,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그게 낙찰 확률 조작이에요? 그냥 사기 아니에요?" '확률을 뒤트는 것 자체가 원래 이런 것이다. 결과를 만드는 방법을 골라 쓰는 것뿐이지.' "그건 그냥 좋게 포장한 사기예요." '포장이 잘 되면 그것을 기술이라고 부른다.' 반박할 말이 없었다. 이 책은 가끔 이상한 데서 논리가 완벽했다. 경매가 진행됐다. 가격이 오를수록, 나는 조금씩 뒤통수에 힘을 실었다. 이번 상대는 저기 앉은 노신사였다. 은발에, 손목에 시계가 무겁게 걸려 있는 사람이었다. 저 사람 하나만 막으면 낙찰이 넘어올 거라고 책이 짚어줬다. 손을 들려는 타이밍마다 살짝, 정말 살짝 늦게 만들었다. 처음엔 잘 안 됐다. 노신사가 손을 드는 순간과 내가 뒤통수에 힘을 싣는 순간이 어긋났다. 두 번째는 타이밍이 맞았는데 힘이 약했다. 세 번째, 세 번째만에 제대로 걸렸다. 노신사의 손이, 정말 반 박자 늦게 올라갔다. 경매사가 그 반 박자를 놓치지 않고 다음 숫자를 불렀다. 결과가 나왔다. "낙찰되셨습니다." 경매사가 나를 가리켰다. 주변의 시선이 다 나한테 쏟아졌다. "뭐야, 저 어린 애가?" "누구야, 처음 보는데."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최대한 태연한 척, 앞으로 나가 반지가 담긴 상자를 받았다. 걸음이 이상하게 무거웠다. 다리에 힘이 잘 안 들어갔다. 몇 걸음 안 되는 거리인데 그게 그렇게 길게 느껴졌다. 뒤통수가 화끈거렸다. 이번엔 눈앞이 살짝 흔들렸다. 비틀거리는 걸 겨우 참았다. 상자를 받아 드는 손이 떨렸다. 옆에 있던 진행요원이 이상하게 봤는지 잠깐 눈을 마주쳤다가 곧 다시 다른 데로 시선을 돌렸다. 다행이었다. 지금 이 상태로 뭔가 질문을 받았으면 제대로 대답할 수 있었을지 모르겠다. 방을 나오자마자 차승훈이 기다리고 있었다. "수고했습니다." 남자가 반지가 담긴 상자를 받아 들었다. "이제 뭐 하나 더 남았어요?" "아니요, 이걸로 이번 건은 끝입니다." "근데 이거 뭐 하는 데 쓰는 물건이에요?" 남자가 웃었다. 아까와 똑같은, 눈은 안 웃는 웃음. "그건 도현씨가 알 필요 없는 정보입니다." "저 방금 저거 낙찰받는다고 뒤통수가 반쯤 나갔는데요." "수고비는 별도로 챙겨드릴 겁니다." "그런 말이 아니잖아요." "압니다. 근데 지금은 그게 최선의 대답입니다." 뭔가 화가 났지만 지금은 캐물을 상황이 아니었다. 이 남자한테서 뭔가를 캐내려면 최소한 지금보다는 유리한 위치에 서야 했다. 지금은 아니었다. "보상은요." "약속대로 처리됩니다." 남자가 명함 한 장을 더 건넸다. "필요할 때 연락 주세요. 저희 쪽에서도 도현씨가 필요할 때가 있을 겁니다." 명함을 받아드는데, 아까 받은 것과 똑같은 디자인이었다. 이름도, 번호도 같았다. 그냥 예의상 하나 더 준 건가, 아니면 뭔가 다른 의미가 있는 건가. 알 수 없었다. 남자가 사라진 뒤, 나는 골목에 홀로 남았다. 가로등 하나가 깜빡거리고 있었다. 골목은 조용했다. 아까 그 건물은 여전히 오래된 사무실처럼 보였고,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밖에서는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뒤통수가 계속 진동했다. 뭔가가 안에서 자라나는 느낌이었다. '상태를 확인해보자.' 책이 말했다. "어떻게 확인해요." '손을 앞으로 뻗고, 눈을 감아보아라.' "그러다 지나가는 사람이 보면 저 이상한 사람인 줄 알아요." '지금 이 시간에 이 골목을 지나가는 사람이 있을 것 같으냐.' 주위를 둘러봤다. 없었다. 완전히 없었다. 시키는 대로 했다. 눈앞에 뭔가 떠올랐다. [이도현] [스킬: 확률 개입] [등급: F → D] [경고: 뇌 접속률 상승 감지. 과부하 위험도 상승.] "어, 등급이 올랐어요." '놀랍군. F에서 D까지, 원래대로면 몇 년이 걸릴 상승치다.' 몇 년. 그 단어가 이상하게 무겁게 다가왔다. 몇 년을 갈고 닦아야 할 걸 하루 저녁에 해치웠다는 소리였다. 좋은 거 같은데, 책의 말투를 들어보면 좋은 게 아니었다. "그럼 좋은 거 아니에요?" '좋기만 한 것이 아니다. 그 카드가 회로를 강제로 넓혔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이런 방식으로 계속 성장하면.' 책이 말을 끊었다. "왜 말을 끊어요." '말해도 지금 당장 네가 멈출 것 같지 않으니까.' 정확한 지적이었다. 부정할 수 없었다. "그래도 이 정도면, 다음에도 이렇게 하면 되는 거 아니에요?" '그것이 문제다. 네가 지금 딱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 "……." '대답이 없군.' "할 말이 없어서요." '그것도 답이다.'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들었지만, 그 순간엔 그저 등급이 올랐다는 사실이 더 크게 느껴졌다. F에서 D. 숫자로만 보면 별거 아닌데, 며칠 만에 이 정도 오른 거면 앞으로 얼마나 더 오를 수 있을지, 그 생각이 자꾸 머릿속을 맴돌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골목을 빠져나와 큰길로 걸어가는데 자꾸 뒤통수가 서늘했다. 아까 힘을 너무 많이 써서 그런가 싶었다. 그런데 그 서늘함이 안에서 오는 게 아니라 바깥에서 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몇 번 뒤를 돌아봤다. 아무도 없었다. 버스 정류장에 앉아서 휴대폰을 꺼냈다. 시간을 확인하려던 참이었다. 휴대폰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받았다. "이도현씨죠?" 낯선 여자 목소리였다. 차분하고, 어딘가 여유가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누구세요?" "오늘 경매장에 계셨죠. 저도 거기 있었거든요." 경매장. 아까 그 방을 떠올렸다. 열 명 남짓, 다들 나이가 있어 보였던 사람들. 그중에 이 목소리의 주인이 있었을까. "거기 계셨는지는 모르겠는데, 그래서요?" 뒤통수가 갑자기 서늘해졌다. "그래서요?" "손에 들고 있는 그 책, 저도 알아요." 심장이 순간 멈춘 것 같았다. 책. 지금 이 순간 내 안에 있는, 아무한테도 보이지 않아야 할 그 책을 이 여자가 어떻게. "뭐라고요?" 전화가 끊겼다. 나는 그 자리에 멈춰 선 채로,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이번엔 회로 때문이 아니었다. '책이 뭔지 아는 사람이 있다는 소리다.' 책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방금까지 나를 놀리듯 여유롭던 말투가 아니었다. "저 사람 뭐예요. 아는 사이예요?" '모른다. 하지만 이런 존재가 나서는 건 좋은 신호가 아니다.' "그럼 어떤 신호인데요." '……' "왜 또 말을 끊어요." 책은 대답하지 않았다. 골목 저편에서,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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