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복수를 품은 열 살

2화

그날 아침 문구를 본 이후로 나는 반나절 넘게 방에 틀어박혀 그것의 정체를 캐물었다. 캐물었다는 표현이 좀 웃기긴 한데, 실제로 그랬다. 눈을 감고 '48년의 기억이 뭐냐'고 속으로 되뇌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더니, 마치 응답이라도 하듯 다시 문구가 떠올랐던 것이다. [알림: '48년의 기억' — 회귀 전 인생에서 축적된 지식, 경험, 판단력이 열 살 신체에 온전히 유지됩니다. 단, 신체적 능력(체력, 손목 힘, 뇌 발달 수준)은 현재 신체 나이에 귀속됩니다.] 그 문구를 읽자마자 나는 헛웃음이 나왔다. '...개사긴데?' 하는 말이 절로 튀어나왔으니까. 요컨대 정리하자면, 내 머릿속 지식과 판단력은 마흔여덟 회사원 그대로인데, 팔씨름을 하면 진짜 열 살짜리처럼 진다는 소리였다. 그러니까 이건 반쪼가리 치트였다. 지식은 어른, 몸은 아이. 언뜻 들으면 아주 이상적인 조합 같지만, 실제로 겪어보니 그 간극이 주는 어지러움이 상당했다. 일단 침대에서 일어나는 것부터 문제였다. 나는 몸을 일으키려다가 스프링이 튕기듯 상체가 붕 떠올랐는데, 성인 남자의 감각으로는 이불을 걷고 다리를 내리면 자연스럽게 무게중심이 잡혀야 했건만, 이 몸은 그 반동을 제대로 못 이겨내서 침대 옆으로 그대로 굴러떨어졌다. 퍽. 엉덩이로 바닥을 찍은 채 나는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이게, 안 되네...?' 마흔여덟 해 동안 아침마다 별생각 없이 해온 동작이 이렇게 낯설게 느껴질 줄은 몰랐다. 예를 들어 젓가락질을 할 때, 나는 분명 마흔여덟 해 동안 해온 익숙한 동작이라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손을 움직여보면 손가락 근육이 마음처럼 따라주지 않아서 젓가락을 두 번이나 놓쳤다. 처음엔 콩자반 하나를 집으려다 놓쳤고, 두 번째는 김치를 집다가 그대로 식탁 위에 툭 떨어뜨렸는데, 그 순간의 민망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계단을 오를 때도 다리 힘이 부족해 숨이 가빠지는 걸 느꼈고, 이 층까지 열 몇 개 계단을 오르는 동안 나는 마치 등산이라도 하는 사람처럼 헐떡였다. 자전거를 타보려다가 균형을 못 잡아 넘어질 뻔한 것도 그날 오후의 일이었는데, 페달을 밟는 순간 몸이 왼쪽으로 기울어지면서 핸들이 제멋대로 꺾였고, 나는 다급히 발을 땅에 짚으며 겨우 넘어지는 것만 면했다. 그러니까 결국 이건 지식만 이식된 상태였고, 신체는 여전히 열 살짜리 아이의 것이라는 사실을, 나는 하루 만에 몸으로 절실히 배웠다. '그럼 이 지식이라는 게 정확히 어디까지 통하는 걸까' 하는 의문이 자연스럽게 따라붙었다. 나는 그것을 시험해보고 싶었다. 마침 방 한구석 책장에 낡은 수학 참고서가 꽂혀 있었는데, 4학년 수준의 산수 문제집이었다. 별생각 없이 펼쳐서 몇 문제를 풀어봤더니, 놀라울 정도로 술술 풀렸다. 당연했다. 이건 초등학교 4학년 수준의 문제였고, 나는 마흔여덟 해 인생 중 무려 십육 년을 학교와 학원에서 보낸 사람이었으니까. 그 정도 산수는 눈 감고도 풀 수 있는 수준이었다. 분수의 덧셈이나 소수점 나눗셈 같은 것들은, 사실 내가 대학 때 배웠던 미분방정식보다도 백 배는 쉬운 개념이었으니, 이 정도로 만족감을 느낀다는 것 자체가 좀 우습기도 했다. 그런데 문제집 뒤쪽에 실린 좀 더 복잡한 응용문제, 그러니까 5, 6학년 과정을 넘어서는 수준의 문제로 넘어가자 이야기가 조금 달라졌다. 답은 여전히 알았지만, 그 답을 도출하는 사고 과정을 이 어린 뇌가 따라가는 데 약간의 부담이 느껴졌던 것이다. 마치 오랫동안 안 쓰던 근육을 갑자기 쓰는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머릿속에서 답은 이미 반짝하고 떠오르는데, 그 답까지 가는 계산의 경로를 이 뇌가 한 단계씩 밟아나가는 게 어딘가 느릿느릿했다. 마치 고성능 프로그램을 저사양 컴퓨터에 억지로 돌리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렉이 걸리는 것도 아니고, 실행이 안 되는 것도 아닌데, 어딘가 뚝뚝 끊기는 그 감각이 계속 신경 쓰였다. 그것도 몇 문제 풀다 보니 조금씩 익숙해졌는데, 대략 열 문제쯤 풀고 나니 그 뚝뚝 끊기던 느낌이 한결 매끄러워졌다. '요컨대 지식은 온전한데, 그걸 처리하는 하드웨어가 이 몸의 뇌 발달 수준에 맞춰서 제약을 받는다는 거네.' 나는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나쁘지 않은 조합이었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이 뇌가 성장하면서 지식과 사고력의 간극이 점점 줄어들 거라는 계산이 섰다. 그러니까 지금 당장은 완벽한 치트가 아니지만, 앞으로는 점점 더 무서운 존재가 될 거라는 뜻이었다. 나는 그 사실이 묘하게 안심되면서도, 동시에 초조했다. 지금 당장 무언가를 해내야 하는 상황에서는, 이 미완성된 하드웨어가 발목을 잡을 게 뻔했으니까.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도 들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회사에서 밤새 엑셀 시트와 씨름하던 그 감각을 떠올릴 수 있었다. 부장이 던진 보고서 마감일, 팀장의 한숨, 야근 택시 안에서 스치던 한강의 불빛 같은 것들. 그런데 그 기억들이 지금 이 몸 안에서는 어딘가 아득하게 느껴졌다. 마치 남의 영화를 보는 것처럼, 분명히 내 기억인데도 한 발짝 떨어져서 관람하는 듯한 이질감이 있었다. '이것도 신체 나이의 영향일까, 아니면 그냥 시간이 흘러서 그런 걸까.' 답은 알 수 없었지만, 굳이 답을 찾으려 애쓰지 않기로 했다.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감상이 아니라, 이 몸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가였으니까. 저녁 식사 자리에서, 어머니는 예상대로 학원 이야기를 다시 꺼냈다. "내일 배치시험 보러 갈 거니까, 오늘 밤에 문제집 좀 풀어놔." "...네." 나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지만, 속으로는 완전히 다른 계산을 하고 있었다. 이 배치시험이라는 게 뭔지, 마흔여덟 해 인생 경험으로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1980년대 후반 강남 일대에 우후죽순 생겨난 입시학원들이 초등부부터 등급을 매겨서 반을 나누던 그 관행 — S클래스, A클래스, B클래스, D클래스로 이어지는 서열화된 교육 시스템. 나는 이 시스템의 첫 세대 피해자였고, 이번엔 그 시스템을 역이용할 생각이었다. 밥을 먹으면서도 나는 속으로 이 배치시험이 어떻게 진행될지 그림을 그려보고 있었다. 아마 국어와 수학 위주로 스무 문제 남짓, 시간은 사십 분 정도. 초등부 배치시험이란 게 결국 그 나이대 아이들의 평균적인 학습 진도를 재는 잣대였을 뿐이니, 나에게는 그야말로 시시한 관문이었다. 문제는 그 시시한 관문을 얼마나 화려하게 통과하느냐였다. 어중간하게 잘하면 그저 상위권 반에 배정되는 것으로 끝나겠지만, 압도적으로 잘하면 얘기가 달라진다. 학원 원장이나 강사들의 눈에 띄고, 나아가 학부모들 사이에 소문이 돈다. 소문은 곧 관심이고, 관심은 곧 판을 키울 수 있는 자원이었다. "엄마, 저 오늘 좀 일찍 자고 내일 컨디션 좋게 갈게요." "...웬일이니, 알아서 잘 준비하겠다고?" 어머니의 목소리에 미묘한 의심이 섞여 있었다. 원래 이맘때의 나는 학원이라는 말만 나와도 울고 떼쓰던 아이였을 텐데, 갑자기 순순히 협조적으로 나오니 이상하게 느껴졌던 모양이다. 어머니는 숟가락을 든 채로 나를 몇 초간 빤히 쳐다보았는데, 그 시선에는 걱정과 의심이 반씩 섞여 있는 것 같았다. 혹시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닐까, 하는 표정. 나는 그 시선을 슬쩍 피하며 방으로 돌아왔다. 뒤통수가 따가운 느낌이 한동안 가시지 않았다. 방에 돌아와서 나는 밤늦게까지 이불 속에서 눈을 뜬 채 생각을 정리했다. 내일 배치시험은 단순한 등급 매기기가 아니었다. 내게는 그것이 마흔여덟 해 인생 전체를 판돈으로 걸고 벌이는 첫 도박이었다. 어차피 이번 생은 복수를 위한 발판이었고, 그 복수의 첫걸음은 이 시스템 안에서 누구도 예상 못 한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천장을 바라보며 나는 지난 인생을 짚어보았다. 마흔여덟 해 동안 나는 늘 적당히,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묻혀 살아왔다. 학교에서도 중간 등수, 회사에서도 만년 대리. 그 결과가 뭐였더라. 결국 아무도 나를 기억하지 않는 죽음이었다. 그 생각을 하니 헛웃음이 나왔다. '...적당히 살았더니 적당히 죽었네.' 이번엔 다르게 살아보기로 했다. 적당히는 이제 그만. '적당히 잘하는 척할까, 아니면 전력을 다할까.' 나는 잠시 고민했지만,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적당히 해서는 이 세계가 나를 주목하지 않을 것이고, 주목받지 못하면 복수의 판을 키울 수 없다는 걸, 나는 마흔여덟 해 회사 생활을 통해 뼈저리게 배웠다. 조용히 있으면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눈에 띄어야 뭔가가 시작된다. 회사에서도 그랬다. 조용히 일만 열심히 하는 직원은 승진에서 밀리고, 목소리 크고 눈에 띄는 직원이 자리를 차지하는 걸 수십 번도 더 봤으니까. 세상은 그렇게 굴러갔다. 부조리하지만, 그게 룰이라면 이번엔 그 룰을 이용해줄 생각이었다. [알림: 능력 사용 조건이 확인되었습니다. '48년의 기억'은 신체 나이에 따른 제약을 받으며, 신체 성장에 비례해 활용도가 상승합니다.] 문구가 다시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나는 그걸 보며 실없이 웃음이 나왔다. '...이거 완전 성장형 캐릭터네.' 레벨이 오를수록 스킬 효율이 좋아지는 게임 캐릭터처럼, 이 몸도 시간이 지나면 지식과 신체의 간극이 줄어들 터였다. 문제는 그 시간이 얼마나 걸리느냐였는데, 당장 내일 시험에서는 이 미완성된 하드웨어로 승부를 봐야 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눈을 감았다. 내일이면, 이 세계가 처음으로 나를 시험할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시험에 어떤 대답을 내놓을지 이미 마음을 정해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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