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학원 건물은 4층짜리 상가 건물의 3, 4층을 통째로 쓰고 있었는데, 간판에 큼지막하게 적힌 이름을 보고 나는 속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명문영재학원'. 마흔여덟 해 인생 동안 이런 이름의 학원을 몇 개나 봐왔는지 셀 수도 없었지만, 이 시대의 이 이름은 그야말로 원조격이었다. 훗날 어디를 가나 붙어 있던 그 흔하디흔한 간판 문구의 조상님을, 나는 지금 1985년의 어느 상가 3층 계단 앞에서 마주하고 있는 셈이었다. '...역사는 이렇게 반복되는구나.' 계단을 오르는 발걸음이 묘하게 무거웠던 건, 열 살짜리 다리로 4층을 걸어 올라가야 하는 물리적인 피로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이 낡은 건물 안에서 내가 앞으로 겪게 될 일들에 대한 막연한 예감 때문이었는지 스스로도 잘 구분이 되지 않았다.
대기실은 좁고 형광등 불빛이 누런 벽지 위에서 어른거리는 공간이었는데, 나와 비슷한 또래 아이들이 예닐곱 명 앉아 있었다. 다들 부모 손에 끌려온 표정이 역력했는데, 어떤 애는 손톱을 물어뜯고 있었고, 또 어떤 애는 엄마가 사준 듯한 새 학용품 세트를 만지작거리며 애써 표정을 관리하고 있었다. 그중 한 명이 유독 눈에 띄었다. 반듯한 체구에 옷매가 흐트러진 남자아이였는데, 다리를 계속 떨면서 창밖을 흘끗거리는 게 딱 봐도 도망칠 생각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창문 쪽으로 시선이 향할 때마다 그 애의 발끝이 슬쩍 문 쪽을 향하는 걸 보고, 나는 속으로 '저거 진짜 튈 생각이네' 하고 감탄까지 했다.
"야, 너도 여기 처음이야?"
그 아이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나는 잠시 그 얼굴을 보다가, 문득 이름이 떠올랐다. 박도현. 초등학교 같은 반이었던 애였는데, 회귀 전 인생에서는 딱히 접점이 없던 애였다. 얼굴은 익숙한데 목소리는 낯선, 그 어긋난 감각이 잠깐 나를 어지럽혔다.
"어, 처음이야."
"나 여기 오는 거 완전 싫었는데 우리 엄마가 억지로 끌고 왔어. 시험 끝나면 바로 나가서 놀 거야. 오락실 가기로 했거든."
박도현은 그렇게 말하며 어깨를 으쓱했는데, 나는 그 태도가 왠지 낯설지 않았다. 시험이라는 제도 자체에 아무런 압박도 느끼지 않는 저 무심함이, 마흔여덟 해 동안 시험과 평가에 짓눌려 살아온 나에게는 오히려 신선하게 다가왔던 것이다. 저 나이에 저런 여유를 가질 수 있다는 게, 어쩌면 재능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쟤는 나름 행복한 놈이네.' 그런 생각이 스쳤지만, 나는 곧 그 생각을 접어두었다. 지금 중요한 건 저 애가 아니라 내 앞에 놓인 시험이었으니까. 부모의 손에 끌려와 오락실을 꿈꾸는 저 애와, 이 시스템의 최상위를 향해 발톱을 세워야 하는 나 사이에는 애초부터 건널 수 없는 강이 흐르고 있었다.
시험장에 들어서자 감독관이 시험지를 나눠주기 시작했다. 국어, 수학, 그리고 상식이라는 이름이 붙은 종합 과목까지 세 파트로 나뉜 시험이었는데, 나는 시험지를 받아들자마자 첫 장을 훑어봤다. 4학년 교과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문제들이었지만, 뒷장으로 갈수록 응용력을 요구하는 문제들이 섞여 있었다. 감독관의 발소리가 교실 뒤편으로 멀어지는 순간, 나는 연필 끝을 종이에 갖다 댔다.
연필을 쥐는 순간, 나는 묘한 감각을 느꼈다. 손가락 근육은 여전히 열 살짜리의 것이었지만, 문제를 읽고 풀이 방식을 떠올리는 그 사고 과정만큼은 완전히 다른 차원이었다. 사각사각, 연필이 종이를 긁는 소리가 조용한 교실 안에서 유독 크게 들렸다. 국어 지문 하나를 읽는 데 걸리는 시간이, 다른 아이들이 세 번은 읽어야 할 걸 나는 한 번에 파악해버렸으니까. 문단 구조를 훑고 접속사의 위치만 확인해도 글쓴이의 의도가 눈에 들어오는 이 감각은, 마흔여덟 해 동안 수백 권의 계약서와 보고서를 훑어온 습관이 남긴 흔적이었다.
수학 파트로 넘어가자 문제 난이도가 슬쩍 올라갔다. 응용문제 하나가 눈에 들어왔는데, 두 기차가 서로 다른 속도로 마주 달려오는 그 고전적인 문제였다. 나는 그 문제를 보자마자 헛웃음이 나왔다. '...이걸 아직도 내네.' 마흔여덟 해 인생 동안 몇 번이나 마주쳤던 유형의 문제였으니까. 초등학교, 중학교, 심지어 어느 자격증 시험에서까지 변형되어 등장했던 그 기차 두 대가, 1985년의 이 시험지에서도 여전히 서로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답을 적는 데 걸린 시간은 채 십 초도 되지 않았고, 나는 그 옆에 남는 여백에 검산까지 한 번 더 돌려볼 정도로 시간이 남았다.
그런데 문제는 마지막 상식 파트였다. 이 파트는 단순 지식을 넘어서 논리적 추론과 창의적 사고를 요구하는 문제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그중 한 문제가 나를 잠시 멈춰 세웠다.
"미래에 사람들이 가장 많이 이용할 것 같은 통신수단은 무엇이며, 그 이유를 서술하시오."
나는 그 문제를 읽고 잠시 펜을 멈췄다. '이걸... 어디까지 써야 하나.' 마흔여덟 해 인생을 살아본 나는 그 답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손바닥만 한 기계 하나로 전화도 하고, 사진도 찍고, 세상 모든 정보를 검색하는 시대가 온다는 걸. 심지어 그 기계 안에서 사람들이 서로 얼굴도 안 보고 하루 종일 화면만 들여다보게 될 거라는 것까지, 나는 지나칠 정도로 자세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걸 1985년의 초등학생 수준에서 써낸다면, 그 답안이 오히려 이상하게 보일 위험이 있었다. 천재 소리를 듣는 것과, 정신병원에 실려 가는 것 사이의 거리가 이렇게 종이 한 장 차이일 줄은 몰랐다.
'적당히, 조금만 앞서가는 척.' 나는 그렇게 결정하고, 펜을 움직였다. "작은 기계로 멀리 있는 사람과 전화하고, 편지도 빠르게 보낼 수 있는 방법이 생길 것이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점점 더 빠르고 편리한 것을 원하기 때문이다."
적당히 애매하면서도, 방향성만큼은 정확히 맞춘 답이었다. 나는 그 답을 적으며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마흔여덟 해 인생의 지식을 이렇게 어중간하게 숨겨 써야 하는 상황이라니, 이것도 이 몸으로 살아가야 할 이 시대의 규칙 중 하나였다. 너무 잘 알아서 오히려 손해를 보는 아이러니라니, 이런 걸 겪어보라고 회귀시켜준 건 아닐 텐데.
시험이 끝나갈 무렵, 감독관이 시계를 보며 "오 분 남았습니다"라고 말했다. 그 목소리에 몇몇 아이들이 화들짝 놀라며 펜을 급하게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는데, 나는 이미 모든 문제를 다 풀어놓은 상태였고, 남은 시간 동안 답안을 다시 한번 훑으며 오탈자나 실수를 점검했다. 그러다 문득 시야 한켠에 문구가 떠올랐다.
[알림: 능력 활용도 12% 증가.]
'...이건 또 뭐야.'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곧 나는 그 의미를 대략 짐작했다. 이 능력이라는 게 그냥 정적인 지식 저장고가 아니라, 실제로 사용할수록 이 몸에 더 잘 융합되는 종류의 것이라는 걸. 어쩌면 이건 근육 같은 것일지도 몰랐다. 쓰지 않으면 굳고, 쓸수록 유연해지는. 그렇다면 앞으로도 이 능력을 계속해서, 최대한 자주 굴려야 한다는 뜻이었다. 시험이라는 형태로든, 다른 무언가로든.
시험이 끝나고 나오자, 박도현이 대기실 밖에서 다리를 절뚝이며 서 있었다. 시험 도중 화장실에 갔다가 늦게 들어와서 마지막 파트를 제대로 못 풀었다고 했다. 그 표정이 전혀 개의치 않아 보여서, 나는 그 담담함이 새삼 부러웠다.
"너 다 풀었어?"
"어, 대충."
"대박, 난 반도 못 풀었는데. 아 몰라, 어차피 놀러 갈 거니까. 야, 너 그거 알아? 저기 앞에 새로 생긴 오락실에 겔러그 새 버전 들어왔대."
박도현은 시험 얘기는 이미 다 잊은 얼굴로 오락실 얘기를 신나게 늘어놓기 시작했는데,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너는 이 시스템 밖에서 살 수 있는 애구나.' 나는 그럴 수 없었다. 이미 이 시스템의 심장부에 들어와버린 사람으로서, 그 안에서 최상위에 서는 것 말고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으니까. 마흔여덟 해를 살고도 결국 다시 시험지 앞에 앉아야 하는 이 팔자가, 웃기면서도 서글펐다.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나는 창밖을 보며 결과를 기다렸다. 버스 창문에 김이 서려 있었고, 그 위에 손가락으로 의미 없는 낙서를 하다가 나는 문득 손을 멈췄다. 결과 발표는 사흘 뒤라고 했는데, 나는 그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이미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다만 그 짐작이 얼마나 큰 파장을 일으킬지는, 나조차도 아직 가늠하지 못하고 있었다. 버스가 흔들릴 때마다 창에 비친 내 얼굴이, 열 살짜리의 것이면서도 어딘가 낯설게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