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복수를 품은 열 살

4화

결과 발표일, 나는 어머니와 함께 학원을 다시 찾았다. 학원 건물은 평소보다 유난히 시끄러웠는데, 로비에 들어서자마자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게시판 앞에 사람들이 겹겹이 몰려 있었고, 아이들은 발끝을 세워 명단을 확인하려 안달했으며, 부모들은 그 뒤에서 목을 길게 빼고 자기 자식의 이름을 찾느라 눈이 바쁘게 움직였다. 종이 한 장에 붙은 몇 개의 숫자와 이름이 이렇게 많은 사람을 긴장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게, 나는 새삼 우습기도 하고 조금은 서글프기도 했다. "한결아, 저기, 저 사람들 좀 비켜봐. 안 보여." 어머니는 사람들 틈을 비집고 들어가면서도 손으로는 계속 내 손목을 붙잡고 있었다. 놓치면 안 된다는 듯이, 혹은 이 순간을 나와 함께 봐야 한다는 듯이. 나는 그 손의 온도를 느끼면서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 손이 나를 이 지옥 같은 학원 시스템에 밀어넣은 손이라는 걸 알면서도, 지금은 그저 조금 떨리는 손일 뿐이었으니까. 사실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내 이름이 어디 붙어 있을지, 몇 등으로 붙어 있을지도. 다만 그 확신을 곧바로 드러내면 이상하게 보일 게 분명했으므로, 나는 짐짓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게시판을 훑는 척했다.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고, 손가락으로 명단을 하나씩 짚어가는 시늉을 하면서. "저기, S클래스에... 있는 것 같은데요." "뭐?" 어머니의 목소리가 갑자기 커졌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순간적으로 이쪽으로 튀었다가 다시 흩어졌다. S클래스는 이 학원에서 가장 위, 전체 응시자 300명 중 단 열두 명만 배정되는 최상위 반이었다. 그리고 그 열두 명 명단 맨 위, 첫 번째 줄에 내 이름이 적혀 있었다. "이한결... 총점 297점." 어머니가 그 숫자를 읽더니,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나를 돌아봤다. 그 표정에는 기쁨과 의아함이 뒤섞여 있었는데, 눈은 웃고 있으면서도 입가는 뭔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반쯤 벌어져 있었다. 나는 그 표정을 보며 속으로 씁쓸한 웃음을 삼켰다. '297점이면 300점 만점에 3점 감점이네.' 상식 파트에서 일부러 애매하게 써낸 그 답안 때문에 감점이 있었을 텐데, 그럼에도 압도적인 1위였다. 2등과의 점수 차가 얼마나 될지 궁금했지만, 그건 굳이 확인하지 않았다. 굳이 확인해서 좋을 것도 없는 숫자였으니까. 게시판 옆에 서 있던 다른 부모들의 시선이 하나둘 이쪽으로 쏠리기 시작했다. "저 집 애가 1등이래." "297점이라는데, 만점이 300점이잖아." "어느 학교 다니는 애야?" 하는 수군거림이 여기저기서 들렸고, 나는 그 시선들이 조금 부담스럽긴 했지만 동시에 이상하게 통쾌하기도 했다. 이 학원이라는 시스템, 이 어른들의 세계가 만들어놓은 순위표 맨 위에 내가 있다는 사실이, 어쩐지 복수의 첫 페이지를 넘긴 것 같은 기분을 줬으니까. 그날 오후, 우리는 상담실로 안내받았다. 복도를 걸어가는 동안 어머니는 계속 흥분한 목소리로 "잘했다, 정말 잘했다"를 반복했는데, 나는 그 말을 들으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서늘했다. 잘한 건 내가 아니라 48년치 기억이었으니까. 정확히는, 48년을 살아본 사람이 4학년 시험지를 상대로 봐주기 하듯 풀어낸 결과였으니까. 상담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삼십 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우리를 맞았다. 단정하게 묶은 머리, 각진 안경, 그리고 그 안경 너머로 보이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첫눈에 봐도 그냥 성적표 나눠주는 상담 선생 같지는 않았다. 뭔가를 관찰하고 분석하는 데 익숙한 눈이었다. "백하윤입니다. S클래스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인사를 마치자마자 곧바로 서류철을 펼쳤는데, 그 안에 내 답안지 사본이 끼워져 있었다. 페이지마다 빨간 펜으로 표시가 되어 있었고, 어떤 문항에는 물음표가 세 개나 붙어 있었다. 저건 감점 표시가 아니라 의문 표시였다. "이한결 학생, 이번 시험 성적이 개원 이래 최고 점수입니다." 어머니가 옆에서 놀란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백하윤은 그 반응에는 별 관심을 두지 않고, 곧바로 답안지의 한 부분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이 문항 말인데요. 미래 통신수단에 대한 서술 문제입니다." 나는 그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내가 애매하게, 적당히 흐려서 썼던 그 답안이었다. 사실 그 문제를 풀 때 나는 꽤 고민했었다. 너무 정확하게 쓰면 이상해 보일 것 같았고, 너무 대충 쓰면 채점자 눈에 걸릴 것 같지도 않았다. 그 균형을 맞추려 애를 썼는데, 결과적으로 그 균형이 오히려 사람의 눈길을 끈 셈이었다. "보통 이 나이대 학생들은 '텔레비전 전화'나 '무전기' 같은 단순한 답을 씁니다. 그런데 학생은 '작은 기계로 사람과 사람이 어디서든 통신하고, 정보를 빠르게 주고받는 방향으로 발전할 것'이라고 썼습니다. 상당히... 구체적인 통찰이더군요." "그, 그건 그냥 텔레비전에서 본 걸 대충 쓴 거예요." 나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했지만, 백하윤의 눈빛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안경을 살짝 밀어 올리며 서류철의 다음 장을 넘겼다. "그렇군요. 그런데 수학 응용문제 풀이 과정을 보면, 4학년 교과과정에서는 배우지 않는 방식으로 접근했습니다. 이건 어디서 배운 겁니까?" 그녀가 짚은 문항은 방정식의 개념을 빌려 풀어낸 응용문제였는데, 나는 그 순간 아차 싶었다. 그 문제는 정직하게 4학년 수준으로 풀어도 답이 나오는 문제였는데, 굳이 더 짧고 효율적인 방식으로 풀어버린 게 문제였다. 습관이라는 게 무서운 거였다. 48년 동안 익힌 사고방식이 몸에, 아니 머리에 배어 있어서, 의식하지 않으면 자꾸 그쪽으로 새는 거였다. '...아, 이거 너무 튀었나.' 나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겉으로는 최대한 태연한 표정을 유지했다. 표정 관리 하나는 이번 생에서 가장 먼저 익힌 스킬이었다. "아빠가 가끔 문제 풀어주셨어요." 거짓말이었지만, 이 상황을 넘길 만한 적당한 핑계였다. 아버지는 지금 이 시간에도 공장에서 야간 근무를 하고 있을 텐데, 그 사람이 나에게 방정식을 가르쳐줄 여유가 있을 리 없었다. 하지만 백하윤이 그걸 확인할 방법은 없었고, 나는 그 점을 믿고 던진 패였다. 백하윤은 잠시 나를 응시하더니, 서류철을 닫으며 말했다. 그 몇 초의 침묵이 유난히 길게 느껴졌는데, 나는 그 시간 동안 그녀가 다음 질문을 던질까 봐, 혹은 더 깊이 파고들까 봐 속으로 조금 긴장하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다음 주부터 S클래스 정규 수업에 들어가게 될 텐데, 첫 시험이 이 정도라면 앞으로가 기대되네요." 그 말투에는 격려 이상의 무언가가 섞여 있었다. 그건 흥미라기보다는, 마치 이상한 변수를 발견한 연구자의 눈빛에 더 가까웠다. 실험용 쥐를 처음 마주한 사람이 지을 법한 표정이었다면 지나친 비유일까. 아니, 지나치지 않을지도 모른다. 나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애써 웃어 보였다. 상담실을 나서면서, 나는 어머니의 표정을 슬쩍 살폈다. 어머니는 여전히 놀란 기색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나를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복도를 걸어가는 동안에도 그 시선은 계속됐고, 나는 그 시선이 부담스러워서 일부러 발걸음을 조금 빨리했다. "한결이 너... 언제부터 이렇게 잘했어?" "저도 잘 모르겠어요." 나는 그렇게 대답하며 속으로 웃었다. 요컨대 이게 내 복수의 첫걸음이었다. 어머니가 나를 이 시스템에 밀어넣은 그 순간부터, 나는 이 시스템 안에서 가장 완벽한 결과물이 되어 어머니의 예상과 기대를 동시에 뒤흔들어놓을 계획이었으니까. 다만 그 계획이 이렇게 빠르게, 그리고 이렇게 강렬하게 어른들의 시선을 끌어당길 줄은 나조차도 예상하지 못했다. 조용히, 눈에 띄지 않게, 그저 남들보다 조금 나은 성적으로 만족스럽게 지나갈 생각이었는데, 현실은 내 계획보다 훨씬 앞서 나가고 있었다. 학원 정문을 나서면서 어머니는 휴대폰으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마 아버지에게, 혹은 친척에게 이 소식을 전하려는 것 같았는데, 그 통화 목소리가 유난히 들떠 있었다. "여보, 한결이가... 아니, 진짜로... 1등이래, S클래스래." 그 말을 들으면서 나는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학원 건물의 간판을 바라봤다. 저 간판 안에서 벌어질 앞으로의 일들이, 생각보다 순탄치 않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날 밤, 나는 방 안에서 다시 그 문구를 마주했다. 불을 끄고 이불 속에 들어가 눈을 감으려는 순간, 시야 한켠에 낯익은 알림이 떠올랐다. [알림: '48년의 기억' 활용도가 급격히 상승했습니다. 주변 관찰 대상이 증가함에 따라 은신 난이도가 상승합니다.] 나는 그 문구를 읽으며 조금 씁쓸하게 웃었다. '...은신 난이도가 상승한다니, 이거 완전 게임 밸런스잖아.' 마치 레벨이 오를수록 몬스터가 강해지는 것처럼, 내가 튀는 만큼 나를 주시하는 눈도 늘어난다는 소리였다. 나쁘게 말하면 감시자가 늘어난다는 거고, 좋게 말하면... 아니, 좋게 말할 구석이 딱히 없었다. 하지만 웃을 일만은 아니었다. 나는 조용히 숨어서 살아갈 생각이었는데, 백하윤이라는 사람의 눈빛은 그 계획을 순순히 허락해줄 것 같지 않았다. 서류철을 덮으면서도 나를 향해 던진 그 마지막 시선, 마치 '나는 아직 너를 다 파악하지 못했다'고 말하는 듯한 그 눈빛이 자꾸 머릿속에서 재생됐다. 어른들의 세계에서 눈에 띄지 않는 아이로 남는다는 게, 생각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예감은, 다음 날 학원에서 곧바로 현실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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