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이도현은 화면 속 랭킹표를 노려보고 있었다.
닉네임 '무영객'.
또 저놈이었다.
3위. 2위를 밀어내고 올라온 자리였다. 도현의 닉네임 '레벨업만해'는 그 아래 4위에 박혀 있었다.
한 칸.
딱 한 칸 차이였다.
중학교 때 같은 수영부였던 놈. 도현보다 반년 늦게 시작했지만 반년 만에 도현을 앞질렀던 놈. 그때는 재능이라는 말로 모든 게 정리됐다. 도현의 팔다리는 아무리 굴려도 근육이 붙지 않았고, 놈의 몸은 물속에서 저절로 미끄러지는 것 같았다.
물살을 가르는 게 아니라 물살이 놈을 밀어주는 것처럼 보였다.
그만두라고 했었다. 코치가.
재능 없는 애한테 시간 쓰는 거 아니라고.
그 말을 들은 게 중학교 2학년 겨울이었다. 그날 락커룸 냄새까지 기억났다. 젖은 수건 냄새, 락스 냄새.
지금 이도현은 고등학교 3학년이었고, 화면 속 무영객은 여전히 뭐든 잘하는 놈이었다. 수영 대신 게임으로 판을 옮겼을 뿐이었다.
씹새끼.
도현은 마우스를 쥔 손에 힘을 줬다.
랭킹전 신청.
도현의 손가락이 버튼을 눌렀다.
로딩바가 채워지는 오 초가 길게 느껴졌다.
매칭 완료.
오랜만이네.
무영객의 첫 채팅이 떴다.
그러네.
도현이 짧게 답했다.
예전처럼 봐줄 생각 없다.
무영객이 덧붙였다.
봐준 적 없잖아.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속은 뒤틀렸다.
봐준 적 없었나.
그때 옆레인에서 웃던 얼굴이 떠올랐다가 지워졌다.
도현의 캐릭터가 스폰됐다. 놈의 캐릭터도 반대편에서 나타났다. 도현은 하루 세 시간을 이 게임에 쏟았다. 정확히는 레벨링에. 던전을 돌고, 몹을 잡고, 경험치 바가 차오르는 그 순간만을 위해 살았다. 노력한 만큼 정확히 숫자로 돌아오는 시스템. 재능이 없어도, 남들보다 늦어도, 시간을 갈아 넣으면 반드시 올라가는 시스템.
수영은 그렇지 않았다.
수영은 아무리 갈아 넣어도 어느 순간 벽이 나왔다. 근육이 아니라 뼈대 자체가 다른 것 같은 벽.
게임에는 그런 벽이 없었다.
적어도 여기까지는.
경험치 바는 순식간에 채워졌다. 도현의 손이 미친 듯이 움직였다. 스킬 콤보가 정확히 박혔다. 무영객의 캐릭터가 뒤로 밀렸다.
한 방, 두 방.
체력바가 뭉텅뭉텅 깎였다.
말도 안 되는데.
무영객의 채팅이 다시 떴다.
도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손끝에 땀이 배어났다. 키보드 소리만 방 안을 채웠다.
타타타탁.
십오 분 뒤 결과창이 떴다.
승리: 도현.
패배: 무영객.
닫히지 않는 채팅창에 무영객의 마지막 말이 남았다.
너 이 정도였냐.
이도현은 그 말을 오래 들여다봤다.
몇 번을 다시 읽었다.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그러던 창밖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우웅.
낮고 진동하는 소리였다. 도현은 헤드셋을 벗고 창문을 열었다. 아파트 단지 너머, 도로 한복판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보라색 안개 같은 것이 지면을 뒤덮고 있었다.
뭐야 저거.
처음엔 화재인 줄 알았다. 아니었다. 불빛이 아니라 안개 자체가 빛나고 있었다.
도현은 신발을 신었다. 부모님은 아직 퇴근 전이었다. 집을 나섰다. 걸어서 오 분 거리였다.
엘리베이터가 유난히 느리게 느껴졌다.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휴대폰을 든 손들이 하늘로 뻗어 있었다. 도현은 인파를 뚫고 앞으로 나갔다.
저게 뭔데 저래.
찍지 말고 신고를 해야지.
주변에서 웅성거리는 말들이 귀에 걸렸다가 흘러갔다.
거대한 균열이 도로 한복판에 떠 있었다. 검은 테두리에 보라색 속살. 그 모양이 마치 찢어진 커튼 같았다. 그 앞에 서자 눈앞에 무언가가 떠올랐다.
빠직.
[스테이터스 창이 활성화되었습니다.]
도현의 눈이 커졌다.
이거 진짜냐.
주변을 둘러봤다. 다른 사람들 눈에는 아무것도 안 보이는 눈치였다. 다들 균열만 보며 사진을 찍고 있었다.
나만 보이는 건가.
옆에 서 있던 아저씨한테 물어볼까 하다가 관뒀다. 미친놈 취급 당할 게 뻔했다.
도현은 손을 뻗어 스테이터스 창을 만지듯 훑었다. 실체는 없지만 반응이 있었다. 손가락 끝에 미세한 저항감이 느껴졌다. 이름, 레벨, 스탯 칸이 모두 0으로 떠 있었다.
이름: 이도현
레벨: 0
힘: 0
민첩: 0
체력: 0
숫자만 나열된 걸 보고 있으니 헛웃음이 났다.
게임이랑 똑같네.
균열 안쪽에서 뭔가 튀어나왔다.
퍽.
작은 짐승 형태의 몬스터였다. 크기는 개만 했고, 몸에서 보라색 안개가 흘러나왔다. 눈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그냥 어둠만 있었다.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물러났다. 도현은 오히려 앞으로 발을 내밀었다.
야 위험해!
뭐하는 거야 학생!
뒤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도현은 듣지 않았다.
이거 잡으면 어떻게 되는 거지.
주변에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경찰도 아직 도착 전이었다. 사이렌 소리는 멀리서만 들렸다.
도현은 발을 굴렀다. 몬스터의 옆구리로 몸을 던졌다. 놈의 앞다리를 걷어찼다. 놈이 균형을 잃고 쓰러졌다.
생각보다 가벼웠다.
무거울 줄 알았는데.
주먹이 정확히 놈의 머리에 꽂혔다.
깨갱.
몬스터가 그대로 안개처럼 흩어졌다. 손등에 남은 감촉이 이상했다. 아무것도 안 만진 것 같으면서도 분명 뭔가를 때린 느낌이었다.
동시에 눈앞에 문구가 떴다.
[레벨업!]
[Lv.1 → Lv.2]
전신에 짜릿한 것이 훑고 지나갔다. 뭔가 뜨거운 게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흘렀다.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이 감각.
이거였다.
노력하면 정확히 돌아오는 그 보상.
재능 없어도 되는, 시간만 쏟으면 확실히 오르는 그 숫자.
수영에는 없던 그 숫자가 지금 눈앞에 떠 있었다.
도현은 그 자리에 서서 한동안 숨을 몰아쉬었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방금 뭘 한 건지 머리로는 정리가 안 됐는데, 몸은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주변 사람들이 휴대폰을 도현 쪽으로 돌렸다.
야, 저 학생 뭐야.
방금 뭐 한 거야.
찍었어? 찍었어?
도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균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안쪽에서 또 다른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었다. 이번엔 하나가 아니었다.
퍽. 퍽.
연달아 두 개의 형체가 튀어나왔다.
입꼬리가 다시 올라갔다.
이번엔 아까보다 훨씬 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