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견습 채집꾼.
도현은 그 문구를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
이게 뭐야.
잘못 뜬 거 아닌가.
시스템 창을 손가락으로 눌러봤다. 문구는 바뀌지 않았다. 견습 채집꾼. 그 아래 스킬 목록도 다시 확인했다.
[식물 감별], [채집 속도 증가 (소)], [약초 구별]
전투 스킬이 하나도 없었다.
이게 초보 탐험자한테 주는 거라고?
던전 입구에 모여 있던 신참 탐험자들이 하나둘 자기 클래스를 확인하고 있었다. 도현은 주변을 둘러봤다. 표정들이 각양각색이었다.
누군가는 [견습 검사]를 받고 검을 뽑아 허공에 그어보며 씩 웃고 있었다.
누군가는 [견습 궁수]를 받고 벌써 표적 삼을 나무를 찾아 시위를 당기고 있었다.
누군가는 [견습 마법사]를 받고 손끝에 작은 불씨를 만들어 보이며 옆 사람한테 자랑하고 있었다.
도현만 풀숲 사이를 뒤지는 채집꾼이었다.
이거 뭐 폼도 안 나잖아.
도현은 낫 모양 도구 하나를 인벤토리에서 꺼내 들었다. 시스템이 던져준 유일한 무기였다. 손잡이는 나무였고 날은 무뎌 보였다. 무게도 가벼웠다. 몬스터 앞에서 휘두르면 오히려 상대가 웃을 것 같은 모양새였다.
이걸로 몬스터를 어떻게 잡아.
한숨이 나왔다.
주변에서 신참 검사 하나가 몬스터를 상대로 검을 휘두르는 게 보였다. 슬라임 같은 몬스터였다. 검이 정확히 박혔다.
퍽.
[레벨업!]
시스템 문구가 그쪽에서 울렸다. 검사는 주먹을 쥐고 소리 없이 포효했다.
도현은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이상한 반응을 느꼈다.
간지러웠다.
레벨업 알림음만 들었을 뿐인데도 몸 어딘가가 반응했다. 목덜미부터 시작해서 손끝까지 짧게 스치는 느낌이었다.
이게 뭐지.
기분 나쁜 건 아니었다. 오히려 조금 더 듣고 싶은 쪽이었다.
도현은 낫을 들고 근처 풀숲으로 다가갔다. 약초 하나가 보였다. 잎이 넓고 끝이 붉은 색을 띠는 풀이었다. 낫을 휘둘러 캤다.
사각.
[약초 채집 성공.]
[경험치 +5.]
전신에 미약한 짜릿함이 스쳤다.
이거다.
경험치를 얻는 순간 오는 그 감각. 던전 밖 게임에서 느꼈던 것보다 훨씬 생생했다. 실제로 몸이 반응하는 느낌이었다. 등줄기를 따라 뭔가 흐르는 것 같았다.
도현은 다시 낫을 휘둘렀다.
또 다른 약초.
사각.
[경험치 +5.]
다시 그 짜릿함.
이번엔 조금 더 길었다.
도현의 손이 점점 빨라졌다.
풀숲을 헤집는 속도가 비정상적으로 빨라졌다. 채집 스킬 [채집 속도 증가]가 반복될수록 미묘하게 강화되고 있었다.
[숙련도 상승: 채집 속도 증가 Lv.2]
숙련도가 오르는구나.
도현은 손목을 몇 번 꺾어보고 다시 낫을 휘둘렀다. 확실히 처음보다 손이 가벼웠다. 풀숲을 훑는 궤적도 짧아졌다.
경험치가 쌓일수록 그 짜릿함도 점점 진해졌다. 도현은 어느 순간부터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이거 마약 같은데.
그런데 끊을 생각이 없었다.
던전 안을 헤집으며 눈에 보이는 모든 채집물을 캐냈다. 약초, 이름 모를 열매, 바위틈에 박힌 광석 조각까지 낫으로 긁어냈다. 다른 신참들이 몬스터 하나 잡는 데 십 분씩 걸리는 사이, 도현은 스무 번 가까이 낫을 휘둘렀다.
옆에서 검사 하나가 헐떡이며 슬라임 한 마리와 씨름하고 있었다.
"야, 너 뭐 하냐."
검사가 물었다. 도현이 풀숲에 코를 박고 있는 모습이 이상해 보였는지 눈썹을 찌푸리고 있었다.
"채집."
"채집꾼이 여기서 뭔 채집을 해."
"경험치 벌잖아."
"그거 얼마나 되겠어."
도현은 대답 대신 낫을 다시 휘둘렀다.
사각.
[경험치 +5.]
검사는 콧방귀를 뀌고 다시 자기 슬라임한테 돌아갔다.
두고 봐라.
[레벨업!]
[Lv.4 → Lv.5]
전신을 훑는 짜릿함이 이번엔 훨씬 강했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도현은 그 자리에 잠시 주저앉았다.
숨이 거칠어졌다.
시야가 잠깐 흐려졌다가 다시 선명해졌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이 감각을 더 느끼고 싶다.
더, 더 많이.
머릿속에서 뭔가가 계속 요구하고 있었다. 도현은 그 요구를 거부할 생각이 없었다.
스탯창을 열었다. 채집 관련 스탯 옆에, 눈여겨보지 않았던 항목이 하나 있었다.
[집중력: 12 → 18]
이건 뭐야.
채집을 반복할수록 집중력이라는 스탯이 함께 올랐다. 그리고 그 옆에 작은 설명 문구가 떴다.
[집중력이 특정 수치를 넘으면 모든 행동에 보정치가 적용됩니다.]
도현의 눈이 빛났다.
이거였다.
남들은 전투 스킬 없다고 무시하는 이 클래스에,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콤보가 숨어 있었다.
경험치를 얻는 쾌감에 몰입할수록 집중력이 오르고, 집중력이 오를수록 모든 행동이 정교해지고 빨라진다.
채집만 계속해도 이게 쌓인다는 거잖아.
전투가 아니라 채집으로 스탯을 올리는 클래스.
도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다리가 아직 후들거렸지만 상관없었다.
눈앞에 슬라임 몬스터 세 마리가 뭉쳐 있었다. 젤리처럼 흐물거리는 몸을 서로 부딪치며 느릿느릿 움직이고 있었다.
낫을 고쳐 잡았다.
이건 채집 도구가 아니라 이제 사냥 도구였다.
이 정도 집중력이면.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낫이 슬라임의 몸을 갈랐다.
촥.
몸이 반응 속도를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정확하게 움직였다. 낫날이 슬라임의 핵을 정확히 스치고 지나갔다.
[레벨업!]
또 한 번 짜릿함이 전신을 훑었다.
이번엔 짜릿함과 함께 다른 감각도 왔다. 손끝의 감각이 예리해진 느낌이었다. 슬라임의 다음 움직임이 눈에 보였다.
도현은 두 번째 슬라임을 향해 낫을 휘둘렀다.
촥.
정확했다.
세 번째 슬라임까지 정리하는 데 걸린 시간은 숨 몇 번 들이쉴 정도였다.
도현의 눈빛이 서서히 변하고 있었다.
이거 진짜 물건인데.
옆에서 씨름하던 검사가 그 광경을 보고 입을 벌린 채 서 있었다.
"방금 뭐야, 너."
도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낫을 든 손이 떨리고 있었지만, 그건 두려움이 아니었다.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시선이 하나 있었다.
풀숲 그늘 아래, 던전 안쪽 깊숙한 곳에서 도현을 바라보고 있는 눈이었다. 사람의 것인지 아닌지 구분하기 어려운 눈빛이었다.
그 시선은 도현이 세 번째 슬라임을 처리하는 순간까지도 움직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