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마왕 잡고 백수 됐습니다

1화

월요일 아침 7시 42분. 지하철 손잡이를 붙잡은 손에 감각이 없다. 손가락 끝이 저리다. 어제도 새벽 세 시까지 노트북을 붙잡고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또 밤샘 보고서 때문이다. 어제도, 그제도, 그 전날도. 이번 주 들어서만 세 번째 밤샘이다. 지하철 창문에 비친 내 얼굴이 낯설다. 다크서클은 이미 턱까지 내려온 것 같고, 눈은 반쯤 감긴 채로 흔들리는 지하철에 몸을 맡기고 있다. 누가 봐도 좀비다. 좀비 그것도 B급 좀비. 김태욱 팀장님은 오늘도 분명 트집을 잡을 것이다. 안 봐도 안다. 지난 삼 년간 매일 아침 겪어온 패턴이니까. 40년을 살면서 배운 게 하나 있다면, 사람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는 것. 특히 김태욱 같은 부류는. 어제 화를 냈으면 오늘도 화를 낸다. 어제 트집을 잡았으면 오늘도 다른 트집을 잡는다. 날씨처럼 예측 가능하다는 게 그나마 위안이라면 위안일까. 아니, 위안이 될 리가 없지. 지하철이 역에 멈추고, 사람들 사이로 몸을 밀어 넣으며 밖으로 나갔다. 회사 건물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벌써 속이 더부룩했다. "강민준씨." 사무실 문을 열자마자 그 목소리가 날아왔다. 아, 시작이다. 오늘도 어김없이. "네, 팀장님." 목소리에 벌써 힘이 빠져 있었다. 아침부터 저 톤이라니. "이 보고서 이게 뭡니까? 숫자가 왜 다 틀렸어요?" 팀장님 손에 들린 보고서가 부들부들 떨렸다. 저 정도로 흔들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어제 팀장님이 수정하라고 하신 부분을..." "내가 언제 그랬어요? 기억 안 나는데?" 기억이 안 난다고 말하면 정말 그런 게 되는 걸까. 이 사람의 세계에서는 그런 모양이다. 말 한마디로 어제의 지시가 오늘의 없었던 일로 바뀌는, 그런 편리한 세계. "분명히 어제 오후 세 시쯤..." "세 시쯤? 그때 나 회의 중이었는데?" "...죄송합니다. 다시 확인하겠습니다." "확인은 무슨, 그냥 다시 해요. 오늘까지." 오늘까지, 라는 말을 나는 벌써 세 번째 듣고 있었다. 첫 번째는 지난주 금요일. 두 번째는 어제. 세 번째는 지금. 매번 다른 보고서, 같은 마감. 같은 협박, 다른 핑계. 주변 동료들은 이미 각자 자리에서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다들 못 들은 척하는 게 습관이 된 지 오래다. 나도 저 자리에서 남이 혼나는 걸 보면 저렇게 시선을 피했을 텐데. 지금은 내가 그 대상일 뿐. 무능하다. 나는 스스로에게 그렇게 낙인을 찍었다. 십 년째 대리, 승진은 남의 이야기, 야근은 내 이야기. 회사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그냥 '있는지도 몰랐던 사람'이었다. 회식 자리에서도 존재감이 없어서 사람들이 내 이름을 헷갈려 부를 때도 있었다. 강민준인지, 강민석인지. 뭐, 상관없다. 어차피 아무도 기억 못 할 이름이니까. 그날도 어김없이 야근이었다. 밤 11시, 사무실엔 나 혼자였다. 형광등 불빛 아래 모니터만 밝게 빛났다. 에어컨 소리조차 이제는 자장가처럼 들릴 지경이었다. 가슴이 답답했다. 체한 걸까? 오늘 점심도 제대로 못 먹었는데. 아니, 오늘 뭘 먹었는지 기억도 안 난다. 커피는 몇 잔을 마셨더라. 세 잔? 네 잔? 답답함이 점점 조여왔다. 숨이 잘 안 쉬어졌다. 목 안쪽에서 뭔가가 꽉 막힌 것 같은 느낌. 뭐지? 손끝이 저려온다. 아까 지하철에서 느낀 그 저림과는 다른, 더 날카로운 감각이었다.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려다 그대로 쓰러졌다. 책상 모서리에 이마를 부딪혔다. 아프다는 감각조차 희미했다. 심장이... 이상하다. 쥐어짜는 것 같다. 누구 좀... 도와줘...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입만 벙긋거렸다. 바닥에 쓰러진 채로 손을 뻗어보려 했지만 팔이 움직이지 않았다. 휴대폰은 책상 위에 있는데, 저 짧은 거리가 지금은 수백 미터처럼 멀게 느껴졌다. 시야가 흐려졌다. 형광등 불빛이 점점 멀어졌다. 사무실 천장의 얼룩진 부분이 마지막으로 보였다. 저 얼룩, 작년부터 있었는데 아직도 안 고쳤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니, 나도 참. 죽는 건가. 이렇게, 야근하다가, 혼자. 허무했다. 40년을 살았는데 마지막이 이 모양이라니. 아무것도 제대로 마무리하지 못한 채로 여기서 끝나는 건가.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올 뻔했는데, 웃을 힘도 없었다. 그리고 어둠. 아무것도 없는, 완전한 어둠. ... 얼마나 지났을까. 감각이 하나씩 돌아왔다. 발이 땅에 닿아 있다. 바람이 느껴진다. 포근한 것도 아니고 차가운 것도 아닌, 애매한 온도의 바람이었다. 눈을 떴다. 하늘이 두 개였다. 아니, 하늘색이 이상했다. 보랏빛과 주황빛이 뒤섞여 있었다. 마치 누가 물감을 잘못 섞어놓은 것 같은 하늘. 여긴 어디지? 주변을 둘러봤다. 돌기둥이 늘어선 신전 같은 공간. 바닥은 대리석처럼 매끈했고, 발밑에서 은은한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그 한가운데, 사람 형체를 한 무언가가 서 있었다. 형체는 있는데 얼굴이 없었다. 빛으로 이루어진 것 같은, 그런 존재. 가까이 다가가지도 않았는데 그 존재감이 온몸을 짓눌렀다. "강민준." 그것이 내 이름을 불렀다. 목소리라기보다는, 머릿속에 직접 울리는 듯한 소리였다. "누구세요..." 목소리가 떨렸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서 하마터면 다시 주저앉을 뻔했다. "나는 신이다." 신? 지금 저 존재가 신이라고 자기소개를 한 건가? 장난인가? 이런 상황에서도 어이가 없다는 생각이 먼저 드는 걸 보면, 나도 어지간히 무덤덤한 인간인 모양이다. "저는... 방금 죽었는데요." "그렇다. 너는 죽었다." "그럼 저는 지금..." "천국도 지옥도 아니다. 나는 너에게 임무를 주기 위해 이곳으로 데려왔다." 임무라니. 죽은 지 몇 분도 안 됐는데 임무라니. 이건 무슨 회사도 아니고, 죽어서도 일을 시키는 건가. "저는 그냥 평범한 회사원이었어요. 뭔가 잘못 데려오신 거 아닌가요? 사람 잘못 보신 거 아니에요?" "틀리지 않았다. 너는 마왕을 격퇴할 자다." 마왕. 그 단어가 머릿속에서 겉돌았다. 게임에서나 나올 법한 단어가 신의 입에서 나오고 있었다. 이거 혹시 몰래카메라 아닌가. 아니, 이미 죽었는데 몰래카메라일 리가 없지. "저는 그런 거 할 줄 몰라요. 컴퓨터도 겨우 다루는데 무슨 마왕을... 검 한 번 잡아본 적도 없다고요." "거부할 수 없다." 단호했다. 마치 이미 결정된 사실을 통보하는 것처럼. 그 어떤 반박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태도. "저기, 잠깐만요. 제 의견은..." "임무를 완수하면 현대로 돌려보내주겠다." 그 말에 심장이 덜컥했다. 돌아갈 수 있다는 뜻인가. 죽었는데도 다시 살던 곳으로?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사무실 바닥에서 숨이 끊어져가던 나였다. 그런데 다시 돌아갈 수 있다니. 이게 기회인 건가, 아니면 함정인 건가. "진짜요? 정말로 돌려보내주신다는 거예요? 원래대로, 살아있는 몸으로요?" "그렇다. 대신 마왕을 무찔러야 한다." 선택권 같은 건 없었다. 애초에 이 존재는 내 대답을 기다리는 게 아니었다. 그냥 통보하는 것이었다. 회사에서 팀장이 "오늘까지"라고 말할 때와 똑같은 구조였다. 거부는 예정에 없는 옵션. "저는... 싫다고 하면 어떻게 되나요?" "선택은 이미 끝났다." 그 말과 동시에 빛이 나를 감쌌다. 온몸이 붕 뜨는 느낌. 발밑의 대리석 바닥이 사라지고, 신전의 기둥들도 하나둘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잠깐만요, 잠깐만요! 나는 소리쳤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입은 벌어졌는데 아무 소리도 새어나오지 않는, 그 답답함이 아까 사무실에서 쓰러졌을 때와 똑같았다. 눈앞이 새하얗게 변했다. 이게 정말 죽음 다음의 이야기라면, 나는 지금 대체 뭘 하고 있는 걸까. 마왕이라니. 격퇴라니. 회사에서도 보고서 하나 제대로 못 쓰는 내가. 칼도 못 잡고, 싸움 한번 제대로 해본 적 없는 내가. 빛이 점점 강해졌다. 그 안에서 얼굴 없는 존재의 형체만이 마지막까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치 이미 모든 걸 정해놓고, 내 반응 따위는 처음부터 궁금하지 않았다는 듯한 그런 시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정신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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