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이도현의 표정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저기, 계약서 얘기..."
"신경 쓰지 마."
그는 단호하게 대화를 끊었다.
단호했다.
너무 단호해서 오히려 이상했다.
원래 이도현은 이런 식으로 말을 자르는 사람이 아니었다.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날 밤, 나는 잠자리에 누워서도 그 표정을 계속 떠올렸다.
찡그린 것도 아니고, 화난 것도 아니고.
그냥... 피곤함? 아니, 그것보다는 조금 더 무거운 것.
죄책감이었을까?
그럴까?
설마 그럴까?
며칠 후, 그 계약서의 진짜 의미를 알게 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던전 심층부로 진입하던 날이었다.
공기부터 달랐다.
지상층과는 비교도 안 되는 마기가 스멀스멀 피어올라서, 숨을 쉴 때마다 목구멍이 따끔거렸다.
마족 무리와의 전투 끝에, 부상당한 동료 한 명이 신전으로 후송됐다.
피가 철철 흐르는 상처를 붙잡고 신전으로 뛰어갈 때, 다리가 후들거렸다.
전투가 끝난 뒤에도 심장은 계속 벌렁거리고 있었다.
그곳에는 신전 소속 사제가 있었는데, 그가 무심코 이런 말을 흘렸다.
"소환된 각성자들은 계약 조건을 잘 모르는 것 같더군요."
계약 조건.
또 그 단어였다.
이도현의 그 표정이 다시 떠올랐다.
"저희는 계약서를 받은 적이 없는데요."
내가 물었다.
사제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눈이 살짝 커지더니, 이내 곤란한 기색으로 바뀌었다.
"받지 않으셨다고요? 그럼 자동으로 최소 조건이 적용됩니다."
"최소 조건이 뭔가요?"
사제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말을 고르는 게 눈에 보였다.
"임무 완수 후 원래 세계로 귀환한다는 조건은 맞습니다. 하지만... 완전한 자유는 아닙니다."
완전한 자유가 아니다.
그 말이 심장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무슨 말씀이세요?"
"소환된 자는 이 세계와 연결되는 흔적을 영원히 안고 살아가게 됩니다. 신이 원하면 언제든 다시 부를 수 있다는 뜻입니다."
뭐라고?
머릿속이 하얘졌다.
사제의 다음 말이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그럼 임무가 끝나도 완전히 자유로워지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렇습니다. 신은 소환한 자를 언제든 도구로 다시 쓸 수 있습니다."
도구.
나는 도구였다.
그 단어가 가슴에 콱 박혔다.
지난 몇 년간 흘린 피, 잃은 동료들, 밤마다 반복된 훈련.
그 모든 것이 결국 신이라는 존재의 손아귀 안에서 벌어진 일이었다는 뜻인가?
분노가 치솟았다.
처음 신을 만났을 때, 그는 임무를 완수하면 돌려보내주겠다고 했다.
그 목소리, 그 자애로운 표정까지 생생하게 기억난다.
하지만 그건 절반의 진실이었던 것이다.
사제에게 더 캐물을 힘도 남아있지 않았다.
나는 신전을 뛰쳐나왔다.
이도현을 찾아가 따졌다.
그는 훈련장 구석에서 검을 손질하고 있었다.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으로.
"알고 계셨죠? 이거."
"...그래, 알고 있었어."
"왜 말 안 해주셨어요!"
소리가 커졌다.
주변 사람들이 돌아봤다.
누군가는 검을 손질하다 멈추고, 누군가는 시선을 피했다.
"말해줘서 뭐가 달라지는데? 여기 온 이상 우리는 다 같은 처지야."
"그래도 알 권리가 있잖아요!"
이도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검을 내려놓고 나를 똑바로 바라봤다.
"나도 처음엔 너처럼 화났어. 3년 전에. 근데 화내봐야 달라지는 건 없더라."
3년 전.
그때 이도현도 나처럼 이 자리에 서 있었을까.
누군가에게 소리치며 이 세계를 저주했을까.
달라지는 게 없다는 말이 더 화가 났다.
"그럼 우리는 평생 이 신의 도구로 사는 거예요?"
"완전히는 아니야. 언제든 다시 부를 수 있다는 거지, 항상 부른다는 뜻은 아니니까. 확률은 낮아. 근데 없다고는 못 하지."
확률이 낮다는 위로.
하지만 낮은 확률도 확률은 확률이었다.
로또도 확률이 낮다고 안 되는 게 아니지 않은가.
서아가 옆에서 조용히 물었다.
"강민준씨, 그럼 우리 세계로 돌아가도 계속... 불안하게 사는 거예요?"
그녀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대답할 수 없었다.
나도 몰랐으니까.
침묵이 흘렀다.
누구도 그 침묵을 깨지 못했다.
그날 이후로 마왕 토벌 임무는 계속됐다.
하루하루가 전투였다.
마족과의 싸움, 던전 탐사, 부상, 회복, 또 전투.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점점 강해졌다.
이도현의 가르침, 실전 경험, 그리고 스스로 만들어낸 무기들.
원래부터 손재주가 좋았던 나는 이 세계의 재료들로 도구를 만드는 법을 배웠다.
마족의 뼈로 만든 검, 던전 속 광석으로 벼린 갑옷.
내 손을 거친 물건들은 이상하게도 다른 사람들이 만든 것보다 성능이 좋았다.
왜인지는 나도 몰랐다.
그냥 손끝이 재료의 결을 읽는 것처럼 움직였다.
"이거 진짜 네가 만든 거야?"
이도현이 놀라며 물었다.
그가 검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감탄하는 모습이 낯설었다.
평소엔 무뚝뚝한 사람인데.
"네, 그냥 만들어봤어요."
"이 정도면 대장장이로도 먹고살겠는데."
"칭찬이에요, 놀리는 거예요?"
"칭찬이야. 근데 좀 놀리는 것도 맞고."
제작이라는 새로운 재능을 발견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전투만 하던 나날 속에서, 대장간 앞에 앉아 망치를 두드리는 시간만큼은 마음이 편했다.
쿵! 쿵!
망치 소리가 머릿속의 잡음을 지워줬다.
서아를 비롯한 신참들도 하나둘 랭크가 올랐다.
E랭크에서 D랭크로, 그리고 몇몇은 C랭크까지.
매번 랭크가 오를 때마다 다들 환호했지만, 그 환호 속엔 항상 그림자가 있었다.
하지만 모두가 살아남지는 못했다.
함께 웃던 소년 한 명이 던전에서 목숨을 잃었다.
불과 며칠 전까지도 나와 같이 밥을 먹으며 이 세계를 벗어나면 뭘 하고 싶은지 떠들던 아이였다.
그 밤, 서아는 오랫동안 울었다.
나도 눈물이 차올랐다.
그래서 제대로 위로도 하지 못했다.
그저 옆에 앉아 있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왜... 왜 이런 곳에 우리가 끌려온 거예요..."
서아가 흐느끼며 물었다.
대답할 말이 없었다.
신이 있다면, 그 앞에 서서 똑같은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
그렇게 세월이 흘렀다.
1년, 3년, 5년.
계절이 바뀌는 것도 잊을 만큼 전투와 훈련의 반복 속에 살았다.
마왕과의 최종 전투가 가까워질 무렵, 나는 어느새 A랭크에 올라 있었다.
처음 소환됐을 때 F랭크였던 걸 생각하면 우습기까지 했다.
그때는 검 한 번 제대로 휘두르지도 못해서 이도현에게 구박받던 게 전부였는데.
이도현과 함께 최전선에서 싸우는 위치가 됐다.
서아도 B랭크 각성자로 성장했다.
어느새 신참이라는 말이 어색할 만큼 다들 베테랑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계약의 그림자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마왕을 무찌르고 돌아가더라도, 완전한 자유는 아니라는 사실.
그 사실은 시간이 지나도 옅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전투가 끝날 때마다, 승리를 자축할 때마다, 그 그림자는 더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 불안을 안고, 우리는 최종 전투를 향해 나아갔다.
"이제 얼마 안 남았어."
이도현이 말했다.
마왕성이 보이는 언덕에서, 우리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그 거대한 성채를 바라봤다.
검은 첨탑들이 마치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었다.
"마왕성까지 가는 데 며칠 걸릴까요?"
"일주일 정도. 근데 강민준, 너 준비 됐어?"
준비라는 게 뭘까.
10년 가까운 시간 동안 나는 계속 준비하고 있었다.
매일같이 검을 휘두르고, 매일같이 새로운 무기를 만들고, 매일같이 죽음을 곁눈질로 봐왔다.
그런데도 마왕과의 싸움은 여전히 미지의 영역이었다.
"해봐야 알겠죠."
그렇게 대답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는 여전히 그 계약의 조건이 무겁게 자리하고 있었다.
돌아간다 해도,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
그게 앞으로 어떤 방식으로 나를 다시 이 세계로, 혹은 또 다른 무언가로 끌어당길지, 그때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이 전투가 끝난다고 해서, 모든 게 끝나는 건 아니라는 것.
언덕 아래로 부는 바람이 서늘했다.
그 바람 속에서, 나는 마왕성의 검은 첨탑을 오래도록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