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발소리가 문 앞에서 멈췄다.
도현은 지팡이를 움켜쥔 채 숨을 죽였다.
숨을 들이켜자 폐 안쪽이 따끔거렸다.
호흡 하나에도 낯선 몸이 반응했다.
이 몸은 도현의 것이 아니었다.
낯선 근육, 낯선 뼈, 낯선 심장 박동.
달칵.
문이 열리고 흰 가운을 입은 사람들이 들어섰다.
발소리가 셋, 넷, 다섯.
차례로 방 안에 들어와 도현을 둘러쌌다.
형광등 불빛이 그들의 안경알에 반사되어 하얗게 번졌다.
선두에 선 노년 남자는 안경을 고쳐 쓰며 도현을 훑어보았다.
시선이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마치 물건을 감정하듯 느리게 움직였다.
명찰엔 '정현민'이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각성률 12퍼센트라니."
그가 혀를 찼다.
"예상보다 낮군."
옆에 선 다른 흰 가운이 손에 든 태블릿을 두드렸다.
화면 불빛이 그의 턱을 아래에서 비췄다.
도현은 지팡이를 앞으로 들었다.
손끝이 지팡이 손잡이의 홈을 짚었다.
익숙하지 않은 손가락 마디의 감촉이 낯설게 걸렸다.
"당신들이… 나한테 뭘 한 거야."
목소리는 여전히 낯설었지만, 말투는 도현 그대로였다.
정현민은 웃음기 없는 얼굴로 대답했다.
"살려준 거다."
"이게 사는 거야?"
도현이 이를 악물었다.
턱 근육이 팽팽하게 당겨지는 게 느껴졌다.
정현민은 대답 대신 손을 들어 올렸다.
손가락 두 개가 허공에서 원을 그렸다.
【시스템 공지】
〈고객님의 기억 통합 마감 시한이 설정되었습니다.〉
〈남은 시간: 71시간 59분 42초〉
숫자가 눈앞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붉은 숫자가 시야 한가운데를 점령했다.
도현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졌다.
"뭐야, 이건."
정현민이 팔짱을 꼈다.
가운 소매가 팔뚝에 눌려 구겨졌다.
"네 안에 다섯 명의 인간 기억이 뒤섞여 있다.
시간이 지나면 그 기억들이 서서히 서로를 잡아먹기 시작해.
마지막엔 전부 지워진다."
"지워지면?"
"네 정체성도, 인격도 사라지고 그냥 마물이 된다.
용마의 뇌를 기반으로 만든 몸이니까."
도현의 손끝이 떨렸다.
갈비뼈 안쪽이 조여드는 것 같았다.
숨을 쉴 때마다 목구멍이 좁아지는 느낌이었다.
'71시간.'
'그 안에 뭘 어떻게 하라는 거야.'
정현민의 뒤에 서 있던 흰 가운 하나가 낮게 속삭였다.
"저 각성률로는 옵션 3도 어려울 텐데요."
정현민이 손을 들어 그를 조용히 시켰다.
〈고객님, 기억 삭제 방지를 위한 옵션을 확인해 주십시오.〉
〈옵션 1. 다섯 개의 기억 중 하나를 주 인격으로 고정(비용: 마력 200)〉
〈옵션 2. 다섯 개의 기억을 균등 분배하여 유지(비용: 마력 500, 각성 지연 발생)〉
〈옵션 3. 정안회 표준 신체 이식 패키지 구매(비용: 별도 결제 필요)〉
도현은 눈앞의 문구를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
글자 하나하나가 눈앞에서 흔들리는 것 같았다.
'마력 200을 쓰면 다섯 명 중 하나만 남는다는 거잖아.'
'그럼 나머지 넷은.'
'그냥 사라지는 거야?'
손끝에 남은 마력 340이라는 숫자가 다시 떠올랐다.
200을 쓰면 140이 남는다.
500을 쓰면 마력이 바닥난다.
어느 쪽도 안전하지 않았다.
도현은 옵션 3의 문구를 다시 읽었다.
'별도 결제.'
'그게 무슨 뜻인지도 안 알려주면서.'
속에서 헛웃음이 올라왔다.
이 몸도, 이 기억도, 이 시간마저도 상품처럼 취급하는 문구였다.
정현민이 손목시계를 확인하며 말했다.
시계 초침이 째깍거리는 소리가 방 안의 정적을 갈랐다.
"결정은 네 몫이다. 다만 오래 끌 순 없어."
"왜 나야."
도현이 물었다.
"왜 하필 나를 이렇게 만든 거야."
정현민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용마의 활동이 최근 급격히 늘었다.
우리에겐 그걸 막을 무기가 필요했지.
네 안에 병합된 다섯 명의 마력 총량이면 충분한 전력이 될 거다."
"난 무기가 아니야."
도현이 소리쳤다.
지팡이 끝에서 빛이 불안정하게 튀었다.
파직.
작은 스파크가 손등을 타고 흘렀다.
〈경고: 감정 기복으로 인한 마력 폭주 위험이 감지되었습니다.〉
손안의 지팡이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정현민이 뒤로 한 발 물러섰다.
그의 뒤에 있던 흰 가운들도 반사적으로 몸을 물렸다.
누군가는 벽 쪽 스위치에 손을 올렸다.
비상 대응 준비처럼 보였다.
"흥분하면 위험해진다. 지금 그 몸은 아직 불완전해."
도현은 숨을 몰아쉬며 지팡이를 겨우 내려놓았다.
손바닥에 화상 자국처럼 붉은 흔적이 남았다.
살갗이 따끔거리며 열기가 남아 있었다.
'침착해야 한다.'
'생각을 해야 해.'
다섯 명의 기억 중 하나를 고르는 것도, 균등하게 나누는 것도 답이 아닌 것 같았다.
어느 쪽이든 도현 자신은 온전히 남지 못할 것 같았다.
가슴 한가운데, 낯선 심장이 낯선 박동으로 뛰고 있었다.
그 박동 속에 다섯 명의 목소리가 섞여 있는 것 같았다.
누군가의 웃음, 누군가의 흐느낌, 누군가의 침묵.
도현은 그 소리들을 구분할 수 없었다.
〈고객님, 결정 시한이 임박하고 있습니다.〉
〈남은 시간: 71시간 47분 09초〉
정현민이 몸을 돌렸다.
가운 자락이 펄럭이며 소독약 냄새를 흩뿌렸다.
"생각할 시간을 조금 더 주지. 하지만 마력을 함부로 쓰지는 마라.
네 몸은 아직 우리 관리하에 있어."
그는 흰 가운을 입은 이들을 데리고 문 밖으로 나갔다.
발소리가 하나둘 멀어졌다.
문이 닫히기 직전, 도현은 그의 뒤에 서 있던 한 여자를 보았다.
서류철을 품에 안은, 단정한 정장 차림의 젊은 여자였다.
머리를 뒤로 단단히 묶고, 안경 너머로 눈이 유난히 맑았다.
명찰엔 '한서아'라는 이름이 있었다.
그녀는 도현을 잠깐 바라보다가 시선을 피했다.
서류철을 쥔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도현은 놓치지 않았다.
그 눈빛에 담긴 것이 동정인지 경계인지, 도현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다른 이들보다 반박자 느리게 몸을 돌렸다.
마지막으로 문턱을 넘는 순간, 그녀의 시선이 다시 한번 도현에게 닿았다.
그리고 곧바로 문 밖으로 사라졌다.
문이 닫혔다.
달칵.
방 안은 다시 정적에 잠겼다.
형광등이 낮게 웅웅거리는 소리만 남았다.
도현은 벽에 등을 기대고 미끄러지듯 주저앉았다.
차가운 벽의 냉기가 등 뒤로 스며들었다.
손목의 검은 문양이 여전히 느리게 박동하고 있었다.
문양 주변의 피부가 미세하게 뜨거웠다.
'71시간 안에 결정해야 한다.'
'근데 뭘 결정해야 하는지도 모르겠어.'
도현은 손바닥을 펼쳐 붉게 남은 화상 흔적을 내려다보았다.
이 몸에 새겨진 것이 자신의 흔적인지, 다섯 명 중 누군가의 흔적인지 알 수 없었다.
'다섯 명.'
'나까지 여섯인가, 아니면 나도 그 다섯 중 하나인가.'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그 순간, 벽 너머에서 낮은 진동이 느껴졌다.
건물 전체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쿠웅.
바닥을 짚은 손바닥에도 진동이 그대로 전해졌다.
먼 곳에서 뭔가 거대한 것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쿠웅. 쿠웅.
간격을 두고 두 번, 세 번.
점점 가까워지는 것 같았다.
도현의 등줄기에 서늘한 감각이 훑고 지나갔다.
그 소리는, 분명히 자신을 삼켰던 그 존재의 것과 닮아 있었다.
문밖 복도 어딘가에서 누군가의 다급한 발소리가 뒤섞여 울렸다.
도현은 지팡이를 다시 움켜쥐었다.
손바닥의 화상 자국이 지팡이 손잡이에 눌려 아려왔다.
숨을 죽이고, 벽 너머의 소리에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쿠웅.
이번엔 훨씬 가까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