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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한서연은 숨을 죽인 채 몸을 벽 쪽으로 붙였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방금 전까지 손에 쥐고 있던 편지 뭉치의 감촉이 아직도 손끝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두 명, 어쩌면 세 명이었다. 발소리의 간격으로 보아 한 명은 체구가 크고, 나머지는 그보다 가벼운 듯했다. '하필 지금.' 한서연은 입술을 깨물었다. 조금만 더 있었으면 마지막 서랍까지 확인할 수 있었을 텐데. "오늘은 아무도 없다고 하지 않았나."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백작님 지시로 잠깐 비운 겁니다. 곧 돌아오실 겁니다." 다른 목소리가 답했다. 목소리는 문 바로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한서연은 그 대화를 들으며 편지 뭉치를 서둘러 서랍에 넣었다. 완벽히 원래 자리로 돌려놓을 여유는 없었지만, 급한 대로 티가 나지 않게 정리했다. 서랍 손잡이를 놓는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여기서 잡히면 끝이다.' 그녀는 재빨리 창가로 이동했다. 다행히 창문은 열려 있었다. 방 안을 마지막으로 한 번 훑었다. 흐트러진 흔적은 없는가, 떨어뜨린 물건은 없는가. 확인할 시간은 없었다. 이미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치맛자락을 걷어 올리고 창턱을 넘는데, 뒤꿈치가 무언가에 걸려 소리가 났다. 하필이면 화분이었다. 도자기 화분이 바닥에 부딪히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누구냐!" 남자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한서연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었다. 정원을 가로지르는 동안 치맛자락이 나뭇가지에 걸려 찢어졌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담을 넘을 때 손바닥이 긁혔지만 아플 새도 없었다. 뒤에서 사람들이 뛰어오는 발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었다. 마차에 올라타고 나서야 그녀는 참았던 숨을 몰아쉬었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마부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지 못하도록 애써 태연한 얼굴을 만들었지만, 손바닥의 긁힌 상처가 욱신거릴 때마다 조금 전의 공포가 되살아났다. '그 사람은 대체 뭘 숨기고 있는 거야.' 그녀는 창밖으로 멀어지는 저택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편지의 내용을 제대로 읽지도 못했다는 사실이 못내 아쉬웠다. *** 다음 날, 한서연은 친우인 윤아영을 찾아가 사교계 정보망에 대해 물었다. 응접실의 소파에 앉아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그녀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운을 뗐다. "선우진 백작에 대해 좀 더 알아봐 줄 사람 없을까."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윤아영은 마시던 찻잔을 내려놓다가 눈을 크게 뜨더니 갑자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찻잔 받침에 잔이 부딪히며 달그락 소리를 냈다. "그 이름은 함부로 입에 올리는 거 아니야." 그녀는 소금이라도 뿌릴 기세로 주변을 살폈다. 창문 밖까지 두 번이나 확인하고 나서야 다시 입을 열었다. "왜? 뭘 알고 있는데?" 한서연이 다급하게 물었다. "우리 오라버니가 예전에 그 사람 뒷조사하려던 사람을 아는데, 그 사람 지금 시골에 처박혀서 안 나온대." 윤아영이 목소리를 낮췄다. "뭘 봤는지는 몰라도, 아주 질려서 도망갔다더라고. 재산도 다 정리하고 아예 이름까지 바꿨다는 소문이 있어." "이름까지?" 한서연의 목소리가 저도 모르게 높아졌다. "쉿." 윤아영이 손가락을 입술에 갖다 댔다. "그러니까 너도 그만두는 게 좋을 거야. 대체 그 사람한테 왜 관심이 생긴 건데?" 한서연은 얼버무릴 말을 찾지 못해 애꿎은 찻잔만 만지작거렸다. 그 말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하지만 이제 와서 물러설 수도 없었다. 결국 정보상 몇을 겨우 소개받았지만, 다들 선우진의 이름만 듣고도 하나같이 고개를 저으며 발을 뺐다. 어떤 이는 이름을 듣자마자 자리에서 일어섰고, 어떤 이는 아예 대화 자체를 거부했다. "제 목숨은 하나뿐이라서요." 어느 정보상은 그렇게 말하며 자리를 떴다. 찻값도 받지 않고 도망치듯 나가는 뒷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또 다른 정보상은 이름을 듣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문을 향해 걸어가며 중얼거렸다. "저는 아무것도 못 들었습니다, 아무것도요." 그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졌다. 결국 한서연은 혼자 움직이기로 결심했다. 정보상들이 겁내는 만큼, 그 남자의 실체는 위험한 것이 분명했다. 그녀는 그날부터 사교계의 소소한 소문들을 직접 모으기 시작했다. 하녀들의 대화, 상인들의 뒷말, 파티에서 흘러나오는 은밀한 귓속말까지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때로는 하녀들 틈에 섞여 빨래를 개는 척하며 귀를 기울였고, 때로는 상점 앞에서 물건 값을 흥정하는 척 시간을 끌며 상인들의 대화를 엿들었다. 서투르던 처세술이 조금씩 다듬어졌고, 명희와 윤아영의 도움으로 정보를 짜맞추는 요령도 늘었다. 처음엔 조각난 소문들이 서로 어긋나 혼란스러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조각들이 조금씩 맞아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주가 흐르는 동안, 한서연은 선우진이라는 사람의 윤곽을 조금씩, 아주 조금씩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냉혹하다는 소문, 자비가 없다는 소문, 그리고 그와 얽힌 사람은 하나같이 끝이 좋지 않았다는 소문까지. *** 같은 시각, 선우진은 자신의 서재에서 보고서 한 장을 손에 들고 있었다. 책상 위에는 그 외에도 여러 장의 서류가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지만, 그의 시선은 오로지 그 한 장에만 머물러 있었다. 보고서에는 최근 며칠간 자신의 저택 근처를 서성이던 여인에 대한 기록이 적혀 있었다. 언제,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까지 세세하게 정리된 내용이었다. '한서연 영애라.' 그는 그 이름을 소리 내어 읽으며 입꼬리를 올렸다. 보고서를 든 손가락으로 종이를 가볍게 두드리며, 그는 그 여인이 남긴 흔적들을 하나씩 다시 짚어보았다. 서재에 침입한 날짜, 담을 넘다 다쳤을 것으로 추정되는 손바닥의 상처, 그리고 이후 사교계에서 은밀히 자신에 대해 캐묻고 다녔다는 정보까지. '생각보다 빠르군.' 그의 계획에는 없던 변수였다. 그러나 그것이 그를 불쾌하게 만들지는 않았다. 오히려 정반대였다. 선우진은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며 낮게 웃었다. 그 웃음소리에는 오랜만에 느껴보는 흥미로움이 묻어 있었다. "재밌게 되었어." 그가 중얼거렸다. 그는 보고서를 접어 서랍 안에 넣고, 대신 새하얀 종이 한 장을 꺼냈다. 펜을 든 손이 잠시 허공에서 멈추더니, 이내 무언가를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날 밤, 그는 평소보다 조금 더 늦게까지 서재의 불을 켜 두었다. 창밖으로 새어 나가는 불빛이,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오래도록 꺼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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