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은발 영애의 두 번째 생

2화

귀족 남성들 사이에서 누군가 웃으며 말했다. "이 시간에 혼자 정원을 배회하시다니, 방금 다과회에서 왕녀 전하께 하신 말씀을 벌써 잊으셨습니까?" 밤 정원의 등불빛이 그들의 얼굴 위로 일렁였는데, 웃고 있었으나 그 웃음 속에는 이미 결론이 정해진 자의 여유가 서려 있었다. 서연은 그 말에 걸음을 멈추고 되물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반문하는 그녀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는데, 그것이 두려움 때문인지 억울함 때문인지는 그녀 자신도 분간할 수 없었다. 궁 안에서 그녀의 이름은 이미 오래전부터 가벼웠다. 몰락한 가문의 딸이라는 꼬리표가 늘 따라붙었고, 그 꼬리표는 누군가 그녀를 헐뜯고자 할 때마다 손쉬운 장작이 되어주었다. 오늘도 다르지 않을 것이었다. 사내 하나가 짐짓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왕녀 전하를 두고 근본 없는 핏줄이라 조롱하셨다지요. 궁 안에 이미 소문이 파다합니다." 서연은 그 순간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것을 느꼈다. 다과회 근처에도 가지 않은 그녀에게, 있지도 않은 말이 죄목으로 씌워지고 있었던 것이다. "저는 오늘 다과회에 참석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서연이 목소리를 다잡으며 말했으나, 사내들은 서로 눈짓을 주고받으며 코웃음을 쳤다. "참석하지 않으셨다니, 그럼 그 자리에 있던 시녀들이 거짓을 고했다는 말씀이십니까?" 다른 사내가 끼어들며 물었고, 서연은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한 채 입술만 깨물었다. 아니라고, 그런 자리에 발조차 들이지 않았다고 항변하려 했으나, 사내들은 이미 답을 정해 놓은 얼굴로 그녀를 둘러싸며 좁혀 왔다. 그들 중 하나가 손을 뻗어 그녀의 소매를 잡으려 했다. 서연은 그들의 손이 팔을 붙잡으려 뻗어오는 것을 보고서야 비로소 몸이 움직였다. 젖은 흙바닥을 미끄러지듯 박차며 회양목 울타리 사이로 빠져나갔고, 등 뒤에서 남자들의 거친 웃음소리와 함께 쫓아오는 발소리가 뒤섞여 울렸다. 치맛자락이 가시나무에 걸려 찢겨나가는 소리가 들렸지만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심장이 터질 듯 뛰었고 숨이 턱까지 차올랐으나, 멈춰 서면 그대로 붙잡힐 것이 분명했으므로 서연은 정원 안쪽으로, 사람이 드문 후원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발밑의 자갈이 구르며 발목을 접질렀지만 아픔을 느낄 겨를조차 없었다. 등 뒤에서 누군가 외쳤다. "거기 서시오, 선 영애!" 그러나 서 있는 순간이 곧 끝이라는 것을 서연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붙잡히면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을 것이다. 이미 소문은 사실이 되어 있었고, 그녀의 항변은 그 사실을 부정하려는 발버둥으로밖에 보이지 않을 터였다. 얼마나 달렸을까, 나뭇가지에 뺨이 긁히고 숨이 거칠어질 무렵, 시야가 트이며 나타난 것은 낯익은 벼랑의 초입이었다. 신의 심판 절벽. 왕궁 사람들이 죄인의 결백을 하늘에 묻는다는 명목으로 몰아붙이던 곳이었으나, 실상 그 아래로 떨어져 살아 돌아온 이가 없다는 소문만이 무성한 장소였다. 결백하다면 신이 구해줄 것이라는 말은 그럴듯했으나, 그 말을 믿고 뛰어내린 이들 중 살아 돌아온 자는 없었다. 그저 죄인을 벌하기 위한 구실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궁 안 사람들 모두가 알고 있었으나, 아무도 그것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서연은 그 낭떠러지 끝에 서서야 자신이 어디로 쫓겨 왔는지를 깨달았다. 그곳에 다다랐을 때, 서연은 뒤쫓던 사내들의 발소리가 문득 잦아드는 것을 느꼈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토록 기세등등하게 쫓아오던 자들이 왜 갑자기 걸음을 늦추는 것일까. 대신 다른 발소리, 훨씬 가볍고 절제된 걸음이 안개를 가르며 다가오고 있었는데, 서연은 그 실루엣이 누구인지 짐작하는 순간 숨이 턱 막혔다. 안개 사이로 드러난 것은 진주 장식이 은은히 빛나는 예복 자락이었다. 제1왕녀 이하윤이었다. 화려한 예복 위로 늘어뜨린 진주 장식이 저녁 어둠 속에서도 은은히 빛나고 있었고, 그녀의 얼굴에는 걱정과 자비를 가장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 미소를 서연은 이미 여러 번 본 적이 있었다. 겉으로는 온화하나 그 아래에는 결코 물러서지 않는 냉정함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궁에서 몇 해를 지낸 서연은 몸으로 배워 알고 있었다. "이런, 선 영애." 이하윤이 걸음을 멈추고 서연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 늦은 시간에 이런 곳까지 오시다니,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나요?" 그 목소리는 다정했으나, 그 다정함 속에 숨은 것이 무엇인지 서연은 이미 알고 있었다. "전하." 서연이 겨우 숨을 고르며 입을 열었다. "저는 다과회에 참석한 적이 없습니다. 누군가 없는 말을 지어내어…" 그러나 말끝이 이하윤의 미소 앞에서 힘없이 흩어졌다. 믿어주지 않을 것이다. 애초에 이 자리에 그녀가 나타난 것부터가 답을 알려주고 있었다. 서연은 대답 대신 뒷걸음질을 쳤다. 발뒤꿈치에 벼랑의 경계석이 닿는 것이 느껴졌는데, 그 서늘한 감촉에 등줄기가 곤두섰다. 자신을 쫓던 사내들이 어느새 이하윤의 뒤편에 늘어서 있었고, 그들 중 하나가 이하윤에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전하, 이 영애가 전하를 능멸하는 말을 하고 다닌다는 소문이 있어 확인차 붙잡으려던 참이었습니다." 그 말에 이하윤은 짐짓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으나, 그 눈빛 깊은 곳에는 서연이 익히 알고 있는 냉기가 서려 있었다. "그런 일이 있었나요." 이하윤이 서연을 향해 한 발짝 다가서며 낮게 웃었다. 안개가 그녀의 발치에서 소리 없이 흩어졌다. "선 영애, 저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는 게 어떨까요?" 그 말은 물음이 아니라 명령에 가까웠다. 서연은 등 뒤로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느끼며, 자신이 이미 벼랑 끝에 서 있다는 사실을 새삼 실감했다. 물러설 곳은 더 이상 없었다.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