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절벽 위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대개 오래전부터 정해져 있던 결말을 향해 흘러간다고, 이 지역 사람들은 믿어 왔다. 신의 심판 절벽이라 불리는 이 벼랑은 본디 죄인의 결백을 하늘에 묻던 자리였으나, 언제부턴가 이곳에 오른 이들 중 살아 돌아온 자가 없다는 소문만이 남아 그 이름값을 대신하고 있었다. 안개는 계절을 가리지 않고 이 절벽을 감싸 안았으며, 그 아래로는 누구도 끝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서연은 그 안개 속에 서서, 자신이 삼 년 전 이 저택에 발을 들였을 때부터 이미 이 순간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이하윤이 손을 들어 올리자 귀족 남성들의 걸음이 잠시 멈추었고, 그녀는 짐짓 재판관이라도 되는 양 근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선 영애, 오늘 다과회 자리에서 저를 두고 근본 없는 핏줄이라 조롱했다는 증언이 셋이나 있습니다. 이에 대해 할 말이 있으십니까?" 그 물음은 심문이라기보다는 이미 정해진 판결을 발표하기 위한 절차에 가까웠다. 이하윤의 목소리에는 흔들림이 없었는데, 그것이 오히려 서연에게는 더 섬뜩하게 다가왔다. 진실을 궁금해하는 자의 목소리가 아니었던 것이다.
서연은 온몸의 힘을 끌어모아 답했다. "증언한 이들의 이름을 알려 주십시오. 그 자리에 있지도 않았던 제가 어떻게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인지, 대질하게 해 주십시오." 목소리가 떨리지 않도록 애썼으나, 손끝은 이미 차갑게 식어 가고 있었다. 삼 년 전 이 저택에 처음 발을 들였을 때도 이와 비슷한 시선들을 받아 낸 적이 있었다. 근본을 따지고, 핏줄을 캐묻고, 어디서 굴러온 것이냐 수군거리던 그 눈빛들을. 그때는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 것이라 믿었으나, 삼 년이 지난 지금 서연은 벼랑 끝에 서 있었다.
그러자 사내들 중 하나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이미 세 사람의 증언이 일치하는데, 대질이 무슨 소용입니까." 다른 사내가 그 말을 받았다. "그렇습니다. 세 분이나 같은 말을 하는데 무엇을 더 확인하겠다는 것인지." 그 말들에는 애초에 진실을 가릴 생각이 없다는 뜻이 노골적으로 담겨 있었다. 서연은 그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눈에 담았다. 그중 누구도 자신과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았는데, 그것이 오히려 이 자리의 성격을 명확히 말해 주고 있었다. 심판이 아니라 처형이었다.
서연은 그 순간 자신이 서 있는 곳이 재판정이 아니라 이미 결론이 내려진 처형장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증거도, 증인의 이름조차도 밝히지 않은 채 죄를 씌우는 이 자리에서, 결백을 증명할 방법 같은 것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그렇게 되어 있었구나. 처음부터 대질 같은 것은 필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하윤이 필요로 했던 것은 진실이 아니라 절차였고, 서연은 그 절차 속의 소품에 불과했다.
이하윤이 다시 입을 열었다. "신의 심판 절벽이 왜 이 자리에 있는지 아시지요? 결백하다면 하늘이 증명해 줄 것입니다." 그녀의 입가에는 옅은 미소마저 걸려 있었는데, 그 미소는 자비를 베푸는 자의 것이 아니라 이미 승리를 확신한 자의 것이었다. 그 말과 함께 사내들이 일제히 서연을 향해 다가섰고, 서연은 벼랑 끝으로 한 걸음 더 밀려났다. 발밑에서 흙이 부스러져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고, 그 아래로는 안개에 잠겨 끝을 알 수 없는 어둠뿐이었다. 등 뒤로 스쳐 가는 바람이 유난히 차가웠다.
"전하, 이건 지나치십니다." 그때 태오가 처음으로 목소리를 높이며 앞으로 나섰다. 그의 얼굴은 창백했고, 검자루를 쥔 손등에는 핏줄이 도드라져 있었다. 서연은 그 모습을 보며 짧은 순간이나마 어떤 기대를 품었던 것을 부인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하윤이 손짓 하나로 그를 제지했다. "태오는 물러나 있어요. 이건 저와 선 영애 사이의 일입니다." 그 명령에 태오는 검자루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서연도 느낄 수 있었으나, 그는 결국 왕녀의 명을 거스르지 못한 채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서연은 그런 태오를 바라보며, 결국 이 순간에도 그는 자신을 구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씁쓸히 받아들여야 했다. 그가 자신을 지켜 주겠노라 약속했던 밤들이 떠올랐다. 등불 아래서 그의 손을 잡고, 그 손이 자신을 이 저택의 어둠으로부터 지켜 줄 유일한 것이라 믿었던 순간들이었다. 그러나 그 약속이라는 것도 결국 왕녀의 명령 앞에서는 종잇장처럼 얇은 것이었구나. 서연은 원망하지 않으려 했다. 태오 역시 이 저택의 그늘 속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사람이었으니까. 다만 그 사실을 깨닫는 것이, 벼랑 아래로 떨어지는 것보다 더 아프게 느껴질 뿐이었다.
사내들의 손이 서연의 팔을 억세게 붙잡으며 벼랑 쪽으로 밀어붙이는 순간, 서연은 발밑의 흙이 완전히 무너져 내리는 것을 느꼈다. 몸이 뒤로 기울며 균형을 잃었고, 그 찰나 누군가 다급하게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서연아!" 그것은 분명 태오의 목소리였는데, 그 목소리가 미처 손을 뻗기도 전에 서연의 몸은 이미 벼랑 아래로 기울어져 있었다.
안개가 시야를 삼키고, 귀에는 바람 소리만이 세차게 스치는 가운데, 서연은 억눌러 왔던 삼 년의 설움과 억울함이 한꺼번에 목구멍을 치받는 것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근본 없는 핏줄이라 손가락질받던 나날들, 다과회 자리에서 등을 돌리던 시선들, 그리고 지금 이 순간까지도 자신을 구하지 못한 태오의 얼굴까지. 그 모든 것이 안개 속으로 함께 흩어지는 듯했다. 떨어지는 몸 아래로 어둠이 입을 벌리고 있었고, 그 어둠 속으로 완전히 삼켜지기 직전, 서연의 의식은 아득히 멀어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