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왕궁 별관 접견실은 오후의 햇살이 스테인드글라스를 통과하며 바닥에 핏빛과 황금빛 무늬를 번갈아 흩뿌리고 있었으나, 그 화려한 빛과는 어울리지 않게 실내를 메운 공기는 서릿발처럼 차가웠다. 시종장은 깍지 낀 손을 책상 위에 올려놓은 채, 맞은편에 무릎을 꿇은 어린 시녀를 내려다보았는데, 그 시선은 사람을 벌레처럼 짓누르는 무게를 지니고 있었다. 접견실 안에는 촛대 하나 켜져 있지 않았고, 오직 창을 통과한 빛만이 공간을 밝히고 있었는데, 그 빛조차 시종장의 등 뒤에서 비쳐 들어와 그의 얼굴에는 짙은 음영만을 남겼다.
"다시 묻겠다." 시종장의 목소리는 낮고 건조했으나 그 안에는 상대를 짓이길 준비가 되어 있는 자의 여유가 배어 있었다. "그날, 광장에서 있었던 일을 하나도 빠짐없이 말해라."
시녀는 어깨를 웅크린 채 손끝을 떨었고, 그 떨림이 옷자락 끝까지 번져 마치 마른 이파리가 바람에 흔들리는 것처럼 보였다. 이마에는 식은땀이 배어 관자놀이를 타고 흘러내렸으나, 그것을 닦을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듯 그녀는 두 손을 바닥에 짚은 채 몸을 더욱 낮추었다.
"저, 저는 그저 왕자 전하께서 길을 잃은 아가씨를 안내해 주시려던 것을 보았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런데?" 시종장이 말을 끊었다. 짧고 예리한 그 두 음절에 시녀의 숨이 턱 막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갑자기 다른 영애님께서 나타나셔서, 아가씨의 손을 잡고 반대편 회랑으로 이끄셨습니다. 왕자 전하께서 헤어핀을 꺼내 드시려던 순간이었는데, 그 영애님이 마치 우연을 가장하여 그 사이를 가로막으셨지요."
시종장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그것은 노여움이 아니라 흥미, 혹은 흥미로 가장된 노여움에 가까운 움직임이었는데, 오랜 세월 왕궁의 그늘에서 온갖 암투를 지켜본 자만이 지을 수 있는 표정이었다. 그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는데, 그 짧은 순간 무언가를 가늠하는 듯한 기색이 스쳤다.
"그 영애의 이름은."
시녀는 입술을 몇 번이나 달싹였으나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두려움이 목구멍을 틀어막고 있는 모양이었다. 손끝이 바닥의 대리석을 긁듯 오그라들었고, 그 손톱 아래로 하얗게 핏기가 빠져나갔다. 시종장은 그 침묵을 참을성 있게 기다리지 않았다.
"이름을 말해라." 목소리에 처음으로 날카로운 결이 섞였다.
"선우…… 선우채영 영애이십니다."
그 이름이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접견실 안의 공기가 한층 더 무겁게 가라앉는 듯했다. 시종장은 등받이에 몸을 깊이 묻으며 손끝으로 책상을 두어 번 두드렸는데, 그 소리가 정적을 가르는 유일한 울림이었다. 손가락이 책상 표면을 두드릴 때마다 시녀의 몸이 움찔거렸는데, 마치 그 소리 하나하나가 자신을 향한 매질처럼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공작가의 둘째……" 시종장이 중얼거리듯 되뇌었다. "장녀도 아니고, 그 둘째가 감히 왕자 전하의 앞을 가로막았다는 말이군."
시녀는 그제야 무언가 잘못 말했다는 걸 깨달은 듯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저, 제가 잘못 본 것일 수도 있습니다……"
"됐다." 시종장이 손을 들어 말을 막았다. 그 손짓 하나에 시녀는 마치 목이 졸린 것처럼 입을 다물었다. "이미 세 사람의 증언이 같은 이름을 가리키고 있다. 더 볼 것도 없지."
시종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그 발걸음은 느리고 조용했으나, 그 안에는 결정을 내린 자의 확고함이 실려 있었다. 마치 뱀이 풀숲을 미끄러지듯 지나가는 걸음걸이였는데, 소리도 없고 흔들림도 없어 오히려 그 정적이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창밖으로는 정원의 장미가 붉게 피어 있었는데, 그 붉음이 문득 핏빛처럼 보였다.
왕자 전하와 그 평민 소녀의 만남이 성사되었더라면, 전하께서 그 소녀에게 관심을 두셨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것이 궁정 내 세력 균형에 어떤 파장을 일으킬지는 아직 알 수 없으나, 최소한 그 가능성의 싹을 자른 자가 누구인지는 이제 명백해졌다.
이 판이 어떻게 짜여 있는지, 아직은 알 수 없다.
하지만 판을 짠 자가 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선우채영이라……" 시종장이 낮게 되씹었다. 그 발음 하나하나에 냉소가 스며 있었다. "공작가 둘째 영애가 왜 그런 짓을 했을꼬."
시녀는 여전히 바닥에 이마가 닿을 듯 고개를 숙인 채였고, 시종장은 그런 그녀를 향해 돌아서지도 않은 채 명령했다.
"이 사실을 폐하께 올릴 것이다. 그리고 사교계에도 흘려라. 조용히, 하지만 확실하게."
"시, 시종장님." 시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입을 열었다. "혹여 제가 잘못 고한 것이라면, 영애님께 해가 미칠 수도 있는데……"
"네가 걱정할 일이 아니다." 시종장의 목소리가 얼음장처럼 낮게 깔렸다. "네 할 일은 본 것을 그대로 말하는 것뿐이지, 그 결과를 헤아리는 것이 아니야."
시녀는 다시 입을 다물었고, 그 침묵 속에서 그녀의 어깨가 조금씩 떨렸다. 마치 자신이 방금 누군가의 운명에 손을 댔다는 것을 그제야 실감하는 듯했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접견실의 문이 열리며 다른 시종 하나가 급히 들어섰다. 숨을 몰아쉬며 예를 갖추는 것도 잊은 듯, 그는 다급한 목소리로 보고를 올렸다.
"시종장님, 백작가에서도 비슷한 증언이 나왔습니다. 그날 선우 영애가 미리 회랑의 경로를 바꿔놓았다는 이야기가……"
시종장의 입가에 처음으로 웃음 비슷한 것이 걸렸다. 그것은 즐거움이 아니라, 사냥감의 궤적을 확인한 자의 냉랭한 만족이었다. 입꼬리는 겨우 손톱 끝만큼 올라갔을 뿐이었으나, 그 미소가 실린 눈빛만은 오싹할 정도로 차가웠다.
"흥미롭군." 시종장이 창밖의 붉은 장미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둘째 영애가 그렇게까지 치밀했다면, 이건 우연이 아니라 계획이다. 그렇다면 그 계획의 목적이 무엇인지도 캐물어야겠지."
그의 시선이 문득 옆에 놓인 서류함으로 옮겨갔다. 오래된 가죽 표지가 세월에 삭아 갈라진 흔적을 드러내고 있었는데, 그 서류함 안에는 선우 공작가에 대한 오래된 기록들이 있었고, 그중에는 유독 둘째 영애에 관한 항목이 얇았다. 손끝으로 종이를 넘기는 소리가 접견실의 정적을 잠시 갈랐다. 존재감이 없는 아이, 라고 누군가 적어놓은 메모 한 줄이 눈에 들어왔다. 그 필체는 오래되어 잉크가 갈색으로 바스러져 있었다.
존재감이 없다고 적힌 그 아이가, 왕자의 운명적인 만남 하나를 순식간에 끊어냈다.
시종장은 그 대비가 우습다는 듯 짧게 코웃음을 쳤다. 그 웃음소리는 접견실의 냉기 속에서 유독 날카롭게 울렸다.
"존재감이 없다……" 그가 메모를 손끝으로 문지르며 되뇌었다. "그렇게 적어놓은 자가 누구인지도 궁금해지는군. 눈이 나빴던 것인지, 아니면 그 아이가 일부러 그렇게 보이도록 처신했던 것인지."
새로 들어온 시종이 조심스레 덧붙였다. "듣기로는 평소 사교 모임에도 잘 나서지 않으시고, 언니이신 장녀 영애님의 그늘에 가려 지내신다고 들었습니다."
"그늘에 가려 지낸다……" 시종장이 서류함을 닫으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늘 속에서 그만한 계산을 할 수 있는 아이라면, 그 그늘이야말로 가장 위험한 자리였을지도 모르지."
그는 서류함 위에 손을 얹은 채 잠시 생각에 잠겼다. 창밖의 장미 넝쿨이 바람에 흔들리며 붉은 꽃잎 하나를 떨어뜨렸는데, 그 낙화가 유리창을 스치며 미끄러지듯 아래로 사라지는 모습이 마치 소리 없이 물러가는 뱀의 꼬리처럼 보였다.
"다시 봐야겠어, 선우채영이라는 이름을."
그 순간 창밖에서 낮게 울리는 종소리가 들려왔다. 오후의 예배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였으나, 시종장에게는 그것이 마치 새로운 사건의 개막을 알리는 소리처럼 들렸다. 그는 종소리가 완전히 사그라들 때까지 창밖을 바라보았고, 그 뒤에야 비로소 몸을 돌려 여전히 바닥에 엎드려 있는 시녀를 향해 걸어갔다.
"가서 전해라. 오늘 이 자리에서 있었던 이야기는, 그 누구에게도 새어나가서는 안 된다고." 시종장의 목소리는 다시 원래의 건조함으로 돌아와 있었으나, 그 안에는 이미 다음 수를 정한 자의 여유가 배어 있었다. "만약 새어나간다면, 그 죄는 네가 지게 될 것이다."
시녀는 온몸을 떨며 고개를 조아렸고, 시종장은 그녀를 지나쳐 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 발걸음 소리가 대리석 바닥에 낮게 울리다가,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완전히 사라졌다. 접견실에는 다시 스테인드글라스를 통과한 핏빛과 황금빛 무늬만이 소리 없이 흔들리고 있었으며, 그 침묵 속에서 시녀는 여전히 무릎을 꿇은 채 숨죽이고 있었다. 아무도 모르는 사이, 선우채영이라는 이름은 이미 왕궁 깊숙한 곳의 서류함 하나를 다시 열게 만들었고, 그 종이 위에 새겨질 다음 문장이 무엇일지는 아직 누구도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