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채영의 방은 저택 안에서도 가장 조용한 위치에 있었는데, 창밖으로는 정원의 회양목이 가지런히 다듬어져 있어 그 규칙적인 모양새가 오히려 서늘하게 느껴지곤 했다. 바람이 불 때마다 회양목 잎사귀들이 사각거리는 소리를 냈지만, 그마저도 이 방의 정적을 깨뜨리기보다는 오히려 그 정적을 더 깊게 만드는 듯했다. 그녀는 화장대 앞에 앉아 거울 속 자신을 오랫동안 들여다보고 있었다.
은빛으로 흘러내리는 머리카락과, 그 아래 자리한 루비색 눈동자. 창문으로 스며드는 오후의 햇살이 머리카락 끝에 닿을 때마다 은빛은 마치 서리처럼 차갑게 반짝였고, 그 서늘한 빛깔 아래로 루비색 눈동자만이 유독 불온한 열기를 품고 있었다. 처음 이 몸의 주인이 되었을 때, 그녀는 이 색채가 얼마나 위험한 상징인지 몰랐었다.
여덟 살이 되던 해, 계단에서 굴러떨어져 머리를 부딪힌 그날 밤, 채영은 낯선 기억의 파편들이 머릿속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것을 느끼며 잠에서 깨어났다. 이마에서 흘러내리던 핏물의 온도와, 사람들의 다급한 발소리, 그리고 그 모든 소란 위로 겹쳐지듯 밀려든 것은 전생의 기억이었다. 좁은 자취방, 밤새 몰아치던 시험 압박, 그리고 그 모든 스트레스를 잊기 위해 몰입했던 여성향 게임 '골든로즈 아카데미'의 화면이 눈앞에 선명하게 되살아났었다. 그 게임 속 배경음악의 선율까지도 귓가에 맴도는 것 같아서, 채영은 한동안 자신이 어느 시간에 속해 있는지조차 구분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게임 속에서, 은발과 루비색 눈동자를 지닌 공작가의 둘째 영애는 다름 아닌 최종 악역이었다.
모든 루트에서 그 영애는 추방당하거나 처형당했다. 왕자 루트에서는 음모가 발각되어 탑에 갇혔고, 기사 루트에서는 결투 끝에 목숨을 잃었으며, 마법사 루트에서는 스스로 저지른 계략에 휘말려 마력을 폭주시킨 끝에 소멸했고, 심지어 숨겨진 히든 루트에서조차 그녀는 사라지듯 죽어야만 서사가 완성되었다. 어느 쪽으로 가도 이 몸의 주인에게는 파멸만이 기다리고 있었다.
채영은 그날 이후 자신이 살아온 여덟 해를, 아니 그 이전의 인생까지 통틀어 처음으로 진지하게 생존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밤마다 이불 속에서 게임의 대사와 분기점을 하나하나 되짚어보았고, 어느 선택이 어느 결말로 이어지는지를 종이에 옮겨 적어 태워버리기를 반복했다. 여덟 살짜리 아이의 손끝에서 그런 냉정한 계산이 나온다는 것을,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거울 속의 자신을 바라보며, 채영은 손끝으로 눈가를 매만졌다. 이 눈동자가 문제였다. 이 색이, 이 얼굴이, 게임이 정해놓은 악역의 표식이었다. 마치 태어날 때부터 형벌을 새겨 넣은 것처럼, 이 얼굴은 언제 어디서든 그녀를 지목할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알고 있었다. 게임의 진짜 주인공은 자신이 아니라는 것을. 시골 고아원 출신의 평민 소녀, 광속성 마력을 지닌 그 아이가 바로 '골든로즈 아카데미'의 여주인공이었다.
그 아이의 이름은 이하은.
채영은 자신이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이 하은을 '노말 엔딩'으로 이끄는 것뿐이라는 결론에 도달했었다. 노말 엔딩에서는 악역인 자신이 등장조차 하지 않았다. 그저 배경으로 스쳐 지나가는 존재로 남을 수 있었다. 그것이 채영이 찾아낸, 유일하게 파멸을 피할 수 있는 좁은 틈이었다. 그 틈을 향해 걸어가기 위해, 채영은 지난 몇 년간 하은의 주변에 조용히 스며들었다. 우연을 가장한 만남, 은근한 도움, 눈에 띄지 않게 흘려주는 정보들. 뱀이 풀숲 사이를 미끄러지듯 움직이는 것처럼, 채영은 언제나 소리 없이 그 아이의 삶 가장자리를 배회했었다.
그런데 최근 들어, 그 계산 속에 뭔가 다른 감정이 스며들고 있었다.
하은과 처음 만났던 날, 낯선 왕도의 골목에서 길을 잃고 두려움에 질려 있던 그 소녀의 얼굴을 떠올리면, 채영의 가슴 한구석이 이상하게 조여드는 것을 느꼈었다. 겁에 질려 눈물이 그렁그렁하던 그 눈동자와, 자신을 향해 뻗어오던 작은 손. 그 온기가 손바닥에 남아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 때마다, 채영은 스스로에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이 단순히 게임 지식에서 나온 전략적 배려인지, 아니면 그 이상의 무언가인지, 채영 자신도 명확히 구분할 수 없었다.
"조종하는 거야, 그뿐이야." 채영은 거울을 향해 나직이 속삭였다.
그 말이 자기 자신을 향한 다짐인지, 아니면 스스로를 속이려는 발버둥인지 모를 일이었다. 거울 속 루비색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을 보며, 채영은 입술을 짧게 깨물었다.
채영은 화장대 서랍을 열어 낡은 손수건 하나를 꺼내 들었다. 색이 바랜 아마 천 위에 서투른 솜씨로 놓인 꽃 자수. 그 손수건은 어머니 유서인이 병상에서 손수 수놓아 준 물건이었다. 손끝이 떨려 실이 자주 엉켰다던 그 밤들을, 채영은 잊지 못했다. 불치병에 걸려 시들어가던 어머니를 위해, 채영은 전생의 지식을 총동원해 오랜 시간 홀로 연구를 거듭했고, 마침내 완성한 엘릭서로 그 병을 완전히 낫게 만들었다. 밤을 새워가며 문헌을 뒤지고, 실패한 약병들을 조용히 치우던 그 시간들이, 지금도 채영의 손끝에 흐릿한 화상처럼 남아 있는 것 같았다.
그 일은 채영에게 유일한 위로였다. 아버지 선우진혁은 언제나 언니 다혜만을 후계자로 바라보았고, 다혜는 채영을 자신이 사라졌을 때를 대비한 대체품 취급하며 노골적으로 무시했었다. 식사 자리에서조차 다혜는 채영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고, 아버지 역시 채영의 존재를 그저 예비품으로만 여기는 눈빛을 감추지 않았다. 이 집안에서 채영을 사람으로 대해 준 유일한 존재는 어머니뿐이었다.
그렇기에 채영은 이 저택의 냉기 속에서도 살아남아야 했고, 게임의 파멸 엔딩에서도 벗어나야 했다. 두 개의 목표가 하나로 겹쳐진 순간부터, 채영의 삶은 온전히 전략이 되었다.
손수건을 다시 서랍 속에 넣으며, 채영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그 눈동자 속에는 나이에 걸맞지 않은 계산과 냉정함이 자리하고 있었지만, 그 아래 깊은 곳에는 여전히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싶다는, 유치할 만큼 순수한 갈망이 숨어 있었다. 그 갈망을 들여다볼 때마다 채영은 스스로가 우습다고 생각했다. 파멸을 피하려는 자가, 여전히 그런 것을 바라고 있다니.
그때 방문이 조심스럽게 열리며 하린이 들어섰다.
"아가씨, 왕실에서 초대장이 도착했습니다." 하린의 목소리에는 평소와 다른 긴장이 섞여 있었다. 그녀의 걸음걸이마저 여느 때보다 조심스러워, 채영은 그 기색만으로도 심상치 않은 소식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번 사교계 데뷔 무도회에 정식으로 참석하라는 명이십니다."
채영의 손끝이 초대장 봉투 위에서 멈추었다. 붉은 왕실 인장이 봉투 위에 선명하게 찍혀 있었는데, 그 붉음이 마치 자신을 향해 겨눠진 칼날처럼 느껴졌다. 촛불 아래 그 인장이 번져 보이는 순간, 채영의 등줄기를 따라 서늘한 감각이 스쳐 지나갔다.
"심문의 결과가 벌써 이렇게 나온 건가." 채영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모두가 보는 자리에서, 나를 시험해 보겠다는 뜻이겠지."
하린이 대답 없이 고개를 숙였으나, 그 침묵 속에는 이미 각오를 다진 자의 결연함이 배어 있었다. 채영은 초대장을 손에 쥔 채 창밖의 회양목을 바라보았다. 규칙적으로 다듬어진 그 초록빛 담장 너머, 왕궁의 방향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유난히 차갑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