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단장님, 성녀만 보이세요?

3화

며칠간 나는 강도윤과 거리를 두기로 결심했다. 먼저 다가가지도 않고, 소식을 캐묻지도 않고, 그저 내 일상을 유지하면서 상황을 지켜보는 쪽으로 방향을 잡은 것이다. 감정적으로 매달리는 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고, 무엇보다 그런 태도가 이 상황에서 아무런 실익도 없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었다. 관망. 그게 내가 세운 전략의 이름이었다. 말은 참 그럴싸하게 지었다. 마치 무슨 대단한 정치적 판단이라도 되는 것처럼. 하지만 속으로는 알고 있었다. 이건 그냥 도망이었다. 먼저 연락했다가 거절당하는 게 무서워서 몸을 사리는 것뿐이었는데, 그걸 관망이라는 근사한 단어로 포장한 거다. 부끄러운 건 아는데, 그래도 이 방법밖에 없었다. 자존심이라도 지켜야 사람 구실 하지. 최소한 며칠은 이 전략이 잘 지켜지는 것 같았다. 나는 자수를 놓거나 서적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고, 강도윤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면 애써 화제를 돌렸다. 시녀가 근위대 이야기를 꺼내려 하면 "아, 오늘 날씨가 참 좋네" 같은 말로 급하게 끊어버렸는데, 그럴 때마다 시녀의 눈빛이 미묘해지는 걸 느꼈다. 눈치가 없는 아이가 아니었으니까. 저 아씨가 뭔가 숨기고 있구나, 하는 표정. 그래도 눈감아주는 게 예의였을 텐데, 다행히 그 정도 상식은 있는 아이였다. 자수틀 앞에 앉아 있으면서도 손은 움직이는데 머릿속은 딴 데 가 있는 시간이 늘어났다. 바늘에 손가락을 두 번이나 찔렸다. 피가 살짝 배어나오는 걸 보면서도 아프다는 감각보다 짜증이 먼저 올라왔다.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이름을 입에 올리지도 않으면서 속으로는 계속 그 이름을 곱씹고 있었으니, 관망이라는 전략이 얼마나 헐거운 건지는 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 평온이 깨진 건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응접실에서 차를 마시고 있던 어느 오후, 갑작스럽게 방문객이 찾아왔다는 전언이 왔다. 놀랍게도 윤지아 영애와 박세인 영애였다. 두 사람 모두 나와 그리 가깝지 않은 사이였는데, 이렇게 예고 없이 함께 찾아온 것부터가 심상치 않았다. 사교 모임에서 인사나 나누는 정도의 친분이었지, 굳이 서로의 저택을 방문할 이유가 없는 관계였다. 그런 사람들이 약속도 없이 손을 잡고 나타났다는 건, 이건 사교가 아니라 사건이라는 뜻이었다. 응접실로 들어선 두 사람의 표정은 하나같이 초췌했다. 화장으로 가리려 했겠지만, 눈 밑의 그늘까지 감출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윤지아 영애의 입술은 몇 번이나 말라서 갈라진 흔적이 있었고, 박세인 영애는 손수건을 이미 한참 쥐고 있었던 듯 구겨진 상태였다. 윤지아 영애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서린 영애, 갑작스레 찾아온 걸 용서해 주세요. 하지만 다른 곳에서는 도무지 말할 곳이 없었어요."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저 사람도 나름 자존심 있는 가문의 영애일 텐데, 이렇게까지 다급해졌다는 게 놀라웠다. 나는 자리를 권하며 무슨 일이냐고 물었지만, 이미 짐작이 가는 바가 있었다. 짐작이 안 갈 리가 없었다. 요즘 사교계에 도는 이야기라면 뻔했으니까. 박세인 영애가 손수건을 꺼내며 눈물을 훔쳤다. "제 혼약자도, 지아 영애의 혼약자도 모두 성녀님의 호위로 선발되었어요. 그런데 그날 이후로 저희에게는 서신 한 장 보내지 않고 있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아, 역시. 이 얘기구나 싶었다. 성녀의 호위로 뽑힌 사내들이 갑자기 연락이 끊겼다는 것. 그리고 그 명단에는 강도윤도 있었다. 윤지아 영애가 이어 말했다. "영애도 같은 처지라고 들었어요. 그래서 저희가 감히 도움을 청하러 온 거예요. 왕녀님과 면담이라도 청해서 이 상황을 바로잡아야 하지 않을까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속으로 아, 씨발, 이렇게 되는구나 싶었다. 나 혼자 조용히 넘어가려던 계획이 순식간에 무너지고 있었다. 며칠간 애써 쌓아 올린 관망의 성벽이 두 영애의 눈물 몇 방울에 와르르 무너지는 걸 실감했다. 이게 무슨 모래성인가. 내 계획이 이렇게 부실했다니. 겉으로는 침착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두 분의 심정은 이해하지만, 저 역시 뭐라 확답을 드리기는 어려운 처지라서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속으로는 계산이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이 상황을 어떻게 빠져나가야 나 혼자만 조용히 있을 수 있을까. 그런데 그런 얕은 수를 이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물러날 기색이 없었다. 박세인 영애가 다시 말했다. "영애께서는 국왕 폐하의 조카이시고, 공작가의 영애이시잖아요. 저희보다는 훨씬 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위치예요. 부디 저희를 위해서라도 왕녀님께 이 상황을 전해주세요." 이쯤 되면 거의 매달리는 수준이었다. 박세인 영애의 눈은 이미 붉게 부어 있었고, 윤지아 영애도 옆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바라보는데, 그 시선이 어찌나 절박한지 마치 내가 유일한 구명줄이라도 되는 것 같았다. 나는 그 순간 이 상황이 얼마나 골치 아픈지 다시 깨달았다. 내가 이 문제에 나서면, 그건 곧 강도윤과의 개인적인 갈등을 왕실 전체의 정치적 문제로 확대시키는 일이 된다. 개인적인 서운함 하나 때문에 왕녀 앞에서 입을 열었다가, 그게 어떤 식으로 왜곡되어 퍼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사교계라는 데가 원래 그렇지 않은가. 진심 반, 계산 반으로 굴러가는 곳. 내 진심이 어느 순간 정치적 카드로 둔갑해서 누군가의 손에서 이용당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자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의 절박한 표정을 보니 그냥 외면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이 문제를 방치했을 때 벌어질 부작용도 걱정이 되었다. 혼약이 파기되는 영애가 늘어날수록, 그 가문들의 불만이 쌓이고, 그 불만이 결국 왕실을 향한 반감으로 번질 수 있다는 계산이 머릿속에서 자동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아버지의 딸답게, 이럴 때는 정치적 셈이 먼저 서는 법이었다. 솔직히 이런 순간마다 스스로가 좀 무섭기도 했다. 방금까지 나 자신의 감정 하나 추스르지 못해서 관망이니 뭐니 하고 있던 사람이, 정치적 파장을 계산하는 순간에는 이렇게 냉정해지다니. 아버지 핏줄이 어디 가겠나 싶었다. 웬만하면 안 닮았으면 좋았을 부분인데. 나는 결국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제가 왕녀님께 면담을 청해보겠습니다. 다만 결과를 장담할 수는 없다는 점, 미리 말씀드릴게요." 두 사람의 얼굴에 안도의 빛이 스쳤다. 박세인 영애는 감사하다는 말을 몇 번이나 반복했고, 윤지아 영애는 내 손을 덥석 잡으며 눈물까지 글썽였다. 나는 그 손을 마주 잡아주면서도 속으로는 딴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게 다 무슨 꼴인가. 관망하겠다고 그렇게 다짐했던 게 겨우 며칠 전인데, 이제 나는 세 사람의 몫을 대변하는 얼떨결의 대표가 되어버린 거다. 그들이 돌아간 뒤 나는 홀로 응접실에 앉아 이마를 짚었다. 관망 전략이 이렇게 하루아침에 무너질 줄이야. 계획을 세울 때는 나름 완벽하다고 생각했는데, 세상일이라는 게 내 뜻대로만 굴러가지 않는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달았다. 창밖으로 지는 해를 보면서 실소가 나왔다. 이 정도면 관망이 아니라 관전이었지. 무대 위로 끌려 나가기 전까지만 잠깐 구경했던 것뿐. 이제 나는 원치 않게 이 문제의 중재자로 서게 된 셈이었다. 그것도 내 개인적인 상처를 감춘 채로. 생각해보면 참 웃긴 상황이었다. 강도윤이 나에게 서신 한 장 보내지 않는 게 서러워서 며칠을 속으로 끙끙댔던 사람이, 이제는 다른 영애들의 서운함까지 대변해서 왕녀 앞에 나서야 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내 상처는 뒷전이고, 남의 상처를 대신 짊어지게 된 꼴이라니. 이런 걸 두고 팔자라고 하는 건가. 창밖으로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고, 나는 내일 있을 왕녀와의 면담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 머릿속으로 몇 번이고 연습을 시작했다. 어떤 말로 시작해야 왕녀의 기분을 거스르지 않으면서도 이 문제를 제대로 짚을 수 있을까. 너무 강하게 나가면 참견처럼 보일 테고, 너무 약하게 나가면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그 사이의 균형을 잡는 게 이렇게 어려운 일이었나. 몇 번이고 문장을 조립하고 부수기를 반복하면서, 나는 이 일이 결국 나 자신의 문제와도 완전히 무관하지 않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 나는 대체 뭐가 되는 걸까. 성녀의 호위로 선발되었다는 이유 하나로 갑자기 연락이 끊겨버린 남자들. 그리고 그 남자들 중 하나가 다른 누구도 아닌 강도윤이라는 사실. 두 영애의 눈물 뒤에 숨겨진 진짜 질문은, 결국 나 자신에게도 똑같이 돌아오는 질문이었다. 강도윤, 대체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있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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