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단장님, 성녀만 보이세요?

4화

왕녀를 알현하는 자리는 생각보다 빨리 마련되었다. 나는 청을 넣은 지 이틀 만에 답을 받았는데, 이렇게 빠른 회신이 온다는 것 자체가 이상하다 싶었다. 보통 왕실의 일정이란 게 이렇게 술술 풀릴 리가 없잖은가. 뭔가 냄새가 난다, 라는 직감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왕궁 정원의 별채는 조용하고 격식 있는 공간이었다. 정원을 가로지르는 자갈길을 걸으며 나는 옷매무새를 몇 번이나 다시 확인했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는데, 이게 긴장인지 추위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였다. 별채 문 앞에서 시녀가 나를 안내하는 동안에도 나는 속으로 오늘 할 말을 몇 번이나 되풀이해서 정리했다. 침착하게, 논리적으로, 감정을 배제하고. 그게 오늘의 다짐이었다. 문이 열리고 나는 왕녀와 마주 앉았다. 왕녀는 나보다 두 살 위였는데, 언제나 예의 바르고 부드러운 말투를 쓰는 사람이었지만, 그 부드러움 뒤에 감춰진 계산은 아버지 못지않게 날카롭다는 걸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찻잔에서 올라오는 김이 두 사람 사이의 어색한 공기를 잠시 가려주었지만, 그 김이 사라지고 나면 결국 본론을 꺼내야 했다. "영애께서 이렇게 갑작스레 면담을 청하신 걸 보니, 무언가 중요한 사안이 있으신가 봐요." 왕녀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부드럽게 물었다. 그 말투는 마치 오랜 친구를 대하듯 온화했지만, 나는 그 온화함이 진심에서 나온 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이 여자는 지금 내 패를 미리 읽고 있는 거다. 나는 최대한 담담하게, 아니, 담담한 척하며 이야기를 꺼냈다. 성녀의 호위로 선발된 귀족가 자제들이 혼약을 사실상 방치하고 있다는 점, 그로 인해 여러 가문의 영애들이 고통을 받고 있다는 점을 조심스럽게 설명했다. 말을 하면서도 나는 속으로 계속 문장을 다듬었다. 너무 감정적으로 들리면 안 된다, 너무 냉정하게만 들려도 안 된다, 균형을 잡아야 한다. 이런 게 외교라는 건가. 아니, 이건 그냥 눈치 싸움이지. 왕녀는 내 이야기를 끝까지 들은 뒤 미소를 지었는데, 그 미소가 어쩐지 위태롭게 느껴졌다. 마치 이미 결론을 알고 있는 사람이 형식적으로 상대의 말을 들어주는, 그런 종류의 미소였다. "영애의 말씀 잘 알겠어요. 하지만 성녀님의 존재가 이 나라에 얼마나 중요한지 아실 텐데요." 나는 그 말에 속으로 이런 개소리가,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아니, 누가 성녀님이 안 중요하다고 했나. 지금 문제가 되는 건 그 중요한 성녀님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다른 사람들의 인생이 짓밟히고 있다는 거잖아. 하지만 겉으로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물론 성녀님의 가치를 부정하는 게 아닙니다. 다만 그로 인해 발생하는 부작용을 최소화할 방법을 함께 고민해 주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최대한 정중하게, 최대한 논리적으로 말했다고 생각했는데, 왕녀는 잠시 생각하는 척하다가 말을 이었다. 그 '생각하는 척'이라는 게 눈에 너무 잘 보여서 오히려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제가 개입한다고 해도, 호위 임무는 이미 국왕 폐하의 결재를 거친 사안이에요. 저 혼자의 힘으로 되돌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니죠." 그 순간 나는 이 자리가 이미 답이 정해진 자리였다는 걸 깨달았다. 왕녀는 애초에 이 일에 개입할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그저 나의 청을 정중하게 들어주는 시늉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속에서 뭔가가 뜨겁게 올라왔는데, 그게 분노인지 좌절인지도 구분이 잘 안 됐다. 이럴 거면 애초에 면담을 왜 잡아준 거야. 시간 낭비하게 만들려고? 그래도 나는 여기서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원래 계획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는 인생인데, 이번만큼은 조금이라도 성과를 내고 싶었다. 나는 한 번 더 밀어붙였다. "그렇다면 최소한 호위들에게 혼약자에 대한 예의를 지키라는 지침이라도 내려주실 수 있을까요." 말을 뱉으면서도 심장이 쿵쿵거렸다. 이게 마지막 카드였다. 이것마저 거절당하면 오늘의 방문은 완전히 헛수고가 되는 거였다. 왕녀는 그 말에 처음으로 살짝 미소를 거두며 나를 응시했다. 그 눈빛이 순간 서늘하게 변했는데, 나는 그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영애, 혹시 이 문제가 개인적인 사정과 겹쳐 있는 건 아닌가요." 그 질문에 나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걸 느꼈다. 걸렸구나. 하늘이 노래지는 것 같았고, 등줄기로 식은땀이 흐르는 게 느껴졌다. 이 여자는 강도윤과 나의 관계를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대체 어디서부터 새어 나간 거야. 내가 그렇게 티를 냈나. 아니면 누가 입을 놀린 건가. 머릿속으로 오만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가는 와중에도 표정은 관리해야 했다. 여기서 흔들리면 진짜 끝이다. 나는 애써 표정을 관리하며 대답했다. "공적인 문제와 개인적인 문제를 구분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은 게 스스로도 신기했다. 이런 걸 두고 위기 대응 능력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그냥 뻔뻔함이라고 해야 하나. 왕녀는 그 대답에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 웃음 속에 담긴 건 위로가 아니라 관망이었다. 마치 실험 대상을 지켜보는 학자의 눈빛 같았다. 저 여자는 지금 내가 어디까지 버티는지 구경하고 있는 거다. 씨발, 이게 뭐야. 결국 그날의 담판은 아무런 실질적 성과 없이 끝났다. 나는 별채를 나서며 씁쓸함을 삼켰다. 정원의 자갈길을 되짚어 걸으면서, 나는 오늘 만남을 처음부터 끝까지 곱씹어 보았다. 왕녀는 나를 도와줄 생각이 애초에 없었고, 그저 내가 어디까지 밀어붙일 수 있는지 시험해 본 것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시험이었다면, 나는 통과한 걸까 실패한 걸까. 알 수가 없었다. 그저 확실한 건, 오늘의 방문으로 얻은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뿐이었다. 마차를 타고 돌아오는 길, 창밖으로 스치는 풍경을 보며 나는 다음 수를 고민했다. 나뭇가지 사이로 새어드는 햇빛이 눈부셔서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는데, 그 순간에도 머릿속은 쉬지 않고 돌아가고 있었다. 왕녀도, 아버지도 나를 도와줄 생각이 없다면, 나는 결국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문제는 그 방법이 뭔지 아직 감이 잡히지 않는다는 거였다. 마차가 흔들릴 때마다 몸도 같이 흔들렸는데, 그 흔들림이 마치 지금 내 처지를 대변하는 것 같아서 헛웃음이 나왔다. 이리저리 흔들리기만 하고 어디로도 나아가지 못하는 신세라니. 왕녀에게 매달려서 뭔가 얻어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나 자신이 순진했던 걸까. 아니면 애초에 이 나라의 구조가 그렇게 짜여 있어서, 어느 누구도 이 문제를 진지하게 다뤄줄 생각이 없는 걸까. 성녀라는 존재가 이 나라에서 갖는 무게를 모르는 건 아니었다. 그 무게 앞에서 혼약이니 예의니 하는 것들은 하찮게 취급되는 게 당연한 걸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부작용을 감당해야 하는 사람들의 고통이 없어지는 건 아니잖아. 나는 창밖으로 시선을 던지며 입술을 깨물었다. 집에 돌아온 나는 방문을 닫고 침대에 걸터앉아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하루 종일 신경을 곤두세운 탓인지 몸이 축 늘어지는 느낌이었다. 오늘 하루가 왜 이렇게 길게 느껴지는지, 그리고 왜 이렇게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로 끝나버렸는지, 스스로에게 되묻고 있었다. 시녀가 가져다준 차도 손을 대지 않은 채 식어갔고, 창밖은 어느새 저녁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깊게 숨을 내쉬었다. 이 정도로 힘이 빠질 일인가, 라고 스스로를 다그쳐 봤지만 몸은 이미 솔직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지쳤다. 그냥, 지쳤다. 그때 창밖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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