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단장님, 성녀만 보이세요?

5화

"서린아, 나 왔어." 창밖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나는 화들짝 놀라 창문을 열었다. 심장이 잠깐 덜컹 내려앉았는데, 이 시간에 창문 두드리는 소리가 날 만한 상황이 좋은 쪽으로 흘러간 적이 없었다는 걸 몸이 먼저 기억하고 있었나 보다. 한소율이었다. 자작가의 영애이자 내 유일한 절친인 그녀가 담을 넘어 정원으로 들어오는 중이었는데, 늘 그렇듯 격식이라는 걸 모르는 방식으로 등장하고 있었다. 치맛자락이 담벼락 이끼에 스치는 소리, 나뭇가지가 부스럭거리는 소리, 그리고 뒤이어 들리는 "아 씨, 걸렸어" 하는 낮은 욕설까지.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정문으로 들어오면 되잖아." 나는 반쯤 웃으며 소리쳤지만, 속으로는 오랜만에 이 얼굴을 보니 마음이 조금 놓이는 게 사실이었다. 오늘 하루 종일 왕녀 앞에서 억지 미소를 짓고 있느라 얼굴 근육이 뻐근했는데, 소율의 뻔뻔한 담벼락 등장 하나로 그 뻐근함이 풀리는 느낌이었다. 이게 친구라는 건가. 아니면 그냥 내가 사람이 좀 그리웠던 건가. 소율은 창턱을 넘어 방 안으로 들어오며 어깨를 으쓱했다. "정문으로 들어오면 하녀장이 또 붙잡고 잔소리를 늘어놓잖아. '아가씨, 담장은 짐승이나 넘는 겁니다' 그러면서 삼십 분은 세워두거든. 나 그 시간에 잠을 자든가 밥을 먹든가 해야지." "그래서 짐승처럼 넘어온 거야?" "짐승이라는 말은 좀 서운하네. 나는 그냥 효율적인 인간이라고." 효율이라는 단어와 담벼락을 넘는 행위 사이에 무슨 연관이 있는지는 여전히 모르겠지만, 굳이 따지지 않았다. 소율과 십 년을 넘게 알고 지내면서 배운 게 하나 있다면, 이 여자의 논리에 논리로 맞서면 반드시 내가 진다는 사실이었다. 소율은 옷매무새를 대충 털며 물었다. "그보다 너, 오늘 왕녀 만나고 왔다며. 어떻게 됐어." 소식이 벌써 퍼진 모양이었다. 이 저택 담벼락보다 소문이 더 빨리 넘어 다니는구나 싶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대체 누가 그렇게 입이 가벼운 건지, 아니면 그냥 이 나라 자체가 사생활이라는 개념이 없는 건지. 나는 침대에 걸터앉으며 오늘 있었던 일을 그대로 털어놓았다. 왕녀의 미묘한 태도부터 시작해서, 겉으로는 웃으면서 속으로는 칼을 갈고 있는 듯한 그 말투, 그리고 결국 아무런 실질적 성과 없이 끝난 면담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말했다. 말을 하면서도 스스로 생각했다. 이거 진짜 아무 소득이 없었구나. 세 시간을 앉아서 차만 마시고 온 셈이잖아. 소율은 팔짱을 끼고 듣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 왕녀도 참, 사람 마음 가지고 노는 재주가 아주 대단하다니까. 뭐 하나 확실하게 주는 것도 없이 사람 헷갈리게만 하고." "확실한 걸 안 주는 게 그쪽 특기잖아. 확실한 걸 주면 자기가 손해 보니까." 나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웃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조금 지쳐 있었다. 하루 종일 눈치싸움을 하고 왔더니 뒷목이 뻐근했고, 이 뻐근함을 풀 방법이 딱히 없다는 게 더 짜증이 났다. "근데 그것보다 더 문제는, 나도 이제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거야." 솔직한 말이었다. 계획이라는 걸 세우려고 해도, 손에 잡히는 게 하나도 없었다. 왕녀는 손을 내밀 듯 말 듯 하고, 다른 영애들은 저마다의 셈을 하며 나에게 부탁 아닌 부탁을 하고, 정작 이 모든 것의 발단이 된 사람은 나를 보지도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뭘 해야 하는지, 나 같은 사람한테 매뉴얼이라도 하나 던져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진심으로 들었다. 소율이 내 옆에 앉으며 어깨를 툭 쳤다. "야, 강도윤 그 인간 얘기는 왜 안 해. 계속 그렇게 무시당하고 있을 거야?" 그 말에 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정곡을 찔린 기분이었다. 사실 오늘 왕녀와의 면담도, 다른 영애들의 부탁도, 결국 그 밑바탕에는 강도윤과의 문제가 깔려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그 문제를 정면으로 마주하지 않고 계속 다른 일로 도망치고 있었던 게 아닌가 싶었다. 왕녀 얘기를 하고, 영애들 얘기를 하고, 정치 얘기를 하면서 시간을 때우면 그 문제가 저절로 사라질 것처럼. 웃기지도 않는 회피였다. "모르겠어. 그 사람이 지금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모르겠고, 이 상황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도 모르겠어." 나는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목소리가 조금 갈라지는 게 느껴져서 스스로도 놀랐다. 이 정도로 감정이 쌓여 있었나. 나는 괜찮은 줄 알았는데. 소율은 잠시 침묵하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서린아, 나는 네가 계속 참기만 하는 게 걱정돼. 너 원래 그렇게 참는 애 아니잖아." 그 말이 맞았다. 나는 원래 부당한 일을 그냥 넘기는 성격이 아니었다. 누가 내 앞에서 헛소리를 하면 그 자리에서 바로 되받아치는 게 내 특기였고, 참는다는 건 내 성정에 어울리지 않는 옷이었다. 그런데 이번 일은 뭔가 달랐다. 개인적인 상처와 정치적 판단이 얽혀 있으니, 함부로 감정대로 움직일 수 없었던 것이다. 화가 난다고 그냥 소리를 지르면, 그 화가 나 하나로 끝나지 않고 가문 전체로, 어쩌면 이 나라의 판도로까지 튀어 나갈 수 있었다. 그게 무서워서 나는 계속 입을 다물고 있었던 거였다. "참는 게 아니라, 참는 척하는 거야. 사실은 매일 밤 이불 속에서 그 인간 욕을 백 번씩 하거든." 내가 애써 가벼운 척 말하자 소율이 코웃음을 쳤다. "그런 걸로 풀리면 다행이지." 맞는 말이라 반박할 수가 없었다. 소율은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그런데 서린아, 내가 오늘 우연히 들은 얘기가 있는데." 나는 귀를 세웠다. 소율의 표정이 평소와 다르게 진지해져 있었다. 이 여자가 저런 얼굴을 하는 건 드문 일이었다. 보통은 장난스럽게 눈을 굴리거나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는데, 지금은 눈썹 사이에 주름이 잡혀 있었다. "성녀 그 여자, 사실 왕궁 안에서도 다들 조심스러워한다더라. 그냥 순진한 이세계인이 아니라, 뭔가 다른 힘을 숨기고 있다는 소문이 있대." 나는 그 말에 심장이 두방망이질 치는 걸 느꼈다. 손끝이 살짝 저려오는 감각도 함께였다. 이런 게 불안이라는 감정인가 보다. "다른 힘이라니, 정화 능력 말고 또 뭐가 있는데." 소율이 목소리를 더 낮췄다. 방 안 공기가 갑자기 무거워진 것 같았다. "그건 나도 정확히는 몰라. 다만 성녀를 호위하는 자제들 사이에서 이상한 소문이 돌고 있대. 그 여자 앞에서는 이상하게 다들 이성을 잃는다고. 강도윤 그 인간도 원래 그렇게 다정한 성격이 아니었잖아."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등골이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등줄기를 따라 찬물이 흐르는 것 같았고, 손에 힘이 저절로 빠졌다. 이게 단순한 감정 변화가 아니라 뭔가 다른 요인이 있는 거라면, 이 문제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심각한 사안이 될 수 있었다. 생각해보면 이상하긴 했다. 강도윤은 원래 그렇게 쉽게 마음을 주는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지나치게 신중하고, 지나치게 계산적이어서 답답할 정도였던 사람이 어느 순간부터 성녀 앞에서만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행동했다. 그게 단순히 첫사랑이라거나 새로운 존재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라고 넘기기엔, 변화의 폭이 너무 컸다. 나는 소율의 손을 잡으며 물었다. "그 소문, 어디서 들은 거야. 믿을 만한 얘기야?" 손을 잡은 순간 소율의 손끝이 미세하게 차가운 게 느껴졌다. 이 여자도 긴장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소율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기사단 소속 시녀한테 들었어. 근데 그 시녀가 말하다가 갑자기 겁먹은 얼굴로 입을 다물었어. 마치 뭔가를 봐서는 안 될 걸 본 사람처럼." 방 안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촛불이 흔들리는 소리마저 크게 들릴 정도였다. 나는 창밖으로 어두워지는 하늘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만약 이 소문이 사실이라면, 지금까지 내가 세웠던 모든 계획을 다시 짜야 할 판이었다. 단순한 삼각관계의 문제가 아니라, 이 나라 전체를 흔들 수 있는 무언가가 이 성녀라는 존재 안에 숨어 있는 거라면. 그렇다면 강도윤의 변화도, 왕녀의 이상한 태도도, 다 하나의 큰 그림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일 수도 있었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정리가 안 되는 게 당연했다. 하루 사이에 정치적 문제, 감정적 문제, 그리고 이제는 뭔가 초자연적인 문제까지 겹쳐버렸으니까. 이거 나 혼자 감당할 수 있는 일인가? 라는 질문이 떠올랐지만, 답을 낼 시간도 없었다. 나는 소율을 향해 낮게 중얼거렸다. "소율아, 나 이거 더 파봐야 할 것 같아." 소율은 나를 잠깐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처럼 장난스러운 말투는 사라지고 없었다. "조심해. 이런 건 파다가 오히려 파는 사람이 다치는 경우가 많아." 그 말이 유난히 마음에 걸렸다. 소율이 이렇게까지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는 건 정말 드문 일이었으니까. 그리고 창밖 멀리, 왕궁 쪽에서 희미하게 붉은 빛이 번쩍이는 걸 본 것 같았다. 그게 그냥 착각이었기를, 나는 진심으로 바랐다.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