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붓을 감춘 후궁

1화

서재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딱 좋은 오후였다. 먼지 한 톨까지 반짝이게 만드는 그런 나른한 빛이었고, 나는 그 빛을 받으며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대윤국 왕실 마도사 선발시험 기출문제집, 정확히는 3년 전 응시자 명단에 내 이름이 올라가는 상상을 하며 마법식을 풀고 있었다. 펜 끝이 종이 위를 사각사각 긁는 소리, 그 소리 하나에 집중하면 세상 시름이 다 잊혔다. 마력 회로 계산은 원래 이렇게 즐거운 게 아닌데, 이상하게도 나는 이 짓이 재밌었다. 남들은 마력 회로 앞에서 하품을 하다가 책상에 코를 박고 잔다는데, 나는 이게 퍼즐 게임처럼 느껴졌다. 한 줄기 마력이 어느 회로를 타고 흘러야 최소한의 소모로 최대의 위력을 내는지, 그 답을 찾아내는 순간의 쾌감이란. 게임으로 치면 만렙 찍고 히든 보스 잡는 기분, 정확히 그 느낌이었다. 청은남작가 셋째 딸 이서윤, 그게 나였다. 신진 귀족 가문답게 재산은 두둑했지만 명예는 얄짤없는, 그야말로 '벼락부자 딱지' 붙은 집안. 돈은 있는데 족보가 없다는 이유로 사교계에서 은근한 뒷담화를 당하는, 딱 그런 집이었다. 그 딱지를 학문으로 떼어보겠다고 어릴 때부터 사숙을 다니며 마법서를 씹어먹듯 읽었다. 밤에 이불 뒤집어쓰고 마법서 읽다가 어머니한테 걸려서 혼난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또래 중에 나만큼 마력 이론에 빠삭한 애가 없었으니까. 사숙 선생님도 나를 보며 "이 정도면 왕궁 마도사 시험도 문제없겠다" 하고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그 말 한마디가 얼마나 오랫동안 내 자존감을 지탱해줬는지 아무도 모를 거다. 왕궁 마도사가 되어 스스로 밥벌이를 하고, 그 다음엔 관직에 올라 아버지의 코를 눌러줄 계획까지 세워뒀었다. 돈으로 산 명예 말고, 내 손으로 딴 명예. 그거야말로 이 집안에 진짜 필요한 거라고 생각했다. 그날 오후도 그 계획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3번 문항, 마력 순환 효율을 계산하는 문제였는데 조금만 더 풀면 답이 나올 것 같았다. 적어도 아버지가 서재 문을 벌컥 열기 전까지는. "서윤아, 잠시 나오거라." 목소리가 평소와 달랐다. 평소엔 딸 이름을 부를 때도 뭔가 사업 계약서 읊는 투였는데, 오늘은 미묘하게 떨렸다. 느낌이 싸했다. 인생 경험상 부모가 저런 톤으로 부를 때는 절대 좋은 소식이 아니었다. 내 안의 경보음이 삐삐 울리기 시작했다. 펜을 내려놓으면서도 손끝이 살짝 굳었다. 응접실로 들어서자 아버지 이광호와 어머니 한소영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두 사람 다 표정이 지나치게 담담했는데, 그게 더 무서웠다. 진짜 폭탄은 늘 저렇게 조용한 얼굴로 떨어지는 법이니까. 살면서 배운 게 하나 있다면, 부모가 실실 웃으면서 다가올 때가 아니라 저렇게 무표정할 때가 진짜 무서운 순간이라는 거였다. "앉아라." 아버지가 손짓으로 맞은편 소파를 가리켰다. 나는 얌전히 앉았다. 심장이 벌써부터 이상하게 뛰고 있었다. "무슨 일이신데요?" "왕비 후보 선발 공고가 났다."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방금까지 풀던 마력 회로 계산식이 머릿속에서 싹 지워지는 느낌이었다. "...네?" "이번 왕비 후보 선발에, 네가 응시하게 되었다." 아버지는 마치 오늘 저녁 반찬 얘기하듯 말했다. 된장국이냐 미역국이냐 정도의 무게로, 딸의 인생을 통보하고 있었다. 나는 몇 초간 이 문장을 이해하려 애썼다. 왕비 후보. 그거 내가 아는 그 왕비 후보인가, 후궁으로 들어가서 평생 궁 안에서 눈치 보며 사는 그 자리인가. 로판 소설에서 몇 번이나 봤던 그 자리, 남주 눈에 들지 못하면 그냥 병풍처럼 살다가 사라지는 그 자리. 내가 그 병풍이 될 예정이라는 소리인가. "저는... 마도사 시험을 준비하고 있는데요." 목소리가 떨렸다. "안다." "근데 왜 저를요?" "네가 우리 딴에서 가장 낫다." 가장 낫다. 이 문장이 칭찬처럼 들리지 않는 건 나뿐인가. 셋째 딸 중에 가장 낫다는 게, 결국 셋 중 팔아넘기기 가장 아깝지 않은 카드라는 뜻 아닌가. 머릿속으로 첫째 언니와 둘째 언니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둘 다 혼처가 이미 정해져 있었고, 나만 아직 백지였다. 그러니까 결국 남는 재고가 나였다는 소리였다. 어머니 한소영이 그제야 입을 열었다. "서윤아, 왕비 후보는 아무나 되는 자리가 아니야. 우리 가문의 격이 오르는 절호의 기회다." 격. 그러니까 결국 이거였다. 신진 귀족이 명문가 흉내를 내려면 딸을 왕궁에 팔아넘겨야 한다는 그 흔한 클리셰. 로판 소설 백 편 읽으면 아흔아홉 편에 나오는 그 설정을 내가 직접 겪게 될 줄은 몰랐다. 책 속에서 읽을 땐 그저 남 얘기였는데, 이게 내 얘기가 되니까 전혀 안 웃겼다. "저는 안 갈래요." 최대한 담담하게 말했지만 목소리가 살짝 갈라졌다. "저는 마도사가 될 거예요. 이미 시험 준비도 다 되어 있고, 실력도..." "결정은 이미 났다." 아버지가 말을 끊었다. 짧고 단단한 문장이었다. 마치 계약서 도장을 찍듯이. 그 순간 나는 이 대화에서 내 의견 따위는 원래부터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는 걸 알았다. 부모님은 이미 결정을 내려놓고 통보를 하러 온 거였다. 협상 테이블이 아니라 판결문 낭독이었던 셈이다. "그럼 저 방금 한 말은 왜 들으셨어요." 목소리에 날이 섰다. "들어주는 시늉이라도 해야 하지 않겠니." 아버지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대답했다. 시늉. 정확한 단어 선택이라고 해야 할지, 너무 솔직해서 어이가 없다고 해야 할지 헷갈렸다. "입궁 절차는 다음 주부터 시작된다. 예복이며 예절 교육이며, 준비할 게 많으니 오늘부터 시간 내라." 어머니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우아한 걸음걸이, 흐트러짐 없는 미소. 항상 저 미소가 문제였다. 웃는 얼굴로 사람 인생을 결정짓는 스타일, 그게 우리 어머니였다. 저 미소 뒤에 숨은 계산이 뭔지 뻔히 보여서 더 얄미웠다. 가문의 격을 위해 딸을 왕궁에 보내는 거면서, 마치 딸의 앞날을 위한 선물이라도 주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은 채로 멀어지는 두 사람의 등을 바라봤다. 두 사람 다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당연하다는 듯이, 이미 결론이 난 대화라는 듯이. 발소리가 복도 저편으로 사라질 때까지 나는 그 자세로 앉아 있었다. 마법식이 적힌 종이가 손에 구겨져 있었다. 언제 서재에서 그 종이를 들고 나왔는지도 기억이 안 났다. 방금까지 풀고 있던 마력 회로 문제, 3번 문항. 영원히 답을 낼 일이 없을 것 같았다. 몇 시간만 더 있으면 풀 수 있었는데. 이 문제 하나 못 푼 게 뭐가 그렇게 서러운지, 나는 그 구겨진 종이만 하염없이 내려다봤다. 다리에 힘이 빠져서 소파에 주저앉았다. 창밖으로 아까 그 좋았던 햇살이 여전히 들어오고 있었다. 세상은 참 뻔뻔하게도 평소와 똑같이 흘러가고 있었다. 시계는 여전히 똑같은 속도로 흘렀고, 정원의 나무들은 여전히 바람에 흔들렸다. 내 인생만 통째로 뒤집혔는데, 세상은 눈치도 없이 잘 돌아가고 있었다. 허탈하게 웃음이 났다. 이게 웃을 상황인가 싶은데도 웃음이 났다. 나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망했다." 딱 그 한마디가 지금 내 인생 요약이었다. 왕궁 마도사가 되겠다던 꿈, 아버지 코를 눌러주겠다던 계획, 다 저 구겨진 종이 한 장처럼 쓸모없어진 기분이었다. 다음 주부터 예복 치수를 재고 예절 교육을 받으면, 나는 정말로 그 왕비 후보라는 자리에 발을 들이게 되는 거였다. 내가 이제까지 씹어먹던 마법서들은 다 어디에 쓸모가 있을까. 문득 그 생각이 들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이 상황에서도 마법서 걱정을 하는 내가 좀 웃기긴 했지만, 지금은 웃을 여유조차 없었다. 앞으로 내가 걸어야 할 그 길이 어떤 모양인지, 나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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