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새벽빛이 행랑채 틈새로 스며들었다.
백호는 눈을 떴다. 천장은 낮았고 서까래엔 거미줄이 매달려 있었다. 거미줄에 매달린 이슬 한 방울이 아침 빛을 받아 반짝였다가, 그가 몸을 일으키는 순간 툭 떨어졌다.
1년이 지났지만 이 몸에 완전히 익숙해지진 않았다. 정신은 스물몇 해를 살았으나 몸은 이제 겨우 열다섯이었고, 그 간극은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다시 확인되었다. 손가락을 펴보면 여전히 가늘고 짧았다. 목소리를 내보면 여전히 낮게 갈라졌다.
'오늘도 살아남았다.' 그는 속으로 그렇게 되뇌며 몸을 일으켰다.
노비 숙소의 아침은 늘 같았다. 밥을 짓는 냄새보다 먼저 매질 소리가 들렸고, 그 소리가 잦아들어야 비로소 하루가 시작되었다. 옆방에서 누군가의 신음이 들렸다가 곧 끊겼다. 백호는 그 소리에 익숙해진 자신이 오히려 낯설었다.
백호는 마당으로 나가 물을 길었다. 우물은 깊었고 두레박은 무거웠다. 줄을 당길 때마다 손바닥의 굳은살이 삐걱거렸다. 이 굳은살은 1년 동안 스스로 만든 것이었다. 처음 이 몸에 눈을 떴을 때, 그는 두레박 하나조차 제대로 끌어올리지 못했다.
숨을 죽여야 살아남는다. 그것은 죽은 어머니가 그에게 남긴 유일한 유산이었다. 백가의 노비였던 그녀는 아들에게 그 말을 반복해서 들려주었고, 백호는 그 말을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 새겨두었다.
'네가 눈에 띄면, 그 순간 넌 이용되거나 버려진다.' 어머니는 늘 그렇게 말했다. '어느 쪽이든 좋은 끝은 없다.'
그녀는 그 말을 남기고 삼 년 전 열병으로 죽었다. 백호가 이 몸에 들어오기도 전의 일이었다. 하지만 그 말은 몸에 새겨진 습관처럼 남아, 지금의 백호를 매일 아침 다시 붙잡았다.
두레박이 우물 턱에 닿았다. 백호는 물을 항아리에 옮겨 담았다. 손등에 물이 튀어 차가웠다.
"오라비!"
밝은 목소리가 담장 너머에서 날아왔다. 백희였다.
백희는 백가의 적녀였으나 백호를 오라비라 불렀다. 그것은 아무에게도 들려서는 안 되는 호칭이었다.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그 호칭이 오갈 때마다, 백호는 주변을 살피는 버릇이 생겼다.
"이런 걸 왜 또 가져오셨습니까." 백호는 두레박을 내려놓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시선은 이미 담장 좌우를 훑고 있었다.
"떡이야. 부엌에서 몰래 챙겼어." 백희가 소매 속에서 종이에 싼 것을 꺼내며 웃었다. 소매 끝에 밀가루가 하얗게 묻어 있었다.
그녀의 웃음은 언제나 계산이 없었다. 백호는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순수함인지 알았다. 계산 없는 웃음은 계산 없는 실수로 이어지고, 그 실수의 대가는 늘 약한 쪽이 치렀다.
"들키면 매를 맞는 건 제가 아니라 아가씨입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결국 떡을 받았다. 종이 너머로 아직 온기가 남아 있었다.
"들키지만 않으면 되잖아." 백희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오라비도 며칠째 끼니를 제대로 못 먹었잖아. 내가 다 봤어."
"제 끼니는 제가 챙깁니다."
"거짓말. 어제도 물만 마셨잖아."
백호는 대답 대신 떡을 손안에 꽉 쥐었다. 반박할 말이 없었다.
남매처럼 지내온 시간이 벌써 1년이었다. 백호가 이 몸에 눈을 뜬 그날부터, 백희는 이유 없이 그를 따랐다. 처음엔 경계했다. 적녀가 노비에게 보이는 호의는 대개 오래가지 않는 법이었으니까. 하지만 1년이 지나도 그녀는 변하지 않았고, 백호는 서서히 그 경계를 풀었다.
왜 그랬는지 백호는 알지 못했다. 다만 이 낯선 세계에서 그것이 그가 가진 유일한 온기였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백희야."
날카로운 목소리가 담장 너머에서 들렸다. 백운이었다.
백희의 친누나이자 백가의 직계 혈맥 소유자. 그녀의 등장은 늘 온기를 걷어갔다. 발소리조차 없이 나타나는 것이, 백호는 늘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서 있었던 것처럼.
"또 여기 있었구나." 백운의 시선이 백호를 스쳤다. 그 시선엔 벌레를 보는 듯한 무심함이 있었다. 눈길이 머무는 시간은 반 호흡도 되지 않았다.
"노비와 어울리는 걸 아버님이 아시면 뭐라 하시겠니."
"그냥 물 긷는 걸 보고 있었을 뿐이에요." 백희가 재빨리 대답했다. 목소리가 살짝 떨렸지만, 표정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래. 보고 있었을 뿐이라 믿어주지." 백운의 입가에 조소가 걸렸다. 그녀는 부채를 접었다 폈다 하며 백호를 다시 한 번 훑었다. "물 긷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겠지. 노비답게."
백호는 그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대꾸할 자격이 없었으니까. 고개를 숙이는 것이 유일하게 허용된 반응이었다.
'몸을 낮춰야 오래 산다.' 그는 다시 어머니의 말을 삼켰다.
백운은 백희의 손을 잡아끌고 사라졌다. 백희는 끌려가면서도 뒤를 한 번 돌아보았다. 그 눈빛엔 미안함이 담겨 있었지만, 소리 내어 사과할 수는 없었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백호는 떡을 다시 종이에 쌌다.
먹을 수 없었다. 지금은 아니었다. 백운의 눈에 남은 떡 부스러기라도 발견되면, 이번엔 백희가 아니라 백호가 매를 맞을 차례였다.
그는 떡을 소매 깊은 곳에 넣고, 다시 두레박을 들었다. 항아리는 아직 반도 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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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중천에 걸릴 무렵, 저택 앞마당에 관리 하나가 나타났다. 백가의 문양이 새겨진 두루마리를 든 그는 노비들을 마당에 불러 모았다. 마당에 모인 사람들의 숫자는 평소 새벽 점호보다 두 배는 많았다.
"백가 혈맥 각성식을 알린다." 관리의 목소리는 딱딱했다.
"15세가 된 자는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모두 참석해야 한다. 이는 가주의 명이다."
백호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심장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옆에 서 있던 늙은 하인이 그를 슬쩍 쳐다보았다. 나이로 따지면 이번 각성식의 대상이 백호라는 것을, 그 시선이 이미 말해주고 있었다.
혈맥은 신분과 무관하게 나타난다고 했다. 그래서 백가는 노비의 자식마저 각성식에 세워왔다. 언젠가 자신의 피 속에서 무엇이 눈뜰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백가의 역사서에는, 노비의 아들에게서 상급 혈맥이 발현되어 하루아침에 방계로 편입된 사례가 기록되어 있다고 했다.
"날짜는 언제입니까." 늙은 하인 하나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의 손자도 올해 열다섯이었다.
"내일이다." 관리가 짧게 답했다.
그 말에 마당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내일. 백호는 그 단어를 몇 번이고 속으로 되뇌었다. 하루도 남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어떤 노비들은 기대에 찬 얼굴이었다. 각성식에서 좋은 혈맥이 나오면 신분이 바뀔 수도 있었으니까. 실제로 그런 사례가 백가의 역사에 몇 번 있었다는 소문이 있었다. 마당 한쪽에서는 벌써부터 "내 자식이 상급이면 어쩌지" 하며 들뜬 목소리로 수다를 떠는 아낙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두려움 쪽이었다. 낮은 혈맥, 혹은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 경우, 조롱거리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무혈맥으로 판정된 자는 평생 '핏기 없는 놈'이라는 낙인을 안고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백호도 들은 적이 있었다.
백호는 두 감정 사이 어디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했다. 기대할 만큼 순진하지도, 두려워할 만큼 잃을 것이 많지도 않았다.
전생의 기억 한 조각이 문득 떠올랐다. 화면 속에서 뛰어놀던 노란 다람쥐 형상의 생물, 그 세계를 사랑했던 스물몇 해의 자신. 손바닥만 한 화면을 붙잡고 밤을 새우던 기억, 친구들과 낄낄대던 기억. 그 세계엔 혈맥도, 신분도, 매질도 없었다.
지금 이 세계에는 그런 것이 없었다. 여긴 그저 혈맥과 신분과 매질이 있는 곳이었다. 그 차이를 새삼 곱씹을 때마다, 백호는 자신이 얼마나 먼 곳에서 왔는지를 실감했다.
'내일이면 알게 되겠지.' 그는 마당의 소란을 뒤로하고 다시 우물가로 돌아왔다.
종이에 싼 떡은 여전히 손안에 있었다. 소매 속에서 온기가 다 식어버린 채로.
그날 밤, 백호는 오랫동안 잠들지 못했다. 창밖으로 별이 유난히 밝았고, 그 별빛 아래 그는 처음으로 이런 생각을 했다.
'만약 내게 특별한 것이 있다면, 나는 더 이상 숨죽이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아직 다짐이라기보다는 물음이었다. 그는 그 물음을 몇 번이고 뒤집어 보았다. 만약 아무것도 없다면, 만약 그저 무혈맥으로 판정된다면, 내일 이후의 삶은 지금보다 더 나빠질 뿐이었다.
하지만 만약 무언가 있다면.
그 가능성 하나가, 이제껏 숨죽이며 살아온 1년의 습관을 흔들고 있었다. 백호는 어둠 속에서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심장이 낮게, 그러나 분명하게 뛰고 있었다.
그 물음은 다음 날 그를 완전히 다른 곳으로 이끌 첫걸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