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창밖으로 늦은 오후의 햇살이 비스듬히 스며드는 시간이면, 윤소은은 언제나 도서관 구석 창가 자리에 앉아 있었다.
먼지 냄새와 오래된 종이 냄새가 뒤섞인 그 자리는, 이 저택 어디에도 그녀만의 공간이 없다는 걸 잊게 해주는 유일한 곳이었다. 두꺼운 책등을 손끝으로 쓸어내리며 페이지를 넘기는 동안에는, 자신이 이 저택에서 얼마나 투명한 존재인지를 잠시 잊을 수 있어서 좋았다. 손끝에 닿는 종이의 결이 거칠거칠했고, 그 감촉을 느끼는 순간에는 아무도 자신을 찾지 않는다는 사실이 오히려 다행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오늘도 오후 세 시가 되면 만나기로 했던 약속이었다. 강윤재가 보낸 전언이었는데, 정작 세 시가 지나고 네 시가 지나도록 그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고, 윤소은은 그 사실에 새삼 놀라지도 않았다.
'그럴 줄 알았지.'
혼약자라는 말이 무색하게, 그는 유년 시절부터 그녀를 향해 눈길 한 번 제대로 주지 않았고, 그것이 이제는 익숙한 풍경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처음 몇 번은 서운함에 창가에 오래 앉아 마차 소리를 세었던 적도 있었지만, 이제는 그런 감정조차 무뎌져서 스스로도 우스울 지경이었다.
책을 읽다가도 문득 창밖으로 시선을 던지면, 마차가 지나가는 소리에 괜히 귀를 기울이게 되는 자신이 우스웠다. 저 소리인가, 하고 고개를 들었다가 지나가는 낯선 마차를 확인하고는 다시 시선을 책으로 돌리는 일을 벌써 몇 번이나 반복했는지 몰랐다.
혹시나, 하는 마음이 아주 조금 남아 있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도 곧 고개를 저으며 다시 책 속으로 파고들었다. 글자들이 눈앞에서 줄지어 흘러가는데도 머릿속으로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습관처럼 시선만 옮기고 있었다.
안경 너머로 글자들이 뭉개지듯 흐려질 때쯤, 사서 박서준이 다가와 책 한 권을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그의 발소리는 언제나 조심스러웠는데, 그것마저도 이 도서관에서만 느낄 수 있는 안정감의 일부였다.
"이거, 소은 양이 좋아할 것 같아서."
표지에는 오래된 항해기가 적혀 있었고, 윤소은은 그 손길이 새삼 고마워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표지의 가죽은 낡아서 손끝에 닿을 때마다 부슬부슬 가루가 떨어질 것만 같았는데, 그 낡음이 오히려 더 정겹게 느껴졌다.
박서준은 그녀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 같았고, 그것이 이상하게도 서글프면서 동시에 안도가 되었다. 누군가 자신을 알아준다는 것이 이토록 드문 일이었던가, 하는 생각이 스치자 코끝이 살짝 시큰거렸다.
"고맙습니다."
짧게 대답하며 책을 받아 드는 손끝이 살짝 떨리는 걸, 윤소은 자신도 눈치채지 못한 채였다. 박서준은 그녀의 표정을 살피다가, 곧 시간이 늦었으니 곧 문을 닫아야 한다고 조심스레 일러주었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는데, 마치 그녀를 다치게 하지 않으려는 사람처럼 조심스러운 어조였다.
"네, 정리하고 나갈게요."
윤소은은 대답하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려다가, 다시 앉아 책의 첫 페이지를 슬쩍 펼쳐보았다. 낯선 항구의 이름과 낯선 배의 이름들이 나열되어 있었는데, 그 낯섦이 오히려 마음을 편하게 만들었다. 적어도 이 이야기 속에서는 그녀를 기다리게 하는 사람도, 그녀를 무시하는 사람도 없을 테니까.
창밖 하늘은 이미 주황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고, 그 색이 마치 오늘 하루의 기다림을 비웃는 것처럼 느껴져서 윤소은은 괜히 서글퍼졌다. 노을은 언제 보아도 아름다웠지만, 오늘만큼은 그 아름다움이 그녀를 더 초라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집으로 돌아가면 또 어머니의 걱정스러운 눈빛과, 아버지의 무심한 인사말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었다. 어머니는 늘 그녀가 늦게 돌아오는 것을 걱정했지만, 정작 무엇이 그녀를 이토록 늦게까지 밖에 머물게 하는지는 묻지 않았다. 아버지는 그저 저녁 식사 자리에서 한두 마디 형식적인 안부만 건네고는, 곧 다른 화제로 넘어가기 일쑤였다.
그리고 동생 민준은, 요즘 들어 부쩍 말수가 줄어서 얼굴 보기도 어려운 나날이었다. 예전에는 누나 손을 붙잡고 따라다니던 아이였는데, 이제는 마주쳐도 눈을 피하기 일쑤였고, 그 변화가 윤소은에게는 낯설고도 조금 쓸쓸했다. 언제부터였을까, 그 작은 손을 놓아버린 것이. 기억을 더듬어도 정확한 순간은 떠오르지 않았고, 그저 어느 날 문득 돌아보니 그렇게 되어 있었다는 사실만이 남아 있었다.
책을 가방에 챙겨 넣으며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도서관 입구 쪽에서 낯선 발소리가 들려왔다.
또각또각, 걸음걸이에 리듬이 있는 소리였다. 이 시간에 도서관을 찾는 사람은 드물었기에 윤소은은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저택 안팎을 통틀어도 이런 시간에 도서관을 드나드는 사람은 몇 없었고, 그 몇 안 되는 얼굴들은 이미 그녀에게 익숙한 얼굴들이었다. 그러니 이 발소리는 분명 처음 듣는 것이었다.
키가 크고 짙은 색 코트를 걸친 남자가 서가 사이로 들어서고 있었는데, 그 얼굴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어깨가 넓고 걸음이 곧아서, 마치 오래전부터 이 도서관의 통로를 걸어온 사람처럼 자연스러운 발걸음이었다.
낯선 이의 시선이 잠시 그녀 쪽을 향했다가, 이내 책장으로 옮겨 가는 걸 보며 윤소은은 이유 없이 심장이 조금 빨리 뛰는 것을 느꼈다. 그 눈길은 짧았지만, 스치듯 지나간 순간에도 무언가를 가늠하는 듯한 서늘함이 담겨 있었다.
누구인지 궁금해할 필요는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어깨 너머로 다시 한 번 그를 돌아보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알 바인가.' 속으로 되뇌면서도 시선은 자꾸만 그의 뒷모습을 좇고 있었다.
남자는 서가 앞에 멈춰 서서 책등을 손가락으로 훑어 내리며, 마치 오래전부터 이곳을 드나든 사람처럼 익숙한 태도로 책을 골라내고 있었다. 손가락 하나하나가 책등을 따라 미끄러지듯 움직였는데, 그 움직임에는 낯익음이랄까, 여유랄까 하는 것이 묻어 있었다.
그 손끝이 멈춘 책이, 하필이면 윤소은이 저번 주에 다 읽고 아쉬워하며 반납했던 그 항해 소설이라는 걸 알았을 때는, 왜인지 묘한 기분이 들었다. 흔한 책이 아니었는데, 이 넓은 서가에서 그 손이 정확히 그 자리에서 멈춘 것이 우연이라고만 하기엔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
같은 취향을 가진 사람일까, 그런 생각이 스치는 것과 동시에, 박서준이 낮은 목소리로 문 닫을 시간을 다시 알렸다. 그 목소리에 정신이 든 윤소은은 서둘러 가방을 고쳐 메고 출구로 향했지만, 남자의 옆을 지나칠 때 어쩐지 걸음이 조금 느려지는 것을 느꼈다.
가까이서 보니 그의 코트 자락에서 옅은 밤바람 같은 냄새가 났는데, 그것이 어디서 나는 냄새인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저택 안에서 자라며 익힌 향들과는 전혀 다른, 낯선 바깥의 공기 같은 냄새였다.
그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고, 짙은 눈동자가 잠시 무언가를 가늠하는 듯 스쳐 지나갔다. 그 시선에는 호기심도, 무심함도 아닌 알 수 없는 무게가 담겨 있어서, 윤소은은 저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인사도 없이, 눈짓 한 번도 없이 그저 스쳐 지나가는 순간이었다. 그런데도 윤소은은 그 시선이 오래도록 등 뒤에 남아 있는 것처럼 느껴져서 마차에 오르는 내내 어깨가 굳어 있었다. 마차 문이 닫히고 나서도 한동안 심장이 평소보다 조금 빠르게 뛰고 있다는 걸, 그녀는 뒤늦게야 알아차렸다.
'그런데 왜?'
이유를 알 수 없는 물음이 머릿속을 맴돌았지만, 답은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처음 보는 얼굴이었을 뿐인데, 처음 듣는 발소리였을 뿐인데, 왜 이렇게 마음 한구석이 술렁이는지 스스로도 알 도리가 없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창밖으로 저물어 가는 하늘을 바라보며 그녀는 생각했다. 짙은 보랏빛으로 변해가는 하늘 아래로 저택의 지붕이 서서히 가까워지고 있었고, 그 익숙한 풍경이 오늘만큼은 조금 낯설게 느껴졌다.
오늘 도서관에서 마주친 그 낯선 얼굴이, 앞으로의 나날에 무언가를 바꿔놓을 것이라는 걸, 그때는 전혀 알지 못했다. 그저 마차의 흔들림에 몸을 맡긴 채, 손안에 쥔 오래된 항해기의 표지를 만지작거리며, 왠지 모르게 그 남자가 골라 든 같은 책의 다음 페이지가 궁금해졌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