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선우진이 정말로 약을 지어 보낸 것은 바로 다음 날 아침이었다. 하녀가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문을 두드리고 들어와 작은 유리병을 서은에게 건네주었는데, 그 안에는 짙은 갈색의 액체가 담겨 있었고, 코끝을 스치는 냄새만으로도 쓴맛이 그대로 느껴질 만큼 강렬했다. 병 겉면에는 낯선 필체로 무언가 적혀 있었는데, 아마도 복용량을 표시한 것 같았지만 서은은 알아볼 수 없는 글자였다.
"공작님께서 아침저녁으로 한 숟갈씩 드시라 하셨습니다." 하녀가 조심스럽게 전했다. "혹시 맛이 너무 쓰시면 꿀을 조금 타서 드셔도 된다고 하셨어요."
서은은 그 병을 손에 쥔 채 한참을 바라보았다. 이런 것을 받아본 적이 언제였던가, 생각해보니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계모는 서은의 기침 소리가 들리면 오히려 짜증을 냈을 뿐, 약을 지어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으므로. 오히려 아플 때는 조용히 방에 들어가 이불을 덮고 참는 것이 서은이 아는 유일한 처방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 낯선 저택의 낯선 주인이 자신을 위해 손수 약을 지었다는 사실이 이상하게도 가슴 한켠을 뻐근하게 만들었다.
그날부터 서은은 매일 아침 정원을 걸었다. 정원은 저택의 살벌한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게 아름다웠는데, 계절이 지나도 시들지 않는 이상한 꽃들이 만발해 있었고, 그 사이를 걷다 보면 마치 다른 세계에 온 듯한 착각이 들었다. 붉은 꽃잎을 가진 것도 있었고, 밤이 되면 은은하게 빛을 내는 듯한 하얀 꽃도 있었다. 서은은 그 꽃들이 선우진이 연구하는 약초들일지도 모른다고 짐작했다. 매일 아침 약을 삼키고 나면 쓴맛이 입안에 오래도록 남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쓴맛이 싫지 않았다.
어느 날 아침, 정원을 걷던 서은은 예상치 못하게 선우진과 마주쳤다. 그는 웃옷을 벗고 나무를 손질하고 있었는데, 검은 머리카락이 아침 햇살에 비쳐 비단처럼 부드럽게 흔들리고 있었고, 그 옆모습은 마치 조각가가 정성껏 깎아낸 조각상처럼 정적이면서도 아름다웠다. 팔뚝에 흐르는 힘줄과 그 위로 미끄러지는 땀방울까지도 마치 세필로 그린 그림 같아서, 서은은 그 모습에 잠시 걸음을 멈추고 넋을 놓았다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깨닫고 화들짝 놀라 고개를 숙였다.
"거기서 뭐 하나." 선우진이 그녀를 발견하고 물었다.
"산, 산책 중이었습니다." 서은이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약은 먹었나."
"네, 네. 아침에 먹었습니다. 쓰, 쓰긴 한데……." 서은은 말끝을 흐리다가, 괜히 솔직하게 말한 것 같아 얼굴이 붉어졌다.
선우진은 손에 든 가지치기 도구를 내려놓고 다가왔는데, 그 순간 나무 위에서 마른 나뭇가지 하나가 부러지며 서은 쪽으로 떨어졌다. 서은이 놀라 뒤로 물러서려는 순간 발이 돌부리에 걸렸고, 그대로 넘어질 뻔했으나 선우진이 재빨리 팔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우당탕, 나뭇가지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서은은 선우진의 손이 자신의 어깨를 잡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온몸이 굳어버렸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놀라서인지 다른 이유인지 서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그의 손바닥은 생각보다 뜨거웠고, 손가락 사이로 느껴지는 힘은 단단하면서도 조심스러웠다.
"조심해." 선우진이 짧게 말하며 손을 뗐는데, 그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살짝 낮게 잠겨 있었다.
"가, 감사합니다." 서은은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을 느끼며 시선을 피했다. 어깨에 남은 그의 손의 온기가 이상하게도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았다. 옷감 위로 남은 그 감각이 마치 낙인처럼 선명해서, 서은은 몇 번이나 자기 어깨를 슬쩍 매만졌다.
선우진 역시 잠시 말없이 서 있었는데, 그의 귀 끝이 아주 살짝 붉어져 있다는 것을 서은은 알아채지 못했다. 그는 곧 헛기침을 하며 다시 도구를 집어 들었다.
"다음부턴 앞을 보고 걸어." 그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여기 돌부리가 많다."
"네, 넵." 서은은 도망치듯 걸음을 옮겼는데, 몇 걸음 걷다가 뒤를 돌아보니 선우진이 여전히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서은은 그 시선을 느끼며 더욱 빠르게 걸음을 옮겼고, 저택 안으로 들어오고 나서야 겨우 숨을 돌렸다. 심장은 여전히 진정되지 않은 채였다.
그날 저녁 식사 자리에서 두 사람은 여느 때처럼 마주 앉았는데, 이상하게도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촛불이 흔들릴 때마다 서은은 낮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몇 번이나 몰래 선우진의 얼굴을 훔쳐보았고, 그 역시 평소보다 자주 서은 쪽을 힐끗거리는 것 같았다. 수프 그릇에 숟가락이 부딪히는 소리만이 유난히 크게 들렸다.
"공작님." 서은이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저, 그 정원에 있는 꽃들은…… 다 약초인가요."
"일부는." 선우진이 대답했다. "형이 좋아하던 꽃도 몇 개 있고."
"형님 얘기를…… 하셔도 되는 건가요." 서은이 조심스레 물었다.
선우진은 잠시 숟가락을 내려놓고 서은을 바라보았는데, 그 붉은 눈에 안개가 낀 숲처럼 복잡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촛불 그림자가 그의 얼굴 위로 짙게 어렸다.
"별로 하고 싶지 않은 얘기다." 그가 낮게 말했다. "하지만…… 네가 물어봐 주는 건 이상하게 괜찮군."
"그, 그러면…… 형님은 어떤 분이셨나요." 서은이 용기를 내어 물었다.
"조용한 사람이었다." 선우진의 목소리가 미묘하게 부드러워졌다. "나보다 훨씬…… 인간다웠지."
서은은 그 말에 가슴이 이상하게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정확히 무엇인지 명명할 수 없는 그 감정은, 마치 처음 맞아보는 봄바람처럼 낯설고도 따스했다. 그녀는 그 감정을 감추려 고개를 숙이고 수프를 떠먹었지만, 입가에 옅은 미소가 떠오르는 것은 감출 수 없었다.
"저는……" 서은이 다시 입을 열었다가,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스스로도 헷갈려 말을 멈췄다. "아, 아닙니다. 그냥, 정원이 참 예쁘다고 생각했어요."
선우진은 그 말을 듣고 잠시 침묵했다가,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도 걸어라. 아침 공기가 몸에 좋으니까."
그날 밤, 서은은 낮에 느꼈던 어깨의 온기를 떠올리며 오랫동안 잠들지 못했다. 창밖으로 보이는 정원의 이상한 꽃들이 어둠 속에서도 은은히 빛나고 있었고, 그 빛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낮에 있었던 일들이 하나씩 다시 떠올랐다.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 그의 손이 어깨를 붙잡던 순간, 그리고 저녁 식탁에서 잠시 부드러워졌던 그의 눈빛까지도.
이 남자가 무섭다고 생각했던 것이 언제였는지, 이제는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은 그 붉은 눈동자가 자신을 바라볼 때마다 이상하게 마음이 놓였고, 동시에 알 수 없는 초조함이 함께 밀려왔다. 서은은 이불을 끌어안으며 몇 번이나 뒤척였는데, 문득 창밖에서 낮게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가 마치 누군가의 발소리처럼 들려 화들짝 눈을 떴다. 그러나 창밖에는 아무도 없었고, 어둠 속에 정원만이 고요히 펼쳐져 있을 뿐이었다.
서은은 다시 눈을 감았지만, 좀처럼 잠은 오지 않았다. 그날 밤 저택의 어딘가에서, 선우진 역시 좀처럼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서은은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