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붉은 눈이 녹는 계절

5화

저택에서의 시간이 한 달을 넘어가면서 서은의 기침은 눈에 띄게 줄어들었고, 뺨에도 조금씩 생기가 돌아오기 시작했다. 아침마다 정원을 걸으면 이슬 맺힌 장미 덤불 사이로 햇살이 부서지듯 쏟아졌고, 그 길목에서 선우진과 마주치는 일이 자연스러운 일상이 되었다. 처음에는 서로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고 목례만 나누던 사이였는데, 이제는 몇 마디쯤 안부를 묻는 여유도 생겼다. 두 사람 사이의 어색함도 조금씩 옅어져 갔고, 서은은 그 변화가 좋으면서도, 동시에 그것이 너무 좋아서 불안했다. 행복이라는 것은 이렇게 조용히 스며들었다가, 한순간에 빠져나가 버리는 것이 아니었던가. 뒤채의 좁은 방에서 배웠던 유일한 교훈이 그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점심 식사를 마치고 서은이 응접실 옆방에서 자수를 놓고 있을 때였다. 저택의 문지기가 급히 뛰어와 선우진에게 무언가를 보고했는데, 그 발소리가 복도를 울릴 정도로 다급해서 서은은 자수틀을 내려놓고 문틈으로 상황을 살폈다. 문지기의 표정이 몹시 당황스러워 보였다. "청안 백작가에서…… 손님이 왔습니다." 서은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청안 백작가.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몸이 얼어붙는 듯한 감각이 되살아났다. 손끝이 차갑게 식어가고, 방금까지 쥐고 있던 바늘이 손에서 미끄러져 바닥에 떨어졌지만 그것을 주울 정신조차 없었다. "들여보내지 마라." 선우진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것이…… 서은 아가씨의 동생분이라 하시는데, 꼭 만나야 한다고 고집을 부리고 계십니다." 서은은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온몸의 피가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유나. 왜 유나가 이곳까지 왔을까. 그녀는 문틈 사이로 응접실 앞마당에 서 있는 낯익은 실루엣을 발견했고, 그것은 확실히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유나였다. 값비싼 레이스가 층층이 달린 드레스는 분명 서은이 뒤채에서 지낼 때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옷감이었는데, 그 사실이 오히려 서은의 속을 더 뒤틀리게 만들었다. 서은이 미처 숨을 곳을 찾기도 전에, 유나가 하인들을 밀치고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응접실을 지나 곧바로 서은이 숨어 있던 방향으로 걸어왔는데, 마치 서은이 어디 있는지 이미 알고 온 것처럼 정확하게 그 방문을 열었다. 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에 서은의 몸이 반사적으로 움츠러들었다. "언니, 여기 있었네." 유나가 활짝 웃으며 말했는데, 그 웃음에는 서은이 익히 알고 있는 악의가 그대로 담겨 있었다. 예전, 뒤채 앞에서도 저런 얼굴로 웃곤 했다. 언니 저녁밥은 없대, 하면서. "유나야, 여긴…… 왜." 서은의 목소리가 떨렸다. "어머니가 보내서 왔지." 유나가 방 안을 둘러보며 코웃음을 쳤다. 커튼과 가구를 하나하나 훑는 그 시선이 마치 값을 매기는 듯했다. "세상에, 이런 좋은 곳에서 살고 있었어? 언니가 죽을 줄 알았는데." "그런 말……" "왜, 사실이잖아." 유나가 말을 잘랐다. "언니 몸이 그렇게 약한데 이 먼 곳까지 시집왔으니 다들 반년도 못 버틸 거라 했었어. 근데 이렇게 뺨에 살까지 올라서 있으니, 참 신기하네." 서은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뒷걸음질 쳤다. 등이 벽에 닿는 순간, 유나가 성큼 다가와 서은의 손목을 낚아채듯 붙잡았는데, 그 힘이 예전에 계모가 서은을 붙잡던 것과 똑같이 아팠다. 마치 손목 안쪽에 그때의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어서 그 위를 다시 짓누르는 것 같았다. "어머니가 그러시더라, 언니가 여기서 예쁨받고 있으면 데려오라고." 유나의 눈빛이 서늘하게 바뀌었다. "공작이 언니한테 얼마나 잘해주는지 확인하고 오라고 하셨거든. 만약 정말 예쁨받고 있으면……" "놓아줘." 서은이 손목을 빼내려 했지만, 유나의 손아귀는 놀랍도록 강했다. "놓아줘? 언니가 나한테 명령해?" 유나가 비웃으며 손목을 더 세게 움켜쥐었다. "언니는 원래 우리 집에서도 아무 힘없는 존재였잖아. 여기 온다고 뭐가 달라졌을 것 같아?" 그 말이 서은의 가슴을 정확하게 찔렀다. 오랜 세월 쌓아온 무력감이, 잠시 잊고 있던 그 감정이 순식간에 되살아나며 서은의 다리를 후들거리게 만들었다. 그녀는 저항할 힘조차 없었다. 마치 뒤채의 좁은 방으로 다시 돌아간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창문 너머 정원의 장미도, 부드러운 침구도, 다정하게 안부를 묻던 선우진의 목소리도, 전부 한여름 낮의 꿈처럼 흩어져 버릴 것 같았다. "이거 뭐야." 유나가 서은의 소매를 걷어 올리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 안에는 오래된 흉터 몇 개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는데, 어린 시절 계모에게 맞은 흔적이었다. "아직도 이런 게 남아 있네. 아버지가 참 잘 키우셨어." 그 손가락이 흉터를 가볍게 훑고 지나갈 때, 서은은 숨이 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 오래전 매질을 당하던 그 순간의 냄새와 소리가 한꺼번에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눅눅한 뒤채의 공기, 회초리가 허공을 가르는 소리, 그리고 아무도 자신을 도와주지 않았던 그 침묵. "놓아……" 서은의 목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작아졌다. 눈앞이 흐려지고 숨이 가빠졌는데, 그것은 오래된 트라우마가 순식간에 되살아나며 만들어낸 발작 같은 증상이었다. 귓속에서 심장 박동 소리만 크게 울렸고, 손끝은 이미 감각이 없어질 정도로 차가웠다. 바로 그때, 방문이 벌컥 열렸다. "손 떼라." 낮고 서늘한 목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선우진이 문가에 서 있었는데, 그 붉은 눈이 그 어느 때보다 짙게 타오르고 있었다. 마치 방금 전까지 정원에서 서은에게 온화하게 웃어 보이던 사람과는 다른 사람 같았다. 유나는 순간적으로 겁을 먹은 듯 서은의 손목을 놓았지만, 곧 다시 뻔뻔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공작님, 저는 그냥 언니가 잘 지내는지 확인하러 온 것뿐인데……." "나가." 선우진의 목소리에는 단 한 톨의 자비도 섞여 있지 않았다. "지금 당장." "공작님도 참, 가족 간의 일에 이렇게까지 나서실 필요는……" "두 번 말하지 않는다." 그 짧은 말 한마디에 담긴 무게가 어찌나 서늘했는지, 유나의 얼굴빛이 살짝 변했다. 그녀는 입술을 삐죽이며 방을 나섰지만, 문턱을 넘기 전 서은을 향해 마지막으로 한 마디를 던졌다. "어머니가 곧 다시 사람을 보낼 거야, 언니. 여기서 편하게 지낼 생각은 하지 마." 그 말이 사라지고 방 안에는 무거운 정적만이 남았다. 유나의 발소리가 복도를 지나 저택 밖으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도, 서은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이내 그녀는 힘없이 무너져 내리듯 주저앉았는데, 온몸이 떨리고 있었고 숨은 여전히 가빠 있었다. 선우진이 다급하게 다가와 그녀 곁에 무릎을 꿇었다. "괜찮나." 그의 목소리에는 처음 듣는 종류의 다급함이 담겨 있었다. 그 큰 손이 서은의 손목을, 방금 유나가 움켜쥐었던 그 자리를 조심스럽게 감쌌는데, 그 온기가 조금 전의 통증을 서서히 지워가는 것 같았다. "숨을…… 천천히." 선우진이 낮게 말했다. "괜찮다. 여기, 이 저택 안에는 아무도 그대를 해칠 수 없다." 서은은 대답하지 못했다. 유나가 남긴 마지막 말이 귓속에서 계속 울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가 곧 다시 사람을 보낼 거야. 그 말은 이 짧은 평화가 얼마나 위태로운 것인지를, 서은에게 다시 한번 뼈저리게 각인시키고 있었다. 정원의 장미도, 아침마다 나누던 인사도, 이 모든 것이 언제 무너져 내릴지 모르는 살얼음 위에 세워진 것이었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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