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냉혈기사의 뜨거운 집착

3화

마차가 흙길로 접어들면서 덜컹거리는 진동이 뼈마디까지 전해지자, 서윤은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보며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바퀴가 돌부리를 넘을 때마다 몸이 통통 튀어 올랐지만, 그마저도 싫지 않았다. 궁에서라면 하녀 셋이 붙어 옷매무새를 살피고, 자세가 흐트러졌다고 잔소리를 들었을 텐데, 지금은 그냥 아무렇게나 무릎에 담요를 올리고 앉아 있어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전생의 습관이 남아 있던 그녀에게는 오히려 자연스러웠다. 창밖으로 늘어선 나무들 사이로 햇살이 조각조각 부서져 마차 안까지 얼룩무늬를 그려 넣었고, 서윤은 그 무늬가 손등 위를 스치는 걸 가만히 바라보았다. "오라버니, 여기서 다음 마을까지 얼마나 걸려요?" "글쎄다, 반나절쯤은……." 태현이 지도를 펼치며 말끝을 흐렸는데, 서윤은 그 모습에서 낯익은 어색함을 느꼈다. 그가 지도를 보는 방식이 지나치게 격식을 차린 나머지, 손끝을 살짝 떨며 종이를 만지는 것이 마치 처음 지도를 접한 사람 같았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지도를 이리저리 돌려보다가 방향을 헷갈려 하는 것 같아, 서윤은 웃음을 참느라 입술을 꾹 눌렀다. "오라버니, 그거 지금 위아래 반대로 보고 계신 거 아니에요?" "……아니다." "눈이 그렇게 흔들리는데 아니라고 하시면 곤란한데요." 태현은 대답 대신 애써 지도를 바로 돌렸는데, 그 어색한 손놀림이 오히려 더 수상해서 서윤은 결국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기사님이 지리를 이렇게 모르시면 곤란한데요." "성 밖으로 나올 일이 별로 없었다. 왕실 근위 임무는 대개 성 안에서 이루어지니까." 그의 대답에 서윤은 피식 웃음이 나왔다. 전생이었다면 지도 앱 하나로 해결될 일을, 이 세계에서는 종이 지도와 감으로 헤쳐 나가야 한다는 사실이 새삼스레 낯설게 느껴졌다. 손가락 하나로 목적지를 찍으면 파란 선이 길을 그려주던 세상과, 종이 위 잉크 자국을 뚫어지게 들여다보며 방향을 짐작해야 하는 세상. 두 세계 사이의 간극이 이렇게 우습게 느껴질 줄은 몰랐다. 그러다 문득, 자신이 방금 '전생이었다면'이라는 생각을 아무렇지 않게 떠올렸다는 것을 깨닫고 스스로도 놀랐다. 마치 어제 있었던 일처럼 자연스럽게, 별다른 이물감도 없이. ……적응이 빠른 것도 병인가. 서윤은 속으로 헛웃음을 지으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 멀리 논밭 사이로 소를 끄는 농부의 모습이 보였고, 그 평화로운 풍경이 이 세계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일깨워 주었다. * * * 마차가 잠시 정차한 여관 앞에서, 태현은 한선희를 향해 조용히 말을 건넸다. 여관 앞마당에는 짐을 부리는 마부들의 외침과 말발굽 소리가 소란스레 뒤섞여 있었지만, 태현의 목소리만은 그 소음을 뚫고 낮고 또렷하게 들렸다. "선희, 여기서 내려야겠다." "예? 갑자기 무슨……." 한선희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 손에 쥐고 있던 짐 보따리 끈을 꽉 움켜쥐는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도드라졌다. "네가 우리와 함께 있는 걸 궁 쪽에서 알면, 너도 반역에 연루된다. 여기서부터는 안전한 친척집으로 가는 게 좋겠어." "하지만 아가씨를 혼자 두고……." "혼자가 아니잖아, 오라버니가 계시니까." 서윤이 얼른 말을 덧붙였지만, 그 말이 한선희에게 얼마나 위로가 될지는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한선희는 입술을 깨물며 서윤을 바라보았고, 서윤도 그 마음을 모르지 않아 손을 꼭 잡아주었다. 손바닥이 맞닿는 순간, 두 사람 사이에 오간 무언의 말들이 있었다. 함께 넘었던 밤들, 몰래 나누어 먹었던 주먹밥, 도망치던 순간의 숨죽인 발소리 같은 것들이. "고생 많았어, 선희. 이건 예방이니까 서운해하지 마." "……아가씨. 조심하셔야 해요. 꼭이요." 한선희의 목소리가 끝내 갈라졌다. 눈시울이 붉어졌지만 그녀는 끝까지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 애썼고, 서윤은 그 안쓰러운 고집을 보며 저도 모르게 눈가가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렇게 한선희가 여관 앞에 남겨지고, 마차는 다시 출발했다. 한선희의 작아지는 뒷모습이 창밖으로 멀어질 때까지 서윤은 시선을 떼지 못했다. * * * 둘만 남은 마차 안에서, 바퀴 소리와 말발굽 소리만이 규칙적으로 이어졌다. 한동안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던 서윤이 문득 입을 열었다. "오라버니는 그동안 강소은 그 사람한테 어떻게 그렇게 넘어가셨어요? 오라버니답지 않게요." 태현의 얼굴에 잠시 그늘이 스쳤다. 지도를 접어 무릎 위에 내려놓는 손길이 평소보다 느렸다. "……나도 잘 모르겠다. 마치 안개 속을 걷는 것 같았어. 네가 걷어차이는 순간에야 안개가 걷혔지." 그 말을 하는 태현의 목소리가 낮게 잠겨 있었는데, 서윤은 그 안에 담긴 자책의 무게를 느끼고서 괜히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뭐라 위로의 말을 건네야 할지 몰라서, 그저 담요 끝자락을 만지작거리며 침묵을 채웠다. 강소은이라는 이름을 입 밖에 낼 때마다 태현의 눈빛이 흔들리는 것을, 서윤은 모르는 척했다. 저 멀리 지평선 너머로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고, 두 사람의 그림자가 마차 바닥에 길게 늘어졌다. 붉은 빛이 창문을 타고 들어와 태현의 옆얼굴을 물들였는데, 그 표정이 어찌나 쓸쓸했던지 서윤은 차마 더 캐묻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때, 저 멀리 흙길 뒤편에서 말발굽 소리가 아주 희미하게 울려왔다. 처음에는 그저 지나가는 여행자인가 싶었지만, 소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고 서윤의 등줄기를 타고 서늘한 것이 스쳐 내려갔다. "오라버니, 저 소리……." 태현의 눈빛이 순식간에 날카로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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