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다은이 그 목소리를 처음 들은 건 다섯 살 때였다.
정확히 어디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어둡고 차가운 방이었던 것 같기도 했고, 어쩌면 바깥이었을 수도 있었다. 다은의 기억은 그 시절 전체가 흐릿한 안개에 잠겨 있었다. 가끔 그 안개 속에서 희미한 형체가 어른거리기도 했지만, 손을 뻗으면 금세 흩어져 버렸다.
다만 목소리만은 또렷했다. 낮고 부드러웠고, 조금 슬픈 듯도 했다. '괜찮아. 다 잘될 거야.' 그렇게 말했던 것 같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런 말을 남겼다. '언젠가 힘들어지면, 성당을 찾아가.'
누구의 목소리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은은 그 목소리가 자신을 낳은 사람의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근거는 없었다. 그냥 그렇게 믿고 싶었을 뿐이었다. 밤마다 그 목소리를 되새기다 보면, 어느새 잠이 들곤 했다. 그것이 다은이 가진 유일한 자장가였다.
***
유정호의 집에 오기 전, 다은의 기억은 그 목소리 하나뿐이었다. 나머지는 전부 잘려 나간 필름 같았다.
어떤 어른이 다은을 데려다 놓았는지, 왜 유정호가 다은을 받아들였는지도 몰랐다. 다은은 그저 어느 날 갑자기 이 집 대문 앞에 서 있었고, 그날부터 '그거'라는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이름조차 제대로 불러 주지 않는 집이었다. 강미란은 다은을 볼 때마다 눈살을 찌푸리며 "그거 또 여기 있네"라고 중얼거렸고, 유정호는 아예 다은을 없는 사람처럼 대했다. 밥그릇 하나가 늘 부족했고, 이불 한 채가 늘 남았다.
'왜 나를 버린 거야.' 다은은 가끔 그렇게 생각했다. 답은 늘 없었다. 대신 창고 벽에 스며든 곰팡이 냄새와, 겨울이면 손끝이 얼어붙는 감각만이 확실한 대답처럼 남았다.
***
그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떠올린 건, 강수아가 다은의 신발을 불에 태운 날이었다.
시작은 사소했다. 강수아가 마당에서 신발을 찾다가 짝이 안 맞는다며 짜증을 냈고, 그 화풀이가 고스란히 다은에게 돌아왔다. "네가 숨겼지." 강수아는 확신에 찬 표정으로 말했지만, 사실 신발은 애초에 강수아 자신이 어딘가에 벗어 둔 것이었다.
증거 따위는 필요 없었다. 강수아에게 필요한 건 이유가 아니라 핑계였으니까. 강수아는 다은의 낡은 운동화 한 짝을 마당 한가운데로 던지고는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고무 타는 냄새가 매캐하게 퍼졌다.
신발이 없으면 학교도, 심부름도 갈 수 없었다. 다은은 맨발로 마당에 서서 재가 된 신발 조각을 바라봤다. 발밑의 흙이 차가웠지만, 그보다 더 차가운 건 강수아의 눈빛이었다. 강수아는 창문 너머로 그 모습을 구경하며 웃고 있었다. 그야말로 별명이 아깝지 않은 성격이었다.
다은은 그날 밤, 창고에 누워 다시 그 목소리를 떠올렸다. '성당을 찾아가.' 그 말이 처음으로 명령처럼 들렸다. 지금까지는 위로에 가까운 속삭임이었는데, 이제는 절박한 지시처럼 느껴졌다.
'이 집에 있어 봤자 나는 죽을 거야.' 다은은 이제 그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다. 밥을 굶기는 날이 늘어나고 있었고, 매를 맞는 부위가 점점 더 위험한 곳으로 옮겨 가고 있었다. 처음에는 팔이나 다리였던 것이, 이제는 등과 머리로 향하고 있었다. 다은은 자신의 몸이 하루가 다르게 마르고 약해지는 것을 스스로도 느낄 수 있었다. 갈비뼈가 만져질 정도로 앙상해진 몸을 볼 때마다, 다은은 이상하게도 두려움보다 오히려 냉정한 확신이 들었다.
***
다은은 처음으로 이 집을 떠날 계획을 세웠다.
계획이라고 해봤자 별것 없었다. 유정호와 강미란이 잠든 새벽, 창고 문을 열고 도망치는 것. 그리고 성당을 찾는 것. 성당이 어디 있는지도 몰랐지만, 다은은 무작정 걷다 보면 언젠가 나올 거라고 믿기로 했다.
며칠 동안 다은은 창고 틈으로 마당을 살폈다. 개가 있는지, 문단속이 얼마나 허술한지, 강수아의 방 불이 언제 꺼지는지. 사소한 정보들이었지만, 다은에게는 목숨과 직결된 정보였다. 다행히 이 집의 담은 낮은 편이었고, 개는 없었다.
'죽어도 여기서 죽는 것보단 나아.' 다은은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였다. 심장이 쿵쿵 뛰었지만, 그 두근거림이 두려움 때문인지 기대 때문인지는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그날 밤, 다은은 담요 밑에 숨겨 둔 마른 빵 한 조각을 품에 넣었다. 강수아가 남긴 걸 몰래 주워 둔 거였다. 곰팡이가 살짝 핀 부분을 손톱으로 긁어내고, 나머지를 낡은 손수건에 싸 두었다. 그것이 다은이 가진 전부였다. 돈도 없었고, 여벌의 옷도 없었다. 신발조차 없었다. 발바닥이 다칠 걸 알면서도, 다은에게는 다른 선택이 없었다.
***
새벽이 되자 다은은 창고 문을 아주 조심스럽게 밀었다. 문은 낡아서 삐걱거렸지만, 다행히 아무도 깨지 않았다.
숨을 죽이고 문틈으로 몸을 빼내는 동안, 다은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차가운 밤공기가 맨발에 닿았다. 발가락이 저릿했지만, 멈춰 설 이유는 되지 못했다.
다은은 마당을 가로질러 담을 넘었다. 몸이 가벼워서 다행이었다. 원래도 왜소했던 몸이 최근 몇 달 새 더 말라 있었으니까. 담 위에 몸을 걸치고 아래를 내려다보는 순간, 잠깐 아찔했지만 곧 뛰어내렸다. 무릎이 흙바닥에 부딪히며 얼얼했지만, 소리는 크지 않았다.
담을 넘은 뒤, 다은은 뒤를 한 번 돌아봤다. 불 꺼진 집이 어둠 속에 조용히 서 있었다. 저 안에 자신을 '그거'라 부르던 사람들이 여전히 잠들어 있을 거라는 생각에, 이상하게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다시는 안 돌아올 거야.' 다은은 그렇게 다짐하며 걷기 시작했다. 발밑에서 자갈이 부서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그 소리가 날 때마다 다은은 어깨를 움츠리며 걸음을 멈췄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걸 확인한 뒤에야 다시 발을 옮겼다.
그리고 그 소리가, 다은이 그 집에서 낼 수 있었던 마지막 소리였다.
멀리서 개 우는 소리가 들렸다. 다은은 그 소리가 이 동네의 것인지, 다른 동네의 것인지도 알지 못한 채, 그저 발이 이끄는 대로 어둠 속을 걸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