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거울에 갇힌 후궁

1화

입궁한 지 반년이 지났는데도 이헌은 내 이름을 제대로 불러 준 적이 없었다. "후궁." 그것이 전부였다. 나는 백작가의 딸로 태어나 열여덟 살에 대현국의 첫 번째 후궁이 되었다. 세어스 백작가와 왕가 사이의 오래된 약속,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내가 궁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이 궁 안에 없었다. 그런데도 아무도 나를 왕비 후보로 대하지 않았다. 냉대였다. 처음엔 그저 낯설어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 왕이 원래 그런 성격이라고. 사무적이고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라고. 그렇다면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 것이라 여겼다. 그런데 반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여전히 그의 침소 문턱을 넘어 본 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애초에 나를 들일 필요가 없었을 텐데.'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면 나는 늘 그 생각을 스스로 비웃었다. 필요했으니까 들인 거겠지. 애정이 아니라 정치적 필요. 그게 전부였다. 침소 문턱은 그렇다 치고, 나는 이헌의 얼굴조차 자주 보지 못했다. 한 달에 한두 번, 형식적인 문안 인사 자리에서나 마주쳤을 뿐이었다. 그마저도 그는 눈을 마주치는 법이 없었다. 시선은 언제나 내 어깨 너머 어딘가, 혹은 손에 든 서류로 향해 있었다. "편히 지내는가." "예, 폐하." "그럼 되었다." 대화라고 부르기도 애매한 몇 마디가 오가고 나면 그는 자리를 떴다. 나는 그런 그의 뒷모습을 볼 때마다 궁금했다. 저 사람은 대체 나를 어떤 존재로 인식하고 있는 걸까. 가구처럼, 혹은 서류상의 숫자처럼 여기는 건 아닐까. '궁금해할 필요도 없는 일이지.' 오늘 아침에도 나는 상궁이 가져온 편지 상자를 열어 보았다. 백작가에서 보낸 서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상자는 비어 있었다. "백작가에서는 아무 연락이 없었나?" 내 물음에 상궁은 눈을 내리깔며 대답했다. "예, 마님. 이번 달에도 서신이 오지 않았습니다." 두 달째였다. 나는 상자를 도로 덮었다. 마른침을 삼켰다. 별로 놀랍지 않았다는 게 오히려 이상했다. 상궁은 내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혹 아버님께 서신을 먼저 보내시는 건 어떠실는지요." "됐다." "마님……" "보내 봐도 답이 없을 텐데, 굳이 종이를 낭비할 이유가 있나." 상궁은 더 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그 침묵이 오히려 편했다. 내 아버지, 세어스 백작은 나를 정략의 도구로만 여겼다. 어릴 때부터 그랬다. 정우진과의 혼담이 오갈 때도, 파혼이 결정될 때도, 아버지는 나에게 그 어떤 위로도 건네지 않았다. "가문에 필요한 결정이었다"는 말 한마디로 모든 걸 정리했을 뿐이다. 정우진은 내 원래 약혼자였다. 혼인식을 보름 앞두고 그가 어느 자작령애와 정을 나누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날 아버지가 한 말은 지금도 기억한다. "파혼이라니, 가문의 체면이 뭐가 되겠느냐." 내 상처에 대한 말은 한마디도 없었다. 그 후로 나는 아버지 앞에서 눈물을 보이지 않기로 했다. 눈물을 보여도 돌아오는 건 위로가 아니라 잔소리였으니까. 그러니 지금 이 냉대도, 아버지에게는 그저 또 하나의 '가문에 필요한 상황'일 뿐인 것이다. 후궁의 자리를 지키든 잃든, 백작가에는 큰 손해가 없을 테니까. 오히려 딸이 궁에서 조용히 지내는 편이 백작가로서는 골치 아플 일이 없을지도 몰랐다. '차라리 편하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기대가 없으면 실망도 없다. 궁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것. 그날 오후, 나는 정원을 걷다가 시녀 둘이 소곤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나뭇가지 사이로 겨울 햇살이 성기게 내려앉고 있었고, 그들은 내가 가까이 있는 줄도 모르는 눈치였다. "들었어? 남작가 영애가 폐하의 눈에 들었다던데." "진짜? 어느 남작가?" "유씨 가문이라나. 은발이 그렇게 예쁘다더라고. 지난번 연회 때 폐하께서 먼저 말을 거셨다지 뭐야." "어머, 그럼 이번엔 진짜인가 보네. 후궁 마님은 반년 동안 얼굴 한 번 뵌 적도 없다던데." "쉿, 목소리 낮춰. 누가 듣겠어." 나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다만 속으로 되물었을 뿐이다.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지.' 그 순간엔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다. 상관없다고. 유씨 가문의 영애가 은발이든 금발이든, 이헌이 누구에게 말을 걸든, 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일이라고. 나는 그저 이 자리를 지키는 것으로 백작가와의 약속을 이행하고 있을 뿐이었다. 애정도, 총애도, 애초에 내 몫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날 밤, 나는 이상하게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이 가슴 한쪽에 눌어붙어 있었다. 이불을 몇 번이나 고쳐 덮었는지 모른다. 창밖에서 바람이 창호지를 흔드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설마 내가 그 자리를 신경 쓰는 건가.' 아니다. 신경 쓸 이유가 없었다. 나는 애초에 왕의 총애를 바란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잠들지 못하는 이 밤이 스스로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결국 나는 새벽이 가까워질 때까지 뒤척이다 겨우 눈을 감았다. 다음 날 아침, 상궁이 다급한 얼굴로 내 방문을 두드렸다. 문을 여는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마님, 폐하께서 새로운 후궁을 책봉하신다는 어명이 내려왔습니다." 나는 붓을 내려놓았다. 손끝이 먹물로 살짝 얼룩졌지만 닦아 낼 정신도 없었다. "언제라던가." "사흘 뒤라고 합니다." "그 후궁이 누구인지는?" 상궁은 잠시 말을 고르는 듯 머뭇거렸다. "유씨 남작가의 영애라 하옵니다." 역시. 예상했던 대로였다. 그런데도 왜 가슴이 이렇게 서늘한지 알 수 없었다. "마님, 괜찮으십니까?" "괜찮아." 건조하게 대답했지만 상궁의 얼굴에는 여전히 걱정이 가득했다. 나는 그 시선을 피해 창가로 걸어갔다. 사흘. 나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겨울바람이 마른 나뭇가지를 흔들고 있었다. 저 나뭇가지처럼 나도 곧 흔들리게 될까. 어쩐지 이 궁의 공기가 그 사흘 동안 완전히 달라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그 예감은, 틀리지 않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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