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거울에 갇힌 후궁

5화

왕비 조은채가 나를 부른 건 유하은의 책봉식이 있은 지 열흘째 되던 날이었다. 전각으로 걸음을 옮기는 내내, 상궁은 아무 설명도 해주지 않았다. 그저 왕비마님께서 찾으신다는 말뿐이었다. 나는 걸으면서 몇 가지 가능성을 짚어보았다. '책봉식 이후로 처음 부르시는 거다. 축하를 하자고 부르실 리는 없고, 견제를 하시려는 걸까.' 지금까지 왕비는 늘 일정한 거리를 두고 나를 대했다. 살가운 적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노골적으로 적대적인 적도 없었다. 딱 필요한 만큼의 예의와 딱 필요한 만큼의 냉기. 그게 왕비 조은채와 나 사이의 규칙이었다. 전각에 들어서니 왕비는 창가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자세는 평소와 다름없이 곧았다. 나는 예를 갖춰 인사를 올렸다. "강 후궁, 요즘 폐하와의 사이는 어떠한가." 왕비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차분했지만, 오늘은 뭔가 다른 결이 섞여 있었다. 마치 답을 이미 알면서도 확인하려는 듯한, 묘하게 신중한 어조였다. 나는 잠시 찻잔의 물결을 눈으로 좇으며 대답을 골랐다. "별다른 변화는 없습니다, 왕비마님." "변화가 없다는 게,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다는 뜻인가?" 나는 잠시 말을 멈췄다. 왕비가 이렇게 직접적으로 물어본 적은 없었다. 지금까지는 늘 거리를 두고 나를 견제하는 태도였는데, 오늘은 분명히 달랐다. 질문 하나하나가 마치 어딘가를 향해 걸어가는 발걸음처럼 목적이 분명했다. '무엇을 확인하고 싶으신 걸까.' 솔직하게 말할지, 적당히 둘러댈지 잠깐 고민했다. 하지만 이런 자리에서 괜한 거짓을 붙였다가 나중에 말이 어긋나면 더 곤란해질 것이었다. 실속을 따지자면 솔직한 게 나았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렇습니다." 왕비의 눈빛이 흔들렸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나는 분명히 보았다. 그 흔들림은 놀람도 아니었고 안도도 아니었다. 뭔가를 다시 계산하는 눈빛이었다. 나는 그 순간, 그녀가 내 대답을 통해 무언가를 확인하려 했다는 걸 깨달았다. "폐하께서 후궁궁 어느 쪽에도 발걸음을 하지 않으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게 사실인가." "예." 짧게 대답하고 나서, 나는 왕비의 표정을 살폈다. 이런 질문을 던지는 왕비의 속내가 궁금했다. 후궁들의 사생활을 캐묻는 건 왕비의 흔한 일이었지만, 오늘의 질문은 결이 달랐다. 마치 어떤 결론을 향해 가는 중간 다리처럼 느껴졌다. 왕비는 잠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정원의 나뭇가지가 바람에 흔들리는 걸 한참 바라보던 그녀가, 그러다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그동안 폐하께서 그대를 특별히 아끼시는 줄 알았다. 그래서 견제한 것이었고."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이건 예상치 못한 방향의 대화였다. '견제라니. 그럼 지금까지 나를 향한 그 냉랭함이, 실은 오해에서 나온 것이었단 말인가.' 머릿속이 순간 복잡해졌다. 그동안 왕비를 마주할 때마다 느꼈던 그 미묘한 경계심이 전부 헛짚은 짐작에서 나온 것이었다는 사실이 어이없기도 하고, 동시에 조금은 억울하기도 했다. "오해가 있으셨던 것 같습니다." "오해라기보다는…" 왕비가 말을 고르는 듯 잠시 멈췄다. 손끝으로 찻잔의 손잡이를 가만히 매만지며. "확인이 늦었다고 해야겠지." 왕비는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는 이전의 냉랭함 대신 어떤 계산이 담겨 있었다. 마치 주판알을 튕기듯, 이 새로운 사실이 앞으로 궁 안의 판도에 어떤 영향을 줄지 이미 가늠하고 있는 눈빛이었다. "폐하의 냉대가 그대에게만 향한 게 아니라면, 이건 단순한 후궁들 사이의 문제가 아닐세." 나는 그 말의 무게를 곱씹었다. 후궁들 사이의 문제가 아니라면, 그렇다면 무엇의 문제인가. 왕의 정무? 건강? 아니면 다른 무언가. 왕비의 시선이 나를 지나 창밖 어딘가로 향했다. "유 후궁이 폐하의 총애를 받는 지금, 상황이 달라졌다. 그대에게도 물어야 할 것이 생겼네."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나는 저도 모르게 몸을 살짝 앞으로 기울였다. 왕비가 이렇게까지 말을 꺼냈다면, 뒤에 이어질 내용이 결코 가벼운 게 아닐 터였다. 왕비는 잠깐 침묵했다가 짧게 대답했다. "곧 알게 될 것이다." 그 말을 끝으로 왕비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나는 뭔가 더 물으려 했지만, 그녀는 이미 몸을 돌린 뒤였다. 등을 돌린 왕비의 뒷모습은 더 이상 어떤 질문도 받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하고 있었다. 방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왕비의 마지막 말을 계속 곱씹었다. 걸음을 옮기는 내내 발밑의 돌길이 유난히 딱딱하게 느껴졌다. '곧 알게 될 것이라니.'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왕비가 이헌의 냉대가 나에게만 국한된 게 아니라는 걸 확인했다면, 다음 단계는 분명했다. 유하은에게도 같은 확인을 하려 들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에 따라 이 궁의 균형은 완전히 달라질 터였다. '지금까지의 냉대가 특정한 한 사람을 향한 게 아니라면, 왕비는 이걸 어떻게 이용하려는 걸까.' 머릿속으로 몇 가지 그림을 그려보았다. 왕비가 왕의 무관심을 빌미로 후궁들을 압박할 수도 있었고, 반대로 이 상황을 왕의 어떤 다른 이유─정무의 과중함이든, 건강의 문제든─와 연결지어 조정 전체의 긴장으로 확대할 수도 있었다. 어느 쪽이든, 나로서는 손을 대기 힘든 영역이었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옷도 갈아입지 못한 채 의자에 앉았다. 오늘 나눈 대화의 조각들을 다시 순서대로 배열해보았다. 왕비의 질문, 흔들리던 눈빛, 그리고 마지막의 그 짧은 대답까지. '견제가 오해였다는 걸 인정하면서도, 왕비는 조금도 편안해 보이지 않았다. 그럼 이건 단순히 나를 향한 견제가 풀렸다는 문제가 아니라, 왕비 본인에게도 더 큰 계산이 걸린 일이라는 뜻이겠지.' 생각이 거기까지 미쳤을 때, 밖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평소보다 급한 걸음이었다. 그날 저녁, 상궁이 다급한 얼굴로 내 방에 들어왔다. "마님, 큰일 났습니다. 유 후궁 처소 쪽에서 소란이 있었다고 합니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방금 정리해두었던 생각들이 순식간에 흩어졌다. "무슨 소란인가." 상궁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유 후궁께서 갑자기 정신을 잃으셨다고 합니다. 지금 의원이 급히 불려 갔는데…" 나는 말을 잃었다. 유하은이 정신을 잃었다는 소식은, 그저 우연한 병환처럼 들리지 않았다. 이 궁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었으니까. '왕비가 확인을 마쳤다는 것과, 이 일이 무관할까.' 시간을 따져보았다. 오늘 낮에 왕비를 만났고, 저녁이 되기도 전에 유하은이 쓰러졌다. 너무 딱 맞아떨어지는 순서였다. 우연이라 하기엔 너무 빨랐고, 계획된 것이라 하기엔 너무 조용했다. 나는 서둘러 옷을 챙기며 상궁에게 말했다. "자세히 알아봐. 지금 당장." 상궁이 황급히 몸을 돌려 나가고, 나는 잠시 그 자리에 서서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하지만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창밖으로 궁녀들이 다급하게 뛰어다니는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이 궁의 조용한 균형이 이제 막 깨지려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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