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자선 행사장은 화려했다.
정원 곳곳에 놓인 촛대가 은은한 빛을 흘렸고, 하얀 천막 아래로 남작 부인들이 삼삼오오 모여 웃음을 나누고 있었다. 값비싼 드레스 자락이 스칠 때마다 향수 냄새가 뒤섞여 코끝을 찔렀다.
나는 그 사이에서 아버지, 한도현 남작 옆에 조용히 서 있었다.
"오늘 행사에 참석한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아버지가 낮게 말했다. 나는 대답 없이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사실 이런 자리가 익숙하지 않았다. 부인들의 대화는 대부분 누구 집 딸이 어느 가문에 시집갔는지, 누가 후궁의 눈에 들었는지 하는 것들이었고, 나는 그 화제들 속에서 딱히 낄 자리가 없었다.
'그냥 조용히 있다가 돌아가면 되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다과가 놓인 테이블 쪽으로 시선을 옮기던 참이었다.
"저기 오시는군."
아버지의 시선을 따라간 곳에 은발의 여인이 서 있었다.
숨이 턱 막혔다.
두 번째 후궁, 유하은이었다. 은빛 머리카락과 백옥 같은 피부, 인형처럼 정갈한 얼굴. 소문대로였다. 남작가의 딸이 어쩌다 후궁이 되었는지, 사교계에서는 벌써부터 온갖 추측이 떠돌고 있었다. 어떤 이는 폐하의 눈에 들었다 했고, 어떤 이는 뒷배가 있어 억지로 밀어넣어진 거라 했다. 진위는 알 수 없었지만, 확실한 건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저 여자였다.
그런데 문제는 외모가 아니었다.
그녀를 보는 순간, 머릿속에서 어떤 감각이 폭발했다. '아는 사람이다.' 아니, 정확히는 이런 느낌이었다. 저 사람과 내가 어딘가 이어져 있다는 확신.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거지.'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람을 우연히 다시 마주친 듯한 감각이 뇌리를 스쳤다. 심장이 이상하게 빨리 뛰었다. 이런 감각이 처음이 아니었다는 것도 문제였다. 나는 강서윤이라는 이름을 노트에 적어 내려가던 그날부터, 이런 식의 낯선 기시감을 몇 번인가 겪었다.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유하은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어색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남작가 출신이라 궁의 예법에 아직 서툰 듯, 부인들의 질문에 더듬더듬 대답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손에 든 찻잔을 쥔 손끝이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저, 그, 그러니까… 궁의 규율이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요…"
한 부인이 짜증스러운 얼굴로 되물었다.
"후궁 마님, 그 정도 예법은 기본이 아닙니까?"
옆에 있던 다른 부인이 부채로 입가를 가리며 소곤거렸다.
"남작가 출신이 후궁이라니, 궁의 격이 떨어졌다는 소리가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요."
들으라는 듯한 목소리였다. 유하은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녀가 손에 든 찻잔이 가늘게 떨렸다. 곧 넘칠 것 같았다.
나는 저도 모르게 다가갔다.
'왜 몸이 먼저 움직이는 거지.'
머릿속으로는 상황을 정리할 틈도 없었다. 발이 먼저 그녀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실례합니다. 후궁 마님께 잠시 시간을 여쭐 수 있을까요?"
부인들의 시선이 일제히 나에게 쏠렸다. 누군가는 눈살을 찌푸렸고, 누군가는 흥미롭다는 듯 눈을 반짝였다. 아버지가 살짝 당황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도 느껴졌지만, 나는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나는 태연하게 유하은의 팔을 부드럽게 잡아끌었다.
"이쪽으로 오시죠. 다과가 준비된 자리로 안내해 드릴게요."
유하은은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순간 그녀의 눈동자에 스친 감정이 안도인지 당혹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나는 그녀를 데리고 조용한 정자 쪽으로 걸었다. 부인들의 시선이 등 뒤에 따갑게 꽂혔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정자에 도착하자, 나는 손수건을 꺼내 그녀의 손에 쥐여 주었다.
"찻잔이 뜨거웠나 봐요. 손이 데인 것 같은데."
"아, 아니에요. 그냥… 긴장해서…"
유하은이 고개를 숙였다. 은빛 머리카락이 흘러내려 그녀의 얼굴을 가렸다. 어깨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별다른 의도 없이 그저 이 낯선 사람을 도와주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손수건을 건네는 순간,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고마워요. 이렇게 친절하게 대해 주신 분은 처음이라…"
나는 어색하게 대답했다.
"별거 아니에요."
정말 별거 아니었다. 손수건 한 장 건네는 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그런데 유하은은 마치 큰 은혜라도 받은 사람처럼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손수건으로 눈가를 조심스럽게 눌렀다. 눈물이 그친 자리에는 여전히 붉은 자국이 남았다. 나는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문득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슬퍼하는 얼굴인데도, 어딘가 낯익은 표정이었다.
그런데 유하은이 나를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저기, 혹시… 저를 아세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아니요. 오늘 처음 뵙는데요."
"그런데 왜… 낯설지가 않죠."
그 말에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나 역시 같은 감각을 느끼고 있었으니까. 처음 그녀를 본 순간부터 지금까지, 이 이상한 확신은 사라지지 않았다.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이 사람도 나와 같은 걸 느끼고 있는 건가.'
바람이 정자 사이를 스치며 은발을 흩날렸다. 유하은의 눈동자는 여전히 나를 향해 있었다. 그 시선이 왠지 낯설지 않아서, 나는 괜히 손끝을 매만졌다.
'혹시 전생이라거나… 아니, 그런 건 소설에나 나오는 이야기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스스로 그 가능성을 완전히 지워내지 못했다. 노트에 적어 내려간 이름들, 그리고 알 수 없는 확신들. 이 모든 것이 우연이라고 하기엔 겹치는 부분이 너무 많았다.
그 순간 정자 밖에서 시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후궁 마님, 이제 시간이 되었습니다."
유하은은 아쉬운 얼굴로 몸을 돌렸다. 손에 쥔 손수건을 꼭 움켜쥔 채였다.
"다음에… 또 뵐 수 있을까요?"
나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시녀를 따라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이 만남이 결코 우연으로 끝나지 않을 것 같다는 예감에 사로잡혔다. 손수건을 건넨 그 작은 행동이, 언젠가 나 자신을 지켜 줄 실마리가 될 것 같은 이상한 확신이었다.
행사장으로 돌아오자 아버지가 조용히 물었다.
"저 아이와 무슨 일이 있었느냐?"
"아니요, 그냥… 도와드린 것뿐이에요."
아버지는 더 캐묻지 않았지만, 걱정스러운 눈빛만은 감추지 못했다. 나는 그 시선을 못 본 척, 다시 부인들 사이로 걸음을 옮겼다.
집으로 돌아오는 마차 안에서 나는 다시 노트를 펼쳐 강서윤이라는 이름 아래 새로운 문장을 적었다.
'유하은. 나와 같은 기시감을 느낀다.'
펜 끝이 종이 위에서 멈췄다. 창밖으로 어두워진 거리의 불빛이 스쳐 지나갔다.
'이게 대체 무슨 의미지.'
답을 알 수 없었다. 다만 확실한 건, 이 낯선 확신이 앞으로도 계속 나를 따라다닐 거라는 예감뿐이었다. 나는 노트를 덮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마차 바퀴가 돌길에 부딪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