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폐적영애의 해방

4화

왕도의 귀족 사회에서 마법은 곧 신분이었으며, 그 위계는 오랜 세월 굳어져 누구도 함부로 흔들 수 없는 질서로 자리잡고 있었다. 불과 바람, 얼음을 다루는 원소 마법은 전장의 역사와 함께 귀족 가문의 정통성을 상징해왔고, 그 반대편에는 실이나 흙, 물살 같은 일상적 소재를 다루는 마법들이 있었는데, 이것들은 흔히 평민이나 하급 마법사들의 생계 수단으로 취급되었다. 왕도의 사교계에서 오가는 뒷말들 중에는 실 마법을 두고 "빨래터 마법"이라 부르며 비웃는 자들도 있었고, 흙 마법을 쓰는 이는 농노의 핏줄이 섞였을 것이라 넘겨짚는 자들도 있었으니, 그 경멸의 뿌리는 생각보다 오래되고 깊었다. 이가의 초대 가주가 불 마법으로 왕실의 눈에 들어 백작위를 받은 이래, 그 핏줄에게 실 마법이 나타난다는 것은 집안의 수치로 여겨져 왔으며, 이서리가 태어난 순간부터 그녀에게 씌워진 낙인은 바로 그것이었다. 명문가의 핏줄이되, 그 핏줄답지 못한 재주를 지닌 자. 그런 낙인이 어떻게 굳어졌는지를 짐작하게 하는 것은, 그녀가 짐을 다 정리하고 아버지의 부름을 받아 서재로 향하던 그 저녁의 대면이었다. 뒤채에서 본채로 이어지는 복도는 유난히 길었는데, 그 복도를 걸을 때마다 이서리는 자신이 이 집에서 손님보다도 못한 존재였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하곤 했다. 벽에 걸린 초대 가주의 초상화가 붉은 화염을 배경으로 근엄하게 서 있었고, 그 아래를 지날 때마다 이서리는 묘한 이질감을 느꼈다. 자신의 손끝에서는 결코 저런 불꽃이 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사실이 다시금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서재는 늘 그렇듯 짙은 담배 연기로 가득 차 있었는데, 문을 열자마자 그 냄새가 코를 찔러 이서리는 잠시 숨을 골라야 했다. 이정헌 백작은 손님을 맞이하듯 지나치게 예의를 차린 말투로 딸을 맞았다. "오, 이서리 왔구나. 앉아라, 앉아." 그 과한 격식이 오히려 위선적으로 느껴졌으나, 이서리는 묵묵히 자리에 앉았다. 아버지의 책상 위에는 여전히 손도 대지 않은 서류들이 쌓여 있었고, 그 옆에는 값비싼 술병이 반쯤 비어 있었는데, 그런 풍경은 이서리가 기억하는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떠나기 전에 아버지로서 몇 마디 해주고 싶어서 불렀다." 그가 말을 이었다. "세상이 각박하다는 건 너도 잘 알지 않느냐. 신분을 잃었다고 해서 자포자기하지 말고, 부지런히 살아라." 그 말에는 어떤 진심도 담겨 있지 않다는 것을, 이서리는 이미 알고 있었다. 이십여 년을 함께 살았어도 아버지라는 사람에게서 딸을 향한 걱정 어린 눈빛을 받아본 적이 없었으니, 지금 이 순간의 자애로운 말투 또한 그저 형식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아버지, 그 신분을 잃게 만든 근거가 무엇인지 아직 답을 듣지 못했습니다." 그녀가 정면으로 물었다. 그 순간 이정헌의 표정에서 잠시 예의의 가면이 벗겨지는 것을 이서리는 놓치지 않았는데, 그것은 짜증도 아니고 분노도 아닌, 성가심에 가까운 냉대였다. "근거는 이미 서기관이 발표했다." 그가 짧게 답하며 손끝으로 탁자를 두드렸는데, 그 손끝에서 미약한 불씨가 튀어 오르는 것을 이서리는 보았다. 아버지의 원래 재능, 그가 젊은 시절 왕실 근위대에서 이름을 날리게 했던 불 마법이었다. 지금은 그 불씨조차 향락과 나태 속에서 흐릿해져 있었지만, 그 잔재만으로도 이서리는 왜 이 집안이 그토록 자신의 실 마법을 경멸했는지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서기관의 발표라는 것이 대체 무엇을 근거로 삼은 겁니까." 이서리가 다시 물었다. "누가 무엇을 봤고, 무엇을 증언했다는 겁니까." 이정헌은 담배를 한 대 새로 물며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그런 세세한 것까지 내가 알 필요가 있느냐. 결과가 이미 나왔으면 됐지." "결과라는 게 제 인생을 통째로 뒤엎는 일인데, 그 근거조차 모른 채 받아들이라는 겁니까." 이서리의 목소리가 조금씩 낮게 떨렸는데, 그것은 분노보다는 오래 쌓여온 억울함이 새어 나오는 소리에 가까웠다. "소문만으로는 신분을 박탈할 수 없다는 걸 아버지도 아실 텐데요." 이서리가 물러서지 않고 말하자, 이정헌은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시선을 피했다. "서리야, 세상 일이 다 근거만으로 돌아가는 건 아니다. 가문의 체면이라는 게 있어." 그 말에서 이서리는 아버지가 애초에 진실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체면. 그 한 단어가 지난 이십여 년, 어머니와 자신을 뒤채에 가두어둔 이유의 전부였다는 사실이, 새삼 목구멍을 조여왔다. 어머니가 병으로 앓아누웠을 때도, 이 집안은 의사를 부르는 대신 소문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입단속을 시키는 데 더 급했었다. 그때도 이정헌은 지금과 같은 말투로 "체면"을 말했었고, 그 기억이 스치자 이서리는 저도 모르게 손끝이 차가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럼 이걸로 끝인가요." 이서리가 낮게 물었다. "제가 이 집안에서 태어나 자란 이십삼 년이, 그저 이런 식으로 마무리되는 겁니까." "끝이라기보다는, 새로운 시작이라고 생각해라." 이정헌이 지나치게 자애로운 어조로 답했으나, 그 말투의 부자연스러움이 오히려 그의 무심함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네게도 나름의 재주가 있을 테니, 어디 가서든 밥벌이는 하겠지." 그 말을 끝으로 그는 다시 서류로 시선을 돌렸는데, 그 태도는 이미 대화가 끝났음을 알리는 것이었다. 이서리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더 물어봐야 소용없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눈을 맞추고 싶었다. 그러나 이정헌은 끝내 딸의 얼굴을 제대로 바라보지 않았고, 그 무성의함이 오히려 어떤 대답보다도 분명한 답이 되어 있었다. 서재를 나서며 이서리는 아버지의 손끝에서 튀던 그 미약한 불씨를 다시 떠올렸는데, 그것이 언젠가 자신을 겨눌 수도 있다는 예감이 스치고 지나갔다. 불이란 것은 본래 다스리는 자의 뜻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때가 되면 스스로 번지고 태우는 법이었다. 그저 예감이었을 뿐인데도, 그녀의 걸음은 이상하게 무거워졌고, 복도 끝 초대 가주의 초상화 아래를 지날 때는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고 그 붉은 화염을 한참이나 올려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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