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악명 영주의 두 얼굴

5화

청류령이 보이기 시작한 건 여정 보름째 되던 날 오후였다. 마차 바퀴가 자갈길을 넘을 때마다 몸이 덜컹거렸고, 나는 그 흔들림에 몸을 맡긴 채 창밖으로 시선을 두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눈을 크게 떴다. 성벽이 하얗다. 변방의 요새라면 회색 돌벽에 여기저기 갈라진 틈이 있어야 정상이었다. 전쟁이라도 몇 번 겪은 것처럼 이끼가 끼고, 화살촉이 박혔던 자국이라도 남아 있어야 했다. 그런데 눈앞의 성벽은 마치 새로 지은 것처럼 정갈했고, 성문 위로는 초록 넝쿨이 가지런히 늘어져 있었다. 누가 일부러 다듬은 것 같은 모양새였다. "여진, 저거 보여요?" "네, 아가씨." "저게 그 청류령 성벽이라고요?" "···그렇습니다만." 여진의 목소리에 미세한 망설임이 묻어 있었다. 나만 이상하게 느끼는 게 아니라는 뜻이었다. 성문을 통과하자 더 이상했다. 거리는 깨끗했다. 흙탕물도, 쓰레기도, 구걸하는 사람도 없었다. 상점가에서는 사람들이 웃으며 물건을 사고팔았고, 아이들이 골목에서 뛰어놀았다. 어느 노점에서는 빵 굽는 냄새가 풍겼고, 옷감을 파는 상인은 손님과 흥정을 하며 웃고 있었다. 이건 뭐지. 소문 속 청류령은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하고 밤이면 아무도 밖에 나오지 않는 무법지대였다. 영주가 사람의 피를 마신다느니, 마음에 안 드는 자는 그 자리에서 목을 벤다느니, 온갖 흉흉한 이야기가 왕도까지 퍼져 있었다. 그런데 눈앞의 이 거리는 웬만한 왕도 상가 거리보다 정돈돼 있었다. 심지어 골목 어귀에 앉아 있는 노인조차 표정이 편안했다. "여진, 이게 청류령입니까." "그렇습니다." "소문은 대체 뭐였습니까." "소문은 소문이죠." "소문은 소문이라뇨. 그게 답이 됩니까?" "제가 겪은 걸 말씀드리는 게 아니라, 그냥 남들이 하는 말이 그렇다는 겁니다." 대답이 너무 태연해서 오히려 더 얼떨떨했다. 나는 창틀에 손을 얹은 채 계속 거리를 살폈다. 벽 하나, 지붕 하나까지 소문과 어긋나는 게 신경 쓰였다. 마차는 곧 성 안쪽, 영주의 저택으로 보이는 건물 앞에 멈췄다. 저택 역시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관리가 잘된 정원과 깔끔한 담벼락을 갖추고 있었다. 담쟁이 덩굴 하나까지 균형 잡힌 모양으로 다듬어져 있었다. 저택 앞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검은 머리, 검은 눈. 소문에 나온 그대로였다. 그런데 소문에는 없던 게 있었다. 그 눈빛이 이상하게 담담했다. 사람을 잡아먹는 짐승의 눈이 아니라, 그냥 지쳐 보이는 사람의 눈이었다. 키는 컸고 체격도 좋았지만, 위압적이라기보다는 그저 무겁게 가라앉아 있는 느낌이었다. "선우강입니다." 낮고 담담한 목소리였다. 나는 마차에서 내리며 그와 눈을 마주쳤다. 예상했던 위압감 같은 건 없었다. 오히려 무언가를 견디고 있는 사람 같아 보였다. 어깨가 축 처져 있는 것도 아닌데, 왜 그런 느낌이 드는지 나도 알 수 없었다. "한서은입니다." "오시는 길이 힘드셨을 겁니다." 의외로 예의를 갖춘 말투였다. 나는 이 상황이 어색해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사람 피를 먹는다는 악마를 상상하고 왔는데, 눈앞의 남자는 그냥 조용한 성격의 영주처럼 보였다. 손을 내밀며 인사를 청할 줄 알았는데, 그는 그냥 한 발짝 물러서서 길을 터 줬다. 그 사소한 배려조차 낯설었다. "소문을 듣고 오셨을 텐데." 그가 먼저 말을 꺼냈다. "···예." "믿으셨습니까." "반은요." "어느 반이요." "당신이 무섭게 생겼다는 반이요." "그 반은 틀렸습니까." "아니요, 그건 맞았습니다. 인상은 확실히 무섭게 생기셨네요." 선우강의 표정이 그때 처음으로 미세하게 움직였다. 웃은 건지 인상을 쓴 건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작은 움직임이었지만, 나는 그게 뭔가 균열의 시작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저 무표정한 얼굴 안쪽에 뭔가 다른 게 있다는 확신이 스쳤다. "들어가시죠. 방을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저택 안으로 들어서는 동안 나는 계속 주변을 살폈다. 벽에 걸린 그림, 놓인 가구, 스치는 하인들의 표정까지 전부 소문과 정반대였다. 하인들은 나를 보고 두려움 없이 인사했고, 복도는 청결했다. 창문마다 볕이 잘 들어와서 복도 전체가 밝았다. 소문 속 그림처럼 어둡고 축축한 성이었다면 이런 채광은 있을 수 없었다. 계단을 오르며 나는 슬쩍 뒤를 돌아봤다. 선우강은 하인에게 뭔가 짧게 지시를 내리고 있었는데, 말투가 낮고 정중했다. 명령이라기보다는 부탁처럼 들렸다. 저게 소문 속 그 악명 높은 영주라고? 방에 도착하자 여진이 짐을 정리하는 사이 나는 창가에 서서 정원을 내려다봤다. 정원에는 계절에 맞지 않게 여러 종류의 꽃이 심어져 있었다. 누군가 세심하게 관리한 흔적이었다. 저 아래 정원사로 보이는 사람이 허리를 굽혀 잡초를 뽑고 있었는데, 표정이 지극히 평범했다. 무서운 영주 밑에서 일하는 사람의 표정이 저럴 수 있나. "아가씨." 여진이 조심스럽게 불렀다. "영주님께서 저녁을 함께 하시겠다고 전하셨습니다." "···저와요." "네." "단둘이요?" "그런 것 같습니다." 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소문 속의 그 남자와 마주 앉아 저녁을 먹는다는 상상이 아직도 실감 나지 않았다. 방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저녁 이야기가 나오는 것도 이상했고, 그 제안을 한 사람이 이렇게 빠르게, 이렇게 침착하게 움직인다는 것도 이상했다. "여진, 솔직히 말해봐요. 여기 정말 청류령 맞아요? 우리 길 잘못 든 거 아니고요?" "길은 맞게 왔습니다, 아가씨." "그럼 소문이 완전히 거짓말이었다는 거예요?" "그건 제가 대답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여진은 그렇게 말하고 다시 짐 정리에 집중했다. 나는 창밖으로 다시 눈을 돌렸다. 저 아래 정원, 저 담벼락, 저 하인들의 웃는 얼굴까지, 전부 내가 알던 청류령과는 완전히 다른 그림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이 저택에 들어온 순간부터 계속 들던 그 이상한 위화감이 점점 확신으로 바뀌고 있었다. 이 사람, 소문과 완전히 다르다. 그리고 그 다름의 이유가 뭔지, 나는 아직 하나도 알지 못했다. 저 담담한 눈빛 안쪽에 뭐가 숨겨져 있는지, 왜 이 깨끗하고 평화로운 성이 세상에는 지옥처럼 알려져 있는지, 왜 그가 그 소문을 굳이 바로잡지 않고 그대로 두고 있는지. 저녁 자리에서 무슨 이야기가 나올지, 이 조용한 남자가 왜 그런 악명을 뒤집어쓰고 사는지, 그 답이 곧 밝혀질 것 같은 예감만이 방 안 가득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다. 창밖으로 해가 조금씩 기울고 있었다. 저녁까지 앞으로 두어 시간. 나는 그 시간이 이렇게 길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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