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가짜 기억, 진짜 안주인

1화

눈을 뜬 순간 가장 먼저 감각된 것은 천장의 무늬였다. 나뭇결이 소용돌이치듯 얽힌 짙은 갈색 천장은 그녀가 알던 어떤 방의 천장과도 닮지 않았고, 코끝으로 스며드는 냄새 역시 낯선 약초와 마른 꽃잎이 섞인 듯한 향이어서, 이아라는 잠시 자신이 아직 꿈속에 있는 것인지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손끝을 움직여보려 했지만 손가락 하나 까딱하는 데도 이상하게 힘이 들어갔고, 몸 전체가 마치 오랫동안 물속에 잠겨 있던 것처럼 무거웠다. 눈꺼풀조차 제 것이 아닌 듯 느릿하게 움직였고, 눈동자를 굴려 방 안을 살피는 그 짧은 동작에도 관자놀이가 뻐근하게 당겨왔다. '여기가 어디지.' 짧은 물음 하나가 머릿속에서 메아리쳤을 때, 뒤이어 떠오른 것은 더 이상한 사실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떠올릴 수 있었고, 얼굴도 손도 낯익었지만, 정작 지난 10년의 시간이 마치 지워진 필름처럼 텅 비어 있었다. 마지막으로 기억나는 장면은 열아홉의 봄, 학원 뒷마당의 벚나무 아래에서 누군가와 나눈 짧은 대화였는데, 그 뒤로는 아무리 더듬어도 손에 잡히는 것이 없었다. 분명 그 대화 다음에도 무언가가 있었을 텐데, 그 자리만 도려낸 듯 깨끗하게 비어 있는 게 오히려 소름이 끼쳤다. '서른이 다 되도록 뭘 했길래 통째로 사라졌을까.' 스스로도 어이없는 감상이었지만, 지금은 이보다 더 급한 질문들이 목까지 차올라 있었다. 몸을 일으키려 팔에 힘을 주는 순간, 시야 한구석에 걸린 손등의 흉터가 눈에 들어왔고, 그 순간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왈칵 쏟아지듯 밀려들었다. 그것은 이아라의 기억이 아니었다. 야근에 지쳐 집으로 돌아와 침대에 쓰러지듯 누워 태블릿을 켜던 손, 화면 속에서 낮은 목소리로 대사를 읽던 캐릭터의 얼굴, '선우진 루트는 공략 난이도가 지옥이다'라며 커뮤니티에 글을 올리던 자신의 손끝까지, 전혀 다른 삶의 파편들이 한꺼번에 밀려들며 그녀를 덮쳤다. 라라. 그것이 그 삶에서의 이름이었다. 오토메 게임을 지독하게 좋아했고, 그중에서도 유독 공략률이 낮아 악명 높았던 캐릭터의 루트를 몇 번이나 실패하고 다시 시작했던, 그 게임 속 세계의 이름을 이제는 또렷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밤새 화면을 노려보며 세이브 파일을 몇십 개씩 만들어놓고, 대화 선택지 하나에 몇 시간을 고민했던 기억까지도,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그리고 지금 그녀가 눈을 뜬 이 방, 이 천장, 이 나무 냄새는 그 게임의 초반부, 여주인공 '이아라'가 결혼 후 처음 정신을 차리는 장면과 놀랍도록 닮아 있었다. '설마.' 심장이 갈비뼈를 두드리는 소리가 스스로에게도 들릴 만큼 크게 뛰기 시작했다. 이아라는 천천히 자신의 손을 들어 눈앞에서 뒤집어 보았고, 손목에 감긴 얇은 팔찌의 문양까지도 게임 속 삽화에서 본 것과 정확히 일치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고서야, 이것이 단순한 착각이 아니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손가락 끝으로 팔찌의 문양을 더듬어보았다. 은세공으로 새겨진 작은 매의 문양이었는데, 게임 삽화 속에서 그녀, 라라가 몇 번이나 확대해서 들여다보았던 바로 그 모양이었다. 이런 것까지 똑같을 필요는 없었을 텐데. 게임 속에서 이아라는 여섯 살 아들을 둔 백작가의 안주인이었고, 남편은 그 게임에서 가장 낮은 공략 대상, 즉 가장 냉정하고 가장 정을 주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던 인물, 선우진이었다. '가장 낮은 루트라는 게, 정확히 무슨 뜻이었더라.' 기억을 더듬을수록 좋지 않은 단어들만 떠올랐다. 집착, 감금, 파국. 유저들 사이에서 선우진 루트는 '엔딩이 아니라 형벌'이라는 별명으로 불렸고, 그 캐릭터를 선택한 플레이어의 절반은 배드엔딩을 보고 나서야 이 캐릭터를 왜 넣었는지 이해가 안 간다며 게시판에 불평을 쏟아냈던 기억이 났다. 라라 역시 그 게시판의 단골이었다. 선우진의 배드엔딩만 세 개를 봤고, 그중 하나는 너무 끔찍해서 캡처조차 하지 않았던 것도 떠올랐다. 그런데 지금, 그 배드엔딩들의 배경이 되었던 이 저택의 침실에,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 누워 있었다. 창밖에서 새 우는 소리가 들려왔고, 그 평화로운 소리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이아라의 손끝은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나는 왜, 그 여자가 되어 있는 거지.' 답을 찾으려 해도 머릿속에는 게임의 설정값만 어지럽게 떠돌 뿐, 정작 자신이 왜 이 몸에, 이 상황에 들어와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실마리도 잡히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 시나리오는 다 짜놓고 정작 프롤로그만 빼먹은 것처럼. 답을 알 수 없는 질문 앞에서, 그녀는 우선 몸을 일으키기로 했다. 이불을 걷어내자 얇은 잠옷 아래로 낯선 몸의 굴곡이 느껴졌고, 열아홉이 아니라 분명 서른에 가까운 여자의 몸이라는 사실이 감각적으로 확인되었다. 허리는 라라의 기억보다 가늘었고, 손끝에는 낯선 굳은살이 배어 있었는데, 그것이 무엇을 쥐던 흔적인지는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열 살은 그냥 사라진 게 아니라, 이 안에서 살았던 거구나.'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그녀, 이아라는 지난 10년을 이 세계에서 실제로 살아왔고, 결혼을 했고, 아이를 낳았으며, 지금은 그 모든 기억을 잃은 채 게임을 알던 또 다른 자신, 라라의 지식만 남은 상태로 깨어난 것이었다. 여섯 살 아들이 있다고 했다. 그 아이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라는 생각이 뒤늦게 떠오르자 가슴 한쪽이 이상하게 조여왔다. 얼굴도 모르는 아이인데, 왜 이렇게 마음이 쓰이는 건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몸을 일으켜 침대 밖으로 다리를 내리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발끝이 바닥의 냉기를 느끼고 순간적으로 움츠러들었고, 다리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아 침대 기둥을 붙잡고서야 겨우 몸을 세울 수 있었다. 창문 쪽으로 다가가 커튼을 걷으려던 손이 멈춘 것은, 창틀에 덧대어진 쇠창살을 발견한 순간이었다. 장식이라 보기엔 지나치게 촘촘했고, 방범이라 보기엔 지나치게 안쪽을 향해 있었다. 바깥의 침입을 막기 위한 것이 아니라, 안쪽에서 무언가가 나가지 못하도록 막아놓은 형태였다. '이거 설마.' 기억 속 어딘가에서, 라라가 게시판에 남겼던 댓글 하나가 떠올랐다. '이 저택 자체가 새장이다'라는, 누군가의 코멘트에 자신도 웃으며 동의했던 기억이었다. 그때는 그저 재미있는 설정 놀이였는데, 지금은 그 웃음이 목구멍에 걸린 것처럼 나오지 않았다. 말을 끝맺기도 전에, 방문 밖에서 무거운 발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한 걸음 한 걸음이 마치 이 공간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미리 알리는 듯 규칙적이었고, 그 소리가 가까워질수록 이아라는 숨을 죽인 채 문을 응시했다. 발소리에는 조금의 서두름도 없었다. 오히려 그 규칙성이 더 두려웠는데, 마치 이 방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전혀 상관없다는 듯한 무심함이 느껴져서였다. 이아라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고, 등이 차가운 창틀에 닿는 순간에야 자신이 도망칠 곳조차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손잡이가 돌아가는 소리가 방 안의 정적을 갈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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