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다음 날 아침, 이아라는 눈을 뜨자마자 평소와는 다른 속도로 몸을 일으켰다. 창밖의 빛이 아직 희끄무레한 시각이었는데도 그녀는 이불을 걷어내며 하녀를 불렀고, 목욕물을 부탁하는 목소리에는 스스로도 놀랄 만큼 또렷한 결기가 실려 있었다.
"오늘은... 옷도 신경 써서 골라주시겠어요."
하녀가 살짝 눈을 크게 떴다가 곧 고개를 숙이고 물러가는 뒷모습을 보며, 이아라는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은 채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가만히 숨을 골랐다. 손끝이 차가웠다. 긴장 때문인지, 아니면 아직 이 몸에 완전히 익숙해지지 않은 탓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지만, 어느 쪽이든 지금은 중요하지 않았다.
'게임 속 지식이든, 라라의 직감이든.'
그녀는 천장을 올려다보며 생각을 정리했다. 이 저택 안에서, 이 낯선 몸으로, 낯선 이름으로 살아남으려면 결국 선우진이라는 벽 앞에 매번 무릎을 꿇는 방식으로는 안 된다는 결론에 도달해 있었다. 겁에 질려 웅크리기만 해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적어도 이 세계의 규칙 안에서는, 목소리를 낼 줄 아는 사람만이 협상의 자리에 앉을 수 있는 것 같았다.
욕조에 몸을 담그며 그녀는 몇 번이고 오늘 할 말들을 속으로 되짚었다. 문. 자물쇠. 별채. 순서를 정하고, 어떤 어조로 물어야 할지, 어디까지 밀어붙여야 할지를 가늠해보았지만, 정작 그 앞에 서면 계획대로 될 리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이 저택의 주인은, 계획이라는 것을 무색하게 만드는 종류의 사람이었으니까.
하녀가 가져온 옷은 수수하지만 단정한 것이었고, 이아라는 그 옷의 끈을 스스로 여미며 거울 속 낯선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붉은 머리칼과 창백한 얼굴. 여전히 이 얼굴이 완전히 자신의 것처럼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오늘만큼은 이 얼굴로 버텨야 했다.
오후 무렵, 복도 저편에서 발소리가 들려왔을 때 이아라는 침대가 아니라 창가의 작은 탁자 앞에 미리 앉아 있었다. 두 손을 탁자 위에 가지런히 올린 채, 창밖의 정원을 바라보는 척하고 있었지만 실은 문 쪽에서 들려오는 발소리 하나하나에 온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문이 열리고, 선우진이 들어섰다.
그 순간 그의 걸음이 문턱에서 잠깐 멈추었다. 침대에 웅크린 채 이불을 끌어당기고 있을 거라 예상했던 자리에 그녀가 없었기 때문이었을까. 그것은 예상치 못한 장면 앞에서 순간적으로 판단의 축이 흔들린 사람의 걸음걸이였고, 이아라는 그 미세한 멈춤을 놓치지 않고 지켜보았다.
"몸은 좀 어떠시오."
의례적인 물음이었다. 늘 그렇듯 짧고, 늘 그렇듯 감정이 배제된 목소리였다. 이아라는 곧바로 본론을 꺼내는 쪽을 선택했다. 어차피 이런 종류의 대화에는 서론이 길어질수록 자신이 밀리게 된다는 걸 어렴풋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괜찮아요. 그런데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떨렸지만, 흔들리지 않았다. 정확히는, 떨림을 감추려 애쓰는 대신 그 떨림을 인정한 채로 말을 이어가는 쪽을 택했다. 손끝이 탁자 위에서 살짝 떨리고 있었지만, 그녀는 그것을 숨기려 하지 않고 오히려 손을 무릎 위로 내려놓았다.
"이 방 문은 왜 밖에서만 열리나요."
직접적인 질문에 선우진의 눈매가 살짝 좁아졌다. 그는 이런 종류의 질문을 예상하지 못한 얼굴이었는데, 그것은 그가 상대하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의 눈빛 앞에서 질문 자체를 삼켜버렸기 때문이었다. 그의 시선이 이아라의 얼굴에서 손으로, 다시 얼굴로 옮겨갔다.
"당신이 다칠까 걱정했을 뿐이오."
짧은 대답이었지만, 이아라는 그 안의 빈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잠깐 숨을 들이쉬고, 준비해둔 말을 꺼냈다.
"제가 다칠까 걱정되신다면, 문 앞에 사람을 두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나요. 저는 방 안에 갇힌 사람이 된 것 같은데."
말을 마친 뒤, 그녀는 스스로도 이 대사가 라라의 기억 속 어떤 상황판단 훈련에서 나온 것인지, 혹은 게임 지식에서 흘러나온 것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어쩌면 둘 다일지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출처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말이 입 밖으로 나갔고, 되돌릴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선우진은 잠시 침묵했다. 그 침묵의 길이가 방 안의 공기를 팽팽하게 당겼는데, 창밖에서 새 한 마리가 날아오르는 소리마저 유난히 크게 들릴 정도였다. 정작 그 침묵 속에서 그가 하고 있던 생각은 이아라가 짐작하는 방향과는 전혀 달랐다.
'열아홉의 그때도 이렇게 겁 없이 말하던 사람이었나.'
그는 오히려 그녀가 두려움에 떨며 애원하거나, 혹은 아예 무기력하게 순응할 거라 예상했었다. 지금까지 이 저택을 거쳐 간 사람들은 대부분 그랬으니까. 그의 앞에서는 눈을 마주치지도 못하거나, 마주치는 순간 시선을 떨구거나. 눈앞의 이 여자가 침착하게, 자신의 권리를 짚어가며 논리적으로 따지고 든다는 사실이, 그에게는 낯설고도 이상하게 반가운 감각으로 다가왔다. 그것이 반갑다는 사실 자체가 그를 조금 당혹스럽게 만들었지만.
"…생각해보겠소."
짤막한 대답이었지만, 그것은 그가 누군가의 요청에 즉답으로 거절을 던지지 않은, 거의 처음 있는 순간이었다. 그 사실을 그 자신도 미처 깨닫지 못한 듯, 대답을 뱉은 뒤에도 표정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이아라는 그 대답이 완전한 승낙이 아니라는 걸 알았지만, 적어도 문이 열릴 가능성이 생겼다는 사실만으로도 안도의 한숨을 삼켰다. 심장이 아직도 빠르게 뛰고 있었지만, 그것이 두려움 때문인지 작은 성취감 때문인지는 스스로도 명확히 구분할 수 없었다.
그가 방을 나서기 전, 이아라는 한 걸음 더 나가보기로 했다. 여기서 멈추면 다음 기회가 언제 올지 모른다는 조급함이 그녀를 밀어붙였다.
"그리고, 별채는 뭔가요."
그 질문이 던져지는 순간, 선우진의 표정이 처음으로 완전히 얼어붙었다. 방금까지의 흥미로움이 순식간에 경계로 뒤바뀌는 그 변화가 너무 빨라서, 이아라는 자신이 무언가 건드려서는 안 될 것을 건드렸다는 사실을 즉각적으로 깨달았다. 방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낮아진 것 같았고, 그의 눈빛에서 이전까지의 낯선 반가움 같은 것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그건 당신이 알 필요 없는 곳이오."
낮고 단호한 그 목소리에는 이전의 어떤 대답에서도 느껴지지 않았던 냉기가 서려 있었다. 이아라는 순간 등줄기가 서늘해졌지만, 여기서 물러나면 다시는 물을 기회가 없을 것 같다는 직감에 한 마디를 더 얹었다. 목소리가 살짝 갈라졌지만, 멈추지 않았다.
"제가 알 필요가 없다고, 당신이 정하시는 건가요."
짧은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 속에서 이아라는 자신의 심장 소리가 방 안에 울릴 것 같다는 착각에 빠졌고, 선우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턱이 살짝 굳었고, 손가락이 옷자락을 한 번 움켜쥐었다가 다시 풀어지는 것을, 이아라는 놓치지 않고 지켜보았다.
선우진은 대답 대신 몸을 돌려 방을 나섰고, 문이 닫히는 소리는 이번에도 여전히 자물쇠 소리를 뒤에 매달고 있었지만, 그의 뒷모습에는 이전과는 다른 종류의 흔들림이 실려 있는 것처럼 보였다. 발걸음이 평소보다 조금 빨랐고, 어깨의 각도가 미묘하게 뒤틀려 있었다.
이아라는 닫힌 문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별채라는 단어를 입 밖에 낸 순간부터 지금까지, 방 안의 온도가 한 번도 제자리로 돌아오지 않은 것 같았다. 그녀는 자신이 건드린 것이 단순한 규칙 위반이 아니라, 이 남자의 어딘가 깊은 곳에 묻혀 있는 무언가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알아서는 안 될 것 같다는 두려움과, 반드시 알아내야 한다는 다급함이 동시에 그녀의 안에서 소용돌이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