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조상궁은 방으로 들어서며 나를 위아래로 한 번 훑었다. 40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나이, 얇게 그은 입술, 그리고 매처럼 날카로운 눈빛이었다.
허리를 곧게 세운 채 문 앞에 서서, 나를 살피는 그 시선이 꼭 물건 값을 매기는 상인 같았다.
"낮에 있었던 일, 들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차분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 밑에 깔린 압박감은 숨길 수 없었다.
나는 자리에 앉은 채로 고개만 살짝 들었다. 일어나서 예를 갖춰야 하나 잠깐 고민했지만,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시종의 처우는 시종 처소에서 결정하는 것이 궁의 원칙입니다. 후보이신 전하께서 그 원칙을 어기셨다는 게, 다른 후보님들 사이에서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원칙, 원칙. 다들 그 단어를 참 좋아하는구나.
여기 사람들은 원칙이라는 말을 방패처럼 쓴다. 그 안에 뭐가 들었는지는 아무도 안 궁금해하고.
"사람이 크게 다쳤는데 원칙만 따지는 게 옳은가요?"
"옳고 그름을 따지는 자리가 아닙니다. 규율은 지켜야 하는 것이지, 판단할 대상이 아니에요."
조상궁의 목소리에 처음으로 날카로움이 섞였다.
나는 그 목소리의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방금 그 한마디에서, 이 사람이 진짜로 하고 싶은 말이 뭔지 살짝 드러난 것 같았다.
"그리고 하나 더 말씀드리자면, 오늘 왕녀 전하께서 보이신 태도가 다른 분들 눈에 어떻게 비칠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어떻게 비치는데요?"
"오만하다고 보일 수 있지요. 자신의 시종 하나를 위해 다른 후보님들 앞에서 규율을 어기는 태도가, 앞으로 전하께 유리하게 작용할 리가 없습니다."
협박에 가까운 경고였다.
말투는 존댓말인데 내용은 완전히 반대다. 겉으로는 걱정해주는 척하면서 속으로는 칼을 겨누고 있는 게 눈에 다 보였다.
나는 조상궁의 표정을 살폈다. 겉으로는 중립적인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그 안에 뭔가 다른 계산이 있는 게 느껴졌다.
입꼬리는 미소를 만들고 있는데,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그 어긋남이 오히려 더 신경 쓰였다.
"조상궁님께서는 이 일에 왜 이렇게 관심을 두시는지 궁금하네요. 단순히 규율 때문이라기엔 좀 과하신 것 같은데요."
조상궁의 눈이 아주 살짝 커졌다. 그러고는 다시 원래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 짧은 틈, 반박자쯤 늦은 반응. 나는 그걸 놓치지 않으려고 눈에 힘을 줬다.
"저는 이 후궁의 질서를 지키는 사람일 뿐입니다."
뻔한 대답이었지만, 그 짧은 순간의 흔들림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질서를 지키는 사람이라니. 그 말을 하는 사람치고 눈빛이 너무 계산적이었다.
조상궁은 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나를 한 번 더 훑어보고는, 방을 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꽤 크게 울렸다.
혼자 남은 방 안에서 나는 잠시 멍하니 앉아 있었다.
이게 단순한 경고였을까, 아니면 뭔가 더 큰 그림의 일부였을까.
조상궁이 물러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미주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전하, 아까 조상궁님 오신 거요……"
"괜찮아. 별일 없었어."
하지만 미주의 얼굴에는 여전히 걱정이 가득했다. 손을 꼼지락거리는 게, 뭔가 더 할 말이 있어 보였다.
"진짜 괜찮으세요? 조상궁님이 그렇게 직접 오시는 거, 흔한 일이 아니거든요."
"뭐가 흔한 일이 아닌데?"
"보통은 아랫사람 시켜서 전달하시잖아요. 직접 오셔서 말씀하시는 건, 그만큼 중요하게 여기신다는 거예요."
그 말을 듣고 나니 좀 더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냥 규율 문제였다면 굳이 이렇게 직접 나서서 압박할 필요가 있었을까.
"조상궁님이 저러시면 진짜 무서운 거예요. 저 전에 시종들끼리 하는 얘기 들었는데, 조상궁님이랑 임은채 아가씨랑 손발이 잘 맞는다고……"
임은채. 이 이름도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그게 누군데?"
"조상궁님 옆에서 자주 보이는 분이에요. 짙은 남색 옷을 입고 다니시는데, 궁녀들 사이에서 평판이 별로 안 좋아요. 조상궁님 뒤에서 이런저런 일을 처리하신다고……"
"이런저런 일이라니, 예를 들면?"
미주는 목소리를 낮췄다.
"저도 정확히는 몰라요. 그냥 눈 밖에 난 시종이나 궁녀들, 갑자기 처소가 바뀌거나 조용히 궁을 나가는 일이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임은채 아가씨가 근처에 있었다는 얘기가 있어서……"
뭔가 냄새가 나는데.
표면적으로는 규율을 내세운 경고였지만, 그 뒤에 진짜 이유가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미주의 어깨를 툭 두드리며 웃어 보였다.
"걱정 마. 나 그렇게 쉽게 안 밀려나."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속으로는 머리가 복잡했다. 조상궁 하나만 상대하는 거면 그나마 낫겠는데, 뒤에 누가 더 있는지도 모르는 상황이라니.
다음 날, 나는 중정을 지나다 우연히 임은채와 마주쳤다.
짙은 남색 긴 옷을 입은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입가에 미소를 걸었다. 하지만 그 미소에는 온기가 없었다.
가까이서 보니 나이는 나보다 몇 살 위 정도로 보였다. 눈매가 가늘고, 걸음걸이에 여유가 넘쳤다. 이 궁 안에서 자기 자리가 확실하다는 걸 아는 사람의 태도였다.
"왕녀 전하시군요.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좋은 말이었길 바라네요."
"글쎄요. 좋은 말이었는지는 전하께서 앞으로의 행동으로 증명하셔야겠지요."
노골적인 위협이었다.
말투는 부드러운데 내용은 조상궁보다 한 수 위였다. 적어도 조상궁은 규율이라는 명분을 내세웠는데, 이 여자는 그런 것조차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제 행동이 마음에 안 드시면 직접 말씀하셔도 될 것 같은데요."
"직접 말씀드리는 것보다, 두고 보는 게 더 재미있어서요."
임은채는 그 말을 남기고 스쳐 지나갔다. 옷깃에서 짙은 향이 흘러나왔다. 뭔가 익숙한 향인데, 어디서 맡아본 건지 기억이 안 났다.
나는 그 말을 웃으며 넘겼다. 하지만 속으로는 경계심을 세웠다.
재미있어서, 라니. 남의 목줄을 쥐고 흔드는 게 재미있다는 사람은 대체 어떤 배경을 가지고 있는 걸까.
이 궁 안에는 내가 아직 알지 못하는 세력이 움직이고 있었다. 조상궁, 임은채, 그리고 그 뒤에 있을 누군가.
이름도 모르는 세력이 나를 두고 저울질을 하고 있다는 게, 생각할수록 기분이 나빴다. 조용히 살고 싶다는 목표가 점점 멀어지고 있는 게 느껴졌다.
애초에 눈에 안 띄고 살자는 계획이었는데, 벌써 두 사람이나 나를 표적으로 잡은 것 같으니 원.
그날 밤, 나는 다시 이현에게 불려갔다.
또 무슨 일로 부르는 걸까. 낮에 있었던 소란 때문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일까. 발걸음을 옮기는 내내 머릿속이 어지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