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볼모궁, 짝사랑의 죄

3화

이헌 오라버니가 다시 나를 찾아온 건 열흘 만이었다. 그 열흘 동안 나는 별궁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했다. 원래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몸은 아니었지만, 요즘은 유독 궁녀들의 발걸음까지 조심스러워졌다. 국왕의 병세가 위중하다는 소문이 궁 전체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창가에 앉아 있으면 복도를 지나는 궁녀들의 목소리가 간간이 흘러들었다. “의식이 또 흐려지셨대.” “어의들이 밤새 안 나왔다며.” “곧 무슨 일이 나긴 날 것 같아…….” 나는 그 파편들을 조각조각 주워 모아 머릿속으로 이어붙였다. 신문 기사도 아니고, 궁녀들 사이의 뜬소문일 뿐인데도 나는 그걸 놓치지 않으려 귀를 세웠다. 창가에 앉아 궁녀들의 발소리와 대화를 엿듣는 게 요즘 내 유일한 정보 수집 방법이었다. 내가 이렇게까지 필사적으로 정보를 모으는 이유는 단순했다. 국왕이 죽으면, 이 나라의 판이 통째로 바뀐다. 그리고 그 판 위에서 나는 아무런 힘도 없는 말이었다. 이헌 오라버니가 왕이 되느냐, 아니면 다른 왕자가 되느냐에 따라 내 목숨줄이 왔다 갔다 할 수도 있었다. 그러니 신경이 곤두서는 건 당연했다. 그날도 나는 창가에 앉아 옥반지를 만지작거리며 궁녀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은 유독 발소리가 크게, 그리고 급하게 들려왔다. 나는 순간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채은아.” 문이 열리며 그가 방에 들어섰다. 익숙한 목소리였는데, 오늘은 유독 지쳐 있었다. 이헌 오라버니는 예의 그 단정한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옷매가 살짝 흐트러져 있었고, 눈 밑에는 그늘이 짙게 내려앉아 있었다. 열흘 만에 보는 얼굴인데, 마치 열 살은 더 늙어버린 것 같았다. “오라버니, 안색이 안 좋으세요.” 내가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말했다. “요즘 잠을 잘 못 자서.” 그가 의자에 털썩 앉았다. 평소라면 이렇게 격식 없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을 텐데, 지금은 그럴 여유조차 없어 보였다. “아버님 때문에요?”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의식이 있다가 없다가 하셔. 어의들도 손을 놓았고.” 그의 목소리에 담긴 피로감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나는 뭐라 위로해야 할지 몰라 그냥 그의 앞에 차를 놓았다. 손이 조금 떨렸는데, 그게 긴장 때문인지 걱정 때문인지 나조차 알 수 없었다. “마셔요.” “고마워.” 그가 찻잔을 들고 잠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 옆얼굴이 왜 이렇게 낯설게 느껴지는지. 평소의 그는 늘 여유가 있었다. 웃음이 많았고, 말투도 부드러웠다. 그런데 지금 이 사람은 어깨가 무거운 짐을 진 사람처럼 보였다. 왕세자라는 자리가, 곧 다가올 왕좌라는 무게가 이미 그를 눌러대고 있는 것 같았다. “채은아, 만약 내가 왕이 되면.” 말을 하다 멈췄다. 찻잔을 든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나는 그 떨림을 놓치지 않았다. “왜요.” “……아니, 됐어.” 그는 그렇게 말을 삼켰다. 그리고 애써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찻잔을 입가로 가져갔다. 그 뒷말이 뭐였을지 나는 밤새 생각했지만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왕이 되면, 뭐. 나를 궁 밖으로 내보낼 거라는 얘기였을까. 아니면 다른 별궁으로 옮겨줄 거라는 얘기였을까. 혹은 그냥, 아무 의미 없는 말이 튀어나올 뻔했던 걸까. 이런 식으로 말을 끊는 게 그의 습관이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매번 그 뒷말을 궁금해했다. 그리고 매번 그는 끝까지 말해주지 않았다. “오라버니.” “응.” “저는 어떻게 될까요.” 이 질문을 하는 데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했는지 그는 알까. 목소리가 떨리지 않게 하려고 손톱으로 손바닥을 꾹 눌러야 했다. 그가 나를 잠시 바라보았다. 눈빛이 복잡했다. 마치 하고 싶은 말이 여러 개인데, 그중 어느 것도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내가 지켜줄게.” 짧고 단호한 대답이었다. 그런데 그 말이 왜 이렇게 서운했을까. 지켜준다는 말은, 보호가 필요한 존재라는 뜻이었다. 동생, 혹은 그 비슷한 무언가. 그가 나를 어떤 감정으로 보는지 나는 오래전부터 짐작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짐작이 맞을수록 내 마음은 점점 더 갈 곳을 잃었다. 이럴 때마다 나는 스스로에게 묻곤 했다. 내가 원하는 대답이 뭐였는지. 그가 나를 지켜준다고 했을 때, 나는 왜 기쁘지 않고 오히려 가슴 한쪽이 서늘해졌는지. 답은 이미 알고 있었다. 나는 지켜줘야 할 대상이 아니라, 그냥 옆에 두고 싶은 사람이 되고 싶었던 거다. 동등한 위치에서, 대등한 사람으로. 하지만 이런 마음을 입 밖으로 꺼낼 수는 없었다. 그건 지금 우리 사이에 있는 얇은 유리 같은 균형을 완전히 깨버리는 일이었으니까. “그런 눈으로 보지 마세요.” “무슨 눈.” “동생 보는 눈이요.” 말이 튀어나오자마자 후회했다. 마치 뇌를 거치지 않고 입에서 그냥 흘러나온 것 같았다. 그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채은아, 그게 무슨.” “아니에요. 그냥 헛소리예요.” 나는 급히 웃음을 지어 상황을 무마했다. 습관처럼 튀어나오는 웃음이 오늘은 유독 서글펐다. 이럴 때마다 나는 내 얼굴에 붙어 있는 이 웃음이라는 가면이 참 편리하면서도 지긋지긋하다고 생각했다. 그가 뭔가 더 말하려는 듯 입술을 살짝 벌렸다. 하지만 결국 입을 다물었다. 우리 사이엔 늘 이런 순간들이 있었다. 말이 끊기고, 그 뒤에 어색한 정적이 흐르고, 그러다가 결국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넘어가는. 침묵이 방 안을 채웠다. 창밖에서 바람이 스치는 소리, 그리고 멀리서 궁녀들이 지나가는 발소리만이 그 침묵을 간간이 깨뜨렸다. “곧 다시 올게.” 그가 일어서며 말했다. 나는 문 앞까지 그를 배웅했다. 문턱에 서서 그의 뒷모습을 보고 있으니 문득 이 사람이 정말 왕이 될 거라는 게 실감이 났다. 지금은 지쳐 보이지만, 옷을 갈아입고 어깨를 펴면 다시 그 위엄 있는 세자의 모습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 서면, 나 같은 존재는 그의 시야에서 점점 멀어질지도 몰랐다. “오라버니.” “응?” “아버님, 괜찮으실 거예요.” 근거 없는 위로였다. 하지만 그가 조금이라도 마음이 편해지길 바랐다. 정말로 국왕이 괜찮을 거라고 믿는 건 아니었다. 그냥, 지금 이 순간 그가 조금이라도 덜 무거운 마음으로 돌아가길 바랐을 뿐이다. “고마워.” 그가 짧게 웃었다. 그 웃음이 오늘 그가 보인 유일한 웃음이었다. 억지로 끌어올린 웃음이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그 미소가 조금은 진짜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가 떠난 뒤 나는 방문에 등을 대고 서서 눈을 감았다. 동생, 보호, 지켜준다. 이 세 단어가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나는 그에게 그저 지켜야 할 대상이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게 왜 이렇게 힘든지 모르겠다. 알고 있었으면서도, 매번 새삼스럽게 아팠다. 그날 밤, 나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다가 결국 목함 속 옥반지를 다시 꺼내 만졌다. 차갑고 매끈한 감촉이 손끝에 닿았다. 이 반지가 언제부터 내게 있었는지,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걸 만지고 있으면 이상하게 마음이 가라앉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이헌 오라버니가 왕이 되고 나면 나는 이 별궁에서 영영 잊혀질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지켜준다는 말은, 어쩌면 잊지 않겠다는 최소한의 약속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람은 바쁘면 잊는다. 왕좌에 앉은 사람이 별궁 구석에 있는 여자아이 하나를 계속 신경 쓸 여유가 있을까. 아무리 다정한 오라버니라도, 정치와 권력 앞에서는 순위가 뒤로 밀릴 수밖에 없었다. 나는 반지를 손가락에 끼워보았다. 헐렁했다. 아직 내 손은 너무 작았고, 이 반지가 어울릴 만큼 자라지도 못했다. 그 불안은 며칠 뒤, 예상보다 훨씬 빨리 현실이 되었다. 국왕이 죽었다는 소식이 별궁까지 전해진 건, 그날 새벽이었다. 문밖에서 다급한 발소리와 곡소리가 뒤섞여 들려왔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 순간, 앞으로 내 삶이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게 될 거라는 걸, 온몸으로 직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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