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즉위식이 끝난 지 사흘째 되던 날, 나는 뜻밖의 부름을 받았다.
새 국왕이 된 이헌이 궁정 개편을 위해 각 처소의 배치를 다시 정리한다고 했다. 별궁에 머물던 나 역시 그 절차에서 예외가 아니었다. 담당 궁녀가 서류 몇 장을 들고 와 서명을 요구했다.
“여기, 그리고 여기 서명해 주십시오.”
서류를 받아든 순간부터 나는 왠지 불안했다. 즉위식 이후로 별궁 쪽에는 유독 방문이 없었으니까. 명혜왕후 쪽에서 뭔가 트집을 잡으려는 건 아닐까, 온갖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서류를 살피던 나는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내 처소의 예산 항목이 절반 가까이 늘어나 있었다. 시녀 배정란도 새로 생겼다. 없던 항목이 몇 개나 더 붙어 있었다.
“이게 뭔가요.”
“전하께서 직접 지시하신 사항입니다.”
궁녀의 대답에 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눈으로 숫자를 다시 훑었다. 잘못 본 게 아니었다. 시녀가 셋이나 늘었고, 다달이 내려오는 비단과 향유의 품목까지 새로 적혀 있었다.
“저, 혹시 다른 처소들도 이렇게 조정이 되나요?”
“그건 각 처소마다 사정이 다르니…….”
궁녀가 말끝을 흐렸다. 나만 유독 늘었다는 뜻이었다.
이헌이 나서서 이런 걸 바꿔줬다는 게 고맙기도 하면서, 동시에 불안했다. 그가 나를 위해 눈에 띄는 조치를 취할수록, 명혜왕후의 시선은 더 날카로워질 게 분명했다. 궁 안에서 살아남으려면 조용히 있어야 한다는 걸, 나는 지난 몇 달 동안 뼈저리게 배웠는데.
서명을 마치고 서류를 돌려주는 손이 살짝 떨렸다. 궁녀는 별다른 낌새를 못 느꼈는지 인사만 하고 물러갔다.
서류를 정리하고 나서 나는 잠시 산책을 하러 나섰다. 즉위식 이후로 궁 안 분위기가 어수선했고, 별궁에만 갇혀 있던 나로서는 오랜만에 바깥 공기가 그리웠다. 방 안에만 있으면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창을 열어도 답답한 건 여전했으니까.
궁녀들의 눈을 피해 후원 쪽 소로로 접어들었다.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이 시간에는 사람이 적어서 나 같은 처지의 사람도 마음 편히 걸을 수 있었다.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이 유독 따가웠던 날이었다.
그곳에서 이헌과 마주쳤다.
그는 혼자였다. 시종도, 호위도 없이 나무 아래 서 있었다. 검은 곤룡포 대신 평상복을 입은 그는 예전 왕태자 시절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국왕이 됐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다른 사람이 되는 건 아닌가 보다, 그런 생각이 스쳤다.
“오라버니.”
습관처럼 그렇게 불러버렸다. 이제는 전하라고 불러야 하는데. 입 밖으로 나온 말은 이미 주워담을 수 없었다.
그가 나를 돌아보며 옅게 웃었다.
“그렇게 불러도 돼. 아무도 없으니까.”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즉위식 준비로 며칠 밤을 새운 사람 특유의, 그런 지친 기색이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혼자 여기서 뭐 하세요.”
“잠깐 숨 좀 돌리려고.”
그가 나무둥치에 등을 기댔다. 국왕이 된 지 사흘밖에 안 됐는데, 그의 얼굴엔 이미 오랜 통치자의 피로가 묻어 있었다. 눈 밑이 거뭇했고, 평소보다 말수도 적었다.
“힘드시겠어요.”
“그렇게 보여?”
“……네. 많이요.”
그가 짧게 웃었다. 웃음소리에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하루에 결재해야 하는 서류가 몇 장인지 알아? 세는 걸 그만뒀어.”
“그럼 좀 쉬셔야죠.”
“그러려고 여기 온 거잖아.”
그가 눈을 감았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새소리와 바람에 나뭇잎 스치는 소리만 후원을 채웠다.
“서류는 봤어.”
“……네, 감사합니다. 그런데 그렇게까지 안 하셔도 됐는데.”
“아니야. 이제라도 해줘야지.”
그가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 시선이 너무 곧아서 나는 순간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랐다.
“진작 해줬어야 했어.”
그 말에 나는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시선을 떨궜다. 바람이 불어 후원의 나뭇잎들이 흔들렸다. 나뭇가지 사이로 새어드는 빛이 그의 얼굴 위에서 잘게 부서졌다.
“채은아.”
“네.”
“……아니다.”
그가 또 말을 삼켰다. 요즘 그가 이런 식으로 말을 끊는 게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처음엔 그냥 넘겼는데, 이제는 그 뒷말이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다가 매번 삼키는 걸까. 나는 그걸 물어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물어봤다가 듣게 될 대답이 무서워서였는지도 모른다.
정적이 조금 길어졌다. 나는 발끝으로 흙바닥을 괜히 문질렀다.
“전하는, 이제 좀 편하세요?”
“편할 리가.”
그가 자조하듯 대답했다.
“왕관 무겁다는 말, 그거 진짜였어. 목이 뻐근할 정도로.”
“……그래도 표정은 예전보다 나아 보이세요.”
“그런가.”
그가 문득 손을 뻗어 내 이마에 흘러내린 머리칼을 넘겨주었다. 순간 심장이 쿵 떨어졌다. 손끝이 이마를 스치고 지나가는 그 짧은 순간이 이상하게 길게 느껴졌다.
“얼굴이 좀 나아졌네.”
뺨의 상처를 말하는 거였다. 나는 얼른 고개를 숙였다. 얼굴이 달아오르는 게 느껴져서 그걸 감추려고 한 행동이었다.
“강태의 어른이 잘 봐주셔서요.”
“다행이다.”
그의 손끝이 잠시 내 뺨에 머물다가 떨어졌다. 그 짧은 순간, 나는 숨을 쉬는 법을 잊어버린 것 같았다. 심장이 이상하게 뛰었다. 오라버니라고 부르는 사람한테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게 정상인가, 나는 순간 스스로가 이상하게 느껴졌다. 근데 이게 처음도 아니었다. 그의 손이 닿을 때마다 이렇게 심장이 반응한 게 벌써 몇 번째인지.
“……전하.”
“응.”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나도 결국 말을 삼켰다. 서로 삼킨 말들이 후원 공기 속에 그대로 흩어졌다.
그때였다.
“전하!”
멀리서 시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헌이 급히 손을 거두고 표정을 정리했다. 방금까지의 부드러운 얼굴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다시 국왕의 얼굴로 돌아갔다. 그 전환이 너무 빨라서 나는 잠시 멍했다.
“여기 계셨습니까.”
달려온 시종이 숨을 헐떡이며 말을 이었다.
“왕태후 마마께서 후원으로 향하고 계신다는 전언입니다.”
순간 우리 둘 다 표정이 굳었다. 심장이 다른 이유로 다시 뛰기 시작했다.
“채은아, 먼저 가.”
이헌이 낮게 말했지만 나는 이미 늦었다는 걸 직감했다. 도망칠 시간도, 몸을 숨길 곳도 없었다. 소로 저편에서 화려한 예복 자락이 나타났다. 명혜왕후였다.
그녀의 시선이 이헌과 나 사이의 거리를 훑었다. 아직 그의 손이 닿았던 온기가 내 뺨에 남아 있는데. 그 온기가 지금 이 순간 가장 위험한 증거처럼 느껴졌다.
명혜왕후의 입가에 얇은 미소가 걸렸다. 그 미소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저 미소를 몇 번이나 봤던가. 나에게 좋은 뜻으로 웃어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단둘이서, 이 시간에.”
그녀가 천천히 걸어오며 말을 이었다.
“참으로 다정한 모습이구나.”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심장이 요동치는 소리가 이 후원 전체에 울리는 것 같았다. 이헌 쪽을 슬쩍 쳐다봤지만, 그의 얼굴에서도 이미 여유는 사라지고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