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새 학기 첫날, 나는 화단 앞에 쭈그려 앉아 있었다.
2학년 1반 청소당번은 이번 달에도 나였다. 문세영 선생님은 나를 특별히 편애하는 것도 아니면서, 늘 손이 많이 가는 일은 내 몫으로 돌렸다. 화분 열두 개, 흙이 반쯤 마른 튤립 구근 여덟 개, 물뿌리개 하나.
교탁 옆 게시판에는 아직 작년 급훈이 붙어 있었다. '성실과 정직'. 종이 모서리가 누렇게 바랬다.
손끝이 시렸다. 3월인데도 정선 쪽에서 넘어온 바람은 아직 겨울 냄새를 풍겼다.
화분 받침 아래 고인 흙탕물에 손을 담그자 손톱 밑으로 검은 때가 끼었다. 나는 물뿌리개 손잡이를 꽉 쥐고 튤립 구근 사이사이에 물을 뿌렸다.
여덟 개 중 세 개는 이미 썩은 듯 물컹했다.
'이건 못 살리겠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썩은 구근을 화단 구석에 따로 모아두었다.
오른손 검지와 중지가 저릿하게 울렸다. 태어날 때부터 그랬다. 화가 나거나 무언가에 집중하면 손끝에서 옅은 빛이 새어 나왔다. 할아버지는 그걸 '만성 별력'이라고 불렀는데, 나는 그냥 손이 자주 아픈 병 같은 거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병원에서는 신경 이상이라고 했다. 초등학교 입학 전 대학병원 세 군데를 돌았는데, 어디서도 정확한 병명을 말해주지 못했다.
그저 손끝이 저릴 때마다 나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는 버릇이 생겼을 뿐이었다.
"야, 거기 비켜봐."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방학 전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남자애가 서 있었다.
강태호였다. 5학년 1반 반장. 방학 두 달 사이에 몸집이 눈에 띄게 불었다. 티셔츠 소매가 팔뚝에 꽉 껴서 접힌 자국이 남아 있었다.
운동화도 새것이었다. 나이키 로고가 선명한 흰색 운동화. 저런 걸 신으려면 최소 8만 원은 줘야 한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작년까지만 해도 강태호는 나보다 겨우 반 뼘 컸었다.
"화단 정리 중인데요." 내가 말했다.
"그러니까 비키라고, 새끼야." 그가 발끝으로 화분 하나를 툭 밀었다.
흙이 운동화 위로 쏟아졌다. 나는 손끝이 뜨거워지는 걸 느끼며 잠시 숨을 골랐다.
물뿌리개에 남아 있던 물이 화분 옆으로 흘러 흙과 뒤섞였다.
"저 아세요?" 내가 물었다.
강태호는 나를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피식 웃었다.
"2학년 꼬맹이를 내가 왜 알아."
그 말에 뭔가가 명치 아래에서 툭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지난 학기, 뒷산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한서연과 유하린이 이 자식한테 놀림받고 울면서 내려오던 날.
그날은 11월이었다. 두 사람 얼굴이 새빨갛게 얼어 있었고, 한서연은 신발 한 짝을 잃어버린 채였다.
강태호는 그때 뒷산 정자에서 애들 여럿을 세워두고 한서연 가방을 뒤졌었다.
그날 나는 이 자식 앞에 서서 다시는 그러지 말라고 경고했었다. 강태호는 그때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서 물러섰었다.
내 손끝에서 빛이 새어 나오는 걸 본 순간이었다.
그런데 지금, 저 눈빛엔 그날의 기억이 전혀 없었다.
'기억을 못 하는 게 아니라, 아예 신경도 안 썼던 거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한서연이랑 유하린은 기억하시죠?" 내가 조용히 물었다.
강태호의 표정이 잠깐 굳었다가 다시 비웃음으로 바뀌었다.
"아, 그 계집애들? 걔들이 무슨 상관인데."
"그때 사과하셨잖아요."
"내가 언제." 그가 코웃음을 쳤다. "기억도 안 나는 일 갖고 우기지 마."
나는 화분을 다시 세우려고 몸을 숙였다.
강태호가 내 어깨를 툭 밀쳤다.
"대답 안 해?"
손끝의 저릿함이 점점 강해졌다. 화분 흙 위로 아주 작은 빛 알갱이가 떨어졌다가 사라졌다. 강태호는 그걸 보지 못한 눈치였다.
'또 시작이구나.'
나는 손을 주머니에 슬쩍 집어넣었다.
"방학 동안 태권도장 다녔거든." 강태호가 주먹을 쥐어 보였다. "너 그때랑 똑같은 줄 알면 오산이야."
그가 주먹을 내 눈앞까지 들이밀었다. 손등에 상처 자국이 몇 개 나 있었다.
'저 상처, 태권도장에서 생긴 게 아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흙 묻은 화분을 조용히 다시 세워놓았다.
강태호는 내가 반응하지 않자 오히려 더 짜증이 난 얼굴이었다.
"뭐야, 겁먹은 거야?"
나는 여전히 대답하지 않고 물뿌리개를 집어 들었다.
"어디 두고 보자, 이도윤." 그가 내 이름을 부르며 돌아섰다.
이름은 기억하면서 얼굴은 기억 못 한다는 게 우스웠다.
강태호가 운동장 쪽으로 걸어가는 뒷모습을 나는 한참 지켜보았다.
걸음걸이마저 예전과 달랐다. 어깨를 좌우로 크게 흔들며 걷는 게, 마치 누구든 덤벼보라는 것처럼 보였다.
그날 오후, 나는 교실 창가에 앉아 운동장을 내려다보았다.
강태호가 다른 5학년 애들 여럿과 함께 축구공을 차고 있었다. 그 무리 속에서 웃음소리가 크게 터졌다.
무리는 다섯 명쯤 되어 보였다. 다들 강태호와 비슷하게 몸집이 좋은 애들이었다.
한서연이 내 옆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무슨 일 있었어?"
한서연 손에는 아직 뜯지 않은 딸기우유가 들려 있었다.
"아니." 나는 짧게 대답했다.
"표정이 왜 그래." 한서연이 다시 물었다.
"그냥, 화단 정리하다가 좀 힘들어서." 나는 둘러댔다.
한서연은 더 캐묻지 않고 딸기우유 빨대를 꽂았다.
그러나 손끝은 여전히 저릿하게 울리고 있었다.
'저 자식, 방학 동안 뭔가 달라졌다.'
나는 창밖의 강태호를 바라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축구공이 골대 옆 화단 쪽으로 굴러갔다. 강태호가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발로 공을 냅다 걷어찼다.
공은 화단을 그대로 가로지르며 아직 물이 마르지 않은 흙을 사방으로 튀겼다.
내가 오전에 물을 준 자리였다.
무언가 커다란 것이 다시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