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그로부터 두 달 후, 5월.
학교가 끝나고 준서네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그날은 준서가 학원을 빼먹고 나랑 놀이터에서 놀기로 한 날이었다.
골목 어귀에 핀 라일락 냄새가 유독 진하게 풍겼던 걸로 기억한다.
준서네 집은 우리 집에서 걸어서 십 분쯤 걸리는 다세대주택이었다.
2층짜리 낡은 건물에 페인트가 벗겨진 대문이 있었고, 그 옆에는 준서 아버지가 타고 다니는 오래된 그랜저가 항상 삐딱하게 주차되어 있었다.
그날도 그랜저는 그 자리에 있었다.
'아빠 계신가 보네.' 나는 잠깐 망설였다.
준서 아버지를 마주치는 게 그렇게 편하지는 않았다.
말수가 적고, 눈빛이 늘 날카로운 사람이었다.
그래도 준서와 약속을 했으니 그냥 돌아갈 수는 없었다.
대문 앞에 서서 초인종을 누르려던 참이었다.
쨍그랑, 하고 유리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서 뭔가 무거운 것이 쓰러지는 듯한 둔탁한 소리도 났다.
나는 손가락을 초인종 위에서 멈췄다.
'뭐지?'
가슴 한쪽이 조여드는 느낌이었다.
대문을 살짝 밀어보니 잠겨 있지 않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현관에서 신발도 벗지 못한 채 거실 쪽을 살폈다.
거실 바닥에는 소주병 조각이 흩어져 있었다.
준서 아버지가 그 옆에 서서 손에 또 다른 술병을 들고 있었다.
셔츠는 반쯤 풀어헤쳐져 있었고,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식탁 위에는 성적표로 보이는 종이 한 장이 구겨진 채 놓여 있었다.
"이 새끼가 성적을 이 따위로 받아와?!" 아버지가 소리쳤다.
목소리가 벽을 타고 울릴 정도로 컸다.
짝!
손바닥이 준서의 뺨을 후려쳤다.
"으어어엉..." 준서가 바닥에 주저앉으며 울었다.
준서의 왼쪽 뺨이 순식간에 붉게 부어올랐다.
나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발이 땅에 붙은 것처럼 움직여지지 않았다.
준서 어머니는 부엌 구석에서 손으로 입을 막은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앞치마를 두른 채로 그저 눈물만 뚝뚝 흘리고 있었다.
"아빠, 그만해요!" 준서가 팔로 얼굴을 가리며 소리쳤다.
"그만하라고?" 아버지가 다시 손을 치켜들었다.
찰싹!
두 번째 손찌검이 준서의 어깨를 스쳤다.
준서가 몸을 웅크리며 더 크게 울었다.
그 순간 내 오른손 검지와 중지에서 빛이 터져 나왔다.
손끝이 뜨거워지는 느낌과 동시에, 온몸의 피가 손가락 끝으로 몰리는 것 같았다.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그만하세요!"
손끝에서 뻗어 나온 빛이 아버지의 손목을 스치듯 지나갔다.
뜨겁지는 않았지만, 아버지는 흠칫 놀라며 손을 멈췄다.
들고 있던 술병이 손에서 미끄러져 바닥에 떨어졌다.
퍽 소리와 함께 술병이 굴러갔다.
"뭐야, 이 꼬맹이는." 아버지가 나를 노려보며 물었다.
눈빛이 술기운 때문인지 흐릿했지만, 그 안에는 분명한 분노가 있었다.
"준서 친구예요." 내가 대답했다.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다리가 떨렸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손끝의 빛은 여전히 은은하게 남아 있었다.
"당장 나가!" 아버지가 소리쳤다.
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발끝에 힘을 주고 버텼다.
"경찰 부를 거예요." 내가 말했다.
그건 거짓말이었다.
나는 그때 경찰서 전화번호도 몰랐다.
112를 누르면 된다는 것조차 확실하게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 말이 통했는지, 아버지는 잠시 나를 노려보다가 술병을 바닥에 내려놓고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방문이 쾅! 하고 닫혔다.
집 전체가 울릴 만큼 큰 소리였다.
거실에는 정적이 내려앉았다.
깨진 유리 조각이 형광등 불빛을 받아 반짝였다.
준서는 여전히 바닥에 주저앉아 울고 있었다.
준서 어머니가 그제야 부엌에서 나와 준서 곁에 다가왔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준서의 등을 쓸어줄 뿐이었다.
나는 준서 옆에 앉아 등을 쓸어주었다.
손바닥에 닿는 준서의 등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괜찮아." 내가 말했다.
"괜찮긴 뭐가 괜찮아." 준서가 흐느끼며 말했다.
"매번 이래.
성적표 나올 때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대신 준서의 손을 꽉 잡았다.
준서의 손은 땀으로 축축했다.
잠시 후, 거실이 조금 진정되고 나서였다.
준서 어머니는 조용히 부엌으로 가서 깨진 유리조각을 치우기 시작했다.
빗자루질 소리만이 거실을 채웠다.
준서가 내 손끝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아까 그거... 빛났던 거, 뭐야?"
나는 잠시 망설였다.
이걸 말해도 되는 건지, 할아버지가 늘 말하던 것들이 떠올랐다.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된다'는 그 말.
하지만 준서라면 말해도 될 것 같았다.
지금 이 순간, 준서를 지켜준 게 바로 그 빛이었으니까.
"별력이래. 할아버지가 그렇게 불렀어." 내가 대답했다.
"별력?" 준서가 눈을 크게 떴다.
붉게 부은 뺨 위로 눈물 자국이 선명했다.
"화나거나 집중하면 이렇게 돼.
손이 아플 때도 있고."
"멋있다." 준서가 눈물을 닦으며 웃었다.
울다가 웃는 얼굴이 조금 우스꽝스러웠다.
"멋있는 거 아니야.
이거 때문에 애들이 이상하게 볼까 봐 숨기고 다녀." 내가 말했다.
"나는 안 그럴 거야." 준서가 단호하게 말했다.
"약속해." 준서가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나는 손가락을 걸었다.
작은 손가락 두 개가 얽히는 순간, 마음 한구석이 조금 놓였다.
그날 이후 준서는 내 별력에 대해 아는 유일한 친구가 되었다.
며칠이 지나도록 나는 그날 일이 계속 떠올랐다.
준서 아버지의 벌건 얼굴과, 바닥에 흩어진 유리 조각과, 준서 어머니의 떨리던 손.
그 모든 장면이 눈을 감아도 사라지지 않았다.
일주일 후, 준서 어머니는 학교에 상담을 요청했다고 했다.
담임 선생님이 조회 시간에 준서를 따로 불러 몇 마디 나누는 모습을 나는 창밖에서 지켜보았다.
준서는 그날 오후 내게 살짝 웃어 보였다.
"엄마가 학교에 얘기했대." 준서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진짜?" 내가 물었다.
"응. 상담 선생님도 온대."
그 뒤로 준서 아버지의 손찌검은 눈에 띄게 줄었다.
준서의 얼굴에 멍이 드는 일도 뜸해졌다.
하지만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다.
가끔 준서가 소매로 팔을 가리는 모습을 나는 몇 번 더 보았다.
그럴 때마다 물어보고 싶었지만, 준서가 먼저 말을 꺼내지 않으면 나도 묻지 않았다.
나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준서가 웃는 얼굴로 학교에 나오는 것만으로 마음을 놓았다.
'적어도 지금은 괜찮으니까.'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그 믿음이, 나중에 얼마나 얕은 것이었는지는 아직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