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목이 잘리기 직전에 드는 생각이 뭘 것 같냐고 누가 물어본다면, 나는 진지하게 대답할 수 있다. 아무 생각도 안 든다.
머릿속이 하얗다는 표현은 거짓말이다. 하얀 것도 뭔가 남아 있다는 뜻인데, 나는 그냥 텅 비어 있었다. 광장을 가득 채운 사람들의 함성도, 처형대 위로 올라오는 나무 계단의 삐걱거림도, 전부 아주 먼 곳에서 들려오는 소리 같았다. 발밑에서 나무 계단이 눌릴 때마다 삐걱, 삐걱, 소리가 났는데 그게 이상하게 리듬감 있게 들려서 속으로 박자를 세고 있었다. 나 지금 죽으러 가는 거 맞나. 이렇게 딴생각을 하면서 죽어도 되는 건가.
"독초로 왕실을 시해하려 한 죄인 이서윤."
집행관의 목소리가 낭독을 시작했을 때 나는 웃었다. 진짜로 웃었다. 이 상황에서 웃음이 나온다는 게 스스로도 신기했지만, 억울함이 극에 달하면 오히려 그렇게 되는 모양이었다. 옆에서 누가 봤으면 미친 여자라고 했을 거다. 아니, 뭐, 지금 상황에서 미친 여자가 아니라고 할 수도 없었지만.
독초라니. 나는 그 풀들의 이름 하나도 몰랐다. 애초에 내가 배운 마법은 그런 게 아니었다. 뿌리를 뻗고, 잎을 펼치고, 시든 것을 살리는 마법이었다. 사람을 죽이는 것과는 정반대의 자리에 있는 마법. 나는 화단에 물 주는 마법사였다. 살인마가 아니라.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됐을까.
광장 맨 앞줄에 서 있는 사람이 보였다. 금발에 벽안, 선우. 내 혼약자였던 남자. 그는 팔짱을 낀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 눈에는 슬픔이나 죄책감 같은 건 한 조각도 없었다. 그냥 지루한 걸 보는 눈이었다. 마치 방금 산 게임이 별로 재미없어서 끄기 직전의 표정 같기도 했다.
와.
나는 그 순간에도 그 눈빛에 감탄했다.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까지 깨끗하게 무관심할 수 있지. 저 정도면 예술이다. 죽어가는 사람 앞에서 저런 표정을 짓는 것도 재능이라면 재능이었다.
집행관이 도끼를 들었다. 나는 눈을 감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뭘 보고 죽을지는 내가 선택하고 싶었다. 그래서 하늘을 봤다. 구름 한 점 없는, 지긋지긋하게 맑은 하늘이었다. 소풍 가기 딱 좋은 날씨였는데, 나는 소풍 대신 목이 잘리러 왔다.
날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다음은 어둠이었다. 어둠이라고 부르기엔 애매한, 그냥 아무것도 없는 상태. 시간이 흐른다는 느낌조차 없었다. 나는 그게 죽음이구나, 생각했다. 별다른 감상도 없이 그저 그렇게 인정했다. 억울함도, 두려움도, 슬픔도 그 어둠 속에서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그런데 눈이 떠졌다.
천장이 보였다. 낯선 천장이었다. 나무 무늬가 소용돌이처럼 새겨진 오래된 목재 천장. 시선을 옆으로 돌리려는데, 몸이 이상하게 무거웠다. 아니, 가벼웠다. 팔을 들어보려고 했는데 그 팔이 너무 작았다.
작다는 정도가 아니었다. 손가락이 통통했다. 손톱이 반투명하고 부드러웠다. 어른의 손이 아니었다. 손등에 잡히는 살도, 손목의 굵기도, 전부 내가 알던 내 몸이 아니었다.
나는 몸을 일으켰다. 아니, 일으키려고 했는데 발이 미끄러졌다. 균형을 잃고 침대 위에 다시 주저앉았다. 20대 후반의 몸으로 20년 넘게 살아온 감각이 있는데, 몸은 그 감각을 하나도 받아주지 않았다. 팔다리가 내 말을 안 들었다. 마치 남의 몸을 조종하는 게임 컨트롤러를 처음 쥔 느낌이었다. 그것도 렉이 심하게 걸린 컨트롤러.
방 한쪽에 놓인 화장대로 기어가듯 다가갔다. 무릎으로 바닥을 짚고, 침대 기둥을 붙잡고, 그렇게 몇 걸음을 겨우 옮겼다. 이게 이렇게 힘든 일이었나. 다섯 살짜리들은 다 이렇게 사는 건가. 존경스러웠다.
거울에 비친 얼굴을 봤을 때 나는 잠깐 숨을 멈췄다.
다섯 살짜리 아이가 거기 있었다.
검은 머리, 동그란 눈, 뺨에 아직 젖살이 남아 있는 작은 얼굴. 처형대 위에서 봤던 내 마지막 얼굴과는 완전히 다른, 그러나 분명히 나였다. 이서윤. 청하 후작가의 장녀.
이건 뭐지.
죽었는데, 살아있다. 그것도 어른이 아니라 다섯 살짜리로. 이게 무슨 랜덤박스야. 죽었다 눈 떠보니 유아기라니, 이런 뽑기는 대체 누가 설계한 건지 따지고 싶었다.
나는 거울 속 그 작은 얼굴을 오랫동안 들여다봤다. 웃음이 나올 상황도 아니었는데, 입가가 저절로 실룩거렸다. 이게 회귀라는 건가. 아니면 다시 태어난 건가.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중요한 건 하나였다.
나는 처형대 위에서 죽었던 그 기억을, 전부 갖고 있다는 것.
선우의 무관심한 눈빛도, 아버지의 격노한 얼굴도, 어머니의 침묵도, 스승이라고 믿었던 사람의 마지막 눈물까지도. 다 기억하고 있다. 그날 광장에 모였던 사람들의 얼굴 하나하나까지도, 지금 이 순간에는 이상하게 선명했다.
그리고 그 모든 기억 속에서 내가 얻은 결론은 단 하나였다.
다시는, 누구도 믿지 않는다.
믿어서 좋았던 게 뭐가 있었나. 믿었던 사람들에게 돌아온 게 뭐였나. 배신, 무관심, 침묵. 그게 다였다. 그러니 이번엔 다르게 살아야 한다. 누구도 믿지 않고, 누구에게도 마음을 주지 않고, 그렇게.
그때 방문이 벌컥 열렸다.
"아가씨, 일어나셨어요?"
라벤더색 머리를 틀어 올린 젊은 여자가 들어오며 물었다. 나는 그 얼굴을 보는 순간 심장이 이상하게 뛰었다. 박순희. 전생에서 유일하게 나를 배신하지 않았던 사람.
지금은 그저 담당 유모일 뿐이지만.
그녀는 문을 열고 들어오다가 내가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걸 보고 화들짝 놀란 얼굴로 뛰어왔다.
"아가씨! 왜 바닥에 계세요, 침대에서 떨어지신 거예요?"
"아니." 나는 최대한 태연하게 대답했다. 다섯 살짜리 목소리가 너무 얇고 가늘게 나와서 스스로도 어색했지만. "그냥, 좀 걷고 싶어서."
말이 되는 소리인지 모르겠지만 박순희는 별 의심 없이 나를 안아 올려 다시 침대에 눕혔다. 품에 안기는 순간 낯익은 냄새가 났다. 라벤더 향. 전생에도 이 사람은 항상 이 냄새가 났다.
박순희는 내 이마를 짚어보더니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열은 없으시네요. 다행이에요, 아가씨. 며칠 앓으셨거든요.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요."
앓았다고. 그럼 이 몸의 원래 이서윤도 어딘가에서 죽을 뻔했다는 뜻인가. 아니면 그냥 내가 이 안에 들어오는 과정에서 몸이 그런 반응을 보인 걸까. 몸이 새 주인을 받아들이는 데도 부작용이 있는 걸까. 알 수 없는 것투성이였다. 확실한 건 하나뿐이었다.
나는 다시 살고 있다. 그리고 이번엔 절대로, 예전처럼 살지 않을 것이다.
박순희가 방을 나가고 나서야 나는 다시 창가로 눈을 돌렸다. 창밖으로 보이는 후작가의 정원이 눈에 들어왔다. 잘 다듬어진 나무들, 붉은 장미, 그 사이를 오가는 하인들. 겉보기엔 완벽하게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바람이 불면 장미 향이 여기까지 날아올 것 같은, 그런 그림 같은 풍경.
하지만 나는 안다. 이 담장 안에서 나를 기다리는 게 뭔지.
아버지의 냉담한 무관심. 어머니의 방관. 그리고 언젠가 나타날, 나를 결국 죽음으로 몰아넣을 그 남자. 지금은 어딘가에서 다섯 살, 혹은 일곱 살, 혹은 더 어린 모습으로 태평하게 살고 있을 선우.
다섯 살짜리 몸으로, 스물여덟 해를 살고 처형까지 당했던 기억을 품은 채, 나는 다시 이 지긋지긋한 가족들 사이에서 살아가야 한다.
좋아. 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