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스승님, 이번엔 안 속아요

3화

검사관은 백발의 노인이었다. 은빛 지팡이를 짚고 응접실 중앙에 서서 나를 내려다보던 그 눈빛을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호기심과 기대가 섞인 눈빛. 후작가의 장녀라면 뭔가 대단한 적성을 가졌을 거라는 지레짐작이 그 안에 있었다. 은테 안경 너머로 나를 훑어보는 시선에는 이미 결론이 나 있는 것 같았다. 화염 마법이나 뇌전 마법, 아니면 최소한 물이나 얼음 정도는 나오겠거니 하는 그런 기대. 웃겼다. 나도 예전엔 그런 기대를 받았던 적이 있었으니까. 전생에서의 일이었다. 이제는 가물가물하다. "손을 이 위에 올려보시겠습니까, 아가씨." 그가 유리로 된 원형 판을 내밀며 말했다. 판은 응접실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을 받아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저런 걸 만드는 데 마정석이 몇 개나 들어갔을까, 라는 생각이 잠깐 스쳤다. 다섯 살짜리 머릿속에 떠오를 생각은 아니었지만 어쩌겠나. 몸만 다섯 살이지 머릿속은 이미 몇백 년 묵은 골동품이었으니까. 나는 그 판 위에 손을 올렸다. 손바닥 아래에서 뭔가가 미세하게 진동하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휴대폰 진동 모드처럼, 은근하고 규칙적인 울림이었다. 판이 색을 바꾸기 시작했다. 처음엔 하얀빛, 그다음엔 흐릿한 초록빛. 그 초록빛이 점점 진해지더니, 마침내 선명한 초록으로 고정됐다. 응접실이 조용해졌다. 너무 조용해서 벽시계 초침 소리가 다 들릴 정도였다. 째깍, 째깍. 그 소리가 유난히 크게 느껴졌다. 검사관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실망이라고 부르기도 애매하고, 그냥 당황이라고 부르는 게 맞을 그런 표정. 그는 판을 다시 들여다보고, 지팡이 끝으로 톡톡 두드려보고, 그러다 결국 안경을 벗어 닦기까지 했다. 확인할 게 없는데도 확인하는 척, 그런 어른들 특유의 시간 끌기. "풀 마법이군요." 그의 목소리가 응접실에 떨어지는 순간, 나는 아버지의 얼굴을 봤다. 그 얼굴이 굳어지는 걸, 나는 정확히 지켜봤다. 굳어지는 정도가 아니었다. 표정 자체가 사라졌다. 사람 얼굴에서 표정이 지워지면 저런 모습이 되는구나, 하고 새삼 감탄할 정도로. "다시 확인해보시오." 아버지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검사관은 판을 다시 조작했지만 결과는 똑같았다. 초록빛. 흔들림 없는 초록빛. 세 번째로 확인했을 때는 옆에 서 있던 시녀 하나가 작게 한숨을 내쉬는 소리까지 들렸다. "오차는 없습니다, 후작님. 이서윤 아가씨의 적성은 풀 마법입니다."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나를 바라봤다. 그 눈빛에서 나는 낯익은 감정을 읽었다. 전생에서 수백 번도 더 봤던 그 눈빛. 경멸. 이상한 건, 그 눈빛을 봐도 아무렇지 않았다는 거다. 마음이 철렁하거나 서럽거나 하지 않았다. 그냥, 그럴 줄 알았어, 하는 정도의 반응이었다. 몇 번을 죽고 살아나다 보면 이런 것에도 무뎌지는 모양이다. "부인." 아버지가 어머니를 불렀다. 어머니는 그 부름에 몸을 살짝 떨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해보시오." "저는... 저도 모릅니다, 여보." "우리 가문에 풀 마법 적성자가 나온 적이 있었소? 당신 쪽 가문에는?" 어머니의 낯빛이 하얗게 변했다. 아버지가 지금 무슨 말을 하려는지,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전생에서 똑같이 겪은 대사였으니까. 대본이라도 있는 건가 싶을 정도로 정확하게 겹쳤다. "당신 정말 나한테 숨기는 게 있는 건 아니겠지." 아. 이거였구나. 딸의 적성이 마음에 들지 않으니, 아내의 부정을 의심하는 것. 얼마나 저열한 논리인지, 몇 번을 다시 봐도 어이가 없었다. 자기 핏줄에서 나온 결과가 마음에 안 든다고 상대방 핏줄을 의심하는 그 발상 자체가 이미 파산 상태였다. "여보, 그런 말씀은..." "닥치시오." 아버지의 목소리가 응접실을 울렸다. 하인들이 일제히 시선을 내렸다. 검사관도 어쩔 줄 몰라 하며 지팡이를 만지작거렸다. 저 노인, 이 집안 분위기를 어디까지 예상했을까. 아마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을 거다. 후작가라면 적어도 겉으로는 품위를 지킬 거라고 기대했을 텐데. 나는 그 순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섯 살짜리가 뭘 할 수 있겠나. 그저 이 상황을 관망하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관망이라는 말이 우습긴 하다. 다섯 살 몸으로 어른들 싸움을 구경하는 게 무슨 대단한 전략인 것처럼 들리니까. 그냥 가만히 서서, 눈만 굴리며 상황을 지켜봤다는 게 정확한 표현이겠다. 결국 그날 이후, 나는 저택 별채로 옮겨졌다. 본채에서 멀리 떨어진, 원래는 창고로 쓰이던 건물이었다. 창문이 작고 볕이 잘 들지 않는 방. 아버지는 나를 직접 그곳으로 보내라고 명령했고, 어머니는 그 명령에 아무런 반대도 하지 않았다. 짐이라고 부를 것도 별로 없었다. 옷 몇 벌, 인형 하나, 그리고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잡동사니들. 그걸 상자 하나에 다 담아 옮기는 데 시간도 오래 걸리지 않았다. 박순희가 짐을 옮기며 눈물을 훔치는 걸 봤다. 그녀는 화가 나 있었지만 그 화를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하인이니까. 상자를 옮기는 손끝이 유난히 떨렸고, 몇 번이나 발걸음을 멈춰 눈가를 훔쳤다. "아가씨, 여기가... 좀 좁긴 하지만." 그녀가 애써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방 안을 둘러봤다. 낡은 침대 하나, 작은 책상, 그리고 먼지가 쌓인 선반들. 벽 한쪽에는 곰팡이 자국이 지도처럼 퍼져 있었고, 바닥은 밟을 때마다 삐걱거렸다. "괜찮아요." 나는 정말 괜찮았다. 이 정도는 전생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적어도 여긴 처형대가 아니었으니까. 처형대와 창고 딸린 별채를 비교하는 것 자체가 이미 내 삶이 얼마나 험난했는지를 증명하는 것 같아서 조금 웃겼다. 박순희는 내 대답이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나를 몇 번이나 돌아보다가, 결국 방을 나갔다. 그날 밤, 나는 그 좁은 침대에 누워 천장을 봤다. 낡은 나무 천장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벌레들이 기어다니는 소리도 함께. 어딘가에서 쥐가 뭔가를 갉아먹는 소리까지 들렸는데, 그것마저도 이상하게 정겨웠다.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했다. 이 상황이 오히려 나를 자유롭게 만든다는 걸 그때 깨달았다. 본채에 있었다면 아버지의 시선을 계속 신경 써야 했을 것이다. 식사 시간마다 눈치를 봐야 했을 거고, 지나가는 하인들의 수군거림도 견뎌야 했을 거다. 하지만 여기, 이 별채에서는 아무도 나를 신경 쓰지 않는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건, 아무도 나를 감시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했다. 나는 손바닥을 펼쳤다. 어젯밤과 같은 초록빛이 미세하게 피어올랐다. 손끝에서 작은 이파리 모양의 빛이 맺혔다가 사라지는 걸 몇 번이나 반복해서 봤다. 신기하지도 않았다. 이미 다 알고 있는 재주였으니까. 전생에서 배운 마법 지식들을 하나씩 떠올렸다. 풀 마법의 기초, 독초의 성질, 그리고 그것들을 다루는 법. 어떤 풀은 사람을 재우고, 어떤 풀은 사람을 죽이고, 또 어떤 풀은 죽어가는 사람을 살린다. 그 모든 지식이 지금 이 다섯 살짜리 몸속에 고스란히 잠들어 있었다. 이번 생에는 이 마법을 조롱거리로 남겨두지 않을 것이다. 창밖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나는 재빨리 마법을 거두고 몸을 숨겼다. 누군가 방문 앞을 지나가는 소리였다. 잠시 뒤 그 발소리가 멈췄다. 방문 틈새로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누군가 그 앞에 서 있었다.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