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정신을 차리고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이거 꿈이겠지, 였다. 과로로 쓰러진 사람이 이런 초록빛 숲 한가운데서 눈을 뜬다는 게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됐으니까. 나는 손등을 세게 꼬집어봤는데, 아프긴 정말 아팠고 그 통증이 이상하게 생생해서 오히려 더 겁이 났다. 꿈이면 아프지 말아야 하는 거 아닌가. 논리가 자꾸 뒤틀렸다.
혹시 뇌가 만들어낸 환각인가 싶어서 이번엔 뺨을 두 손으로 짝, 소리 나게 때려봤다. 여전히 아팠다. 통증의 질감이 달랐으면 그나마 위안이 됐을 텐데, 손바닥이 얼얼한 감각까지 지극히 현실적이어서 더 미쳐버릴 것 같았다. 그다음엔 숨을 크게 들이마셔봤다. 폐 속으로 들어오는 공기가 서늘하면서도 달큰한 냄새를 품고 있었는데, 이건 또 무슨 냄새인가, 서울 공기에서는 절대 나지 않던 향이었다. 흙냄새와 비슷하면서도 뭔가 더 청량한, 마치 숲 전체가 방향제를 뿌려놓은 것 같은 냄새.
주변을 둘러보니 나무들은 내가 아는 어떤 나무와도 닮지 않았는데, 줄기가 은은하게 푸른빛을 띠는 게 마치 조명을 켜놓은 것 같았고 바람이 불 때마다 잎사귀들이 종소리 비슷한 소리를 냈다. 이런 걸 판타지 소설에서나 보던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스치는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설마, 진짜로 그런 세계에 떨어진 건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나무 하나에 손을 대봤다. 표면은 차가웠고, 만지는 순간 손끝에서 미세한 진동이 느껴졌다. 이게 착시가 아니라면 이 나무는 정말로 살아 숨 쉬고 있다는 뜻이었는데, 그렇다면 이 세계의 식물조차 내가 알던 상식을 배반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손을 떼자 진동도 함께 사라졌다. 나는 그 자리에 멍하니 서서, 이게 정말 벌어지고 있는 일이라는 걸 받아들이기까지 몇 초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이미 회사에서 읽었던 웹소설 몇 편의 클리셰를 머릿속에서 자동으로 재생하고 있었다. 이세계 전이라는 게 실제로 벌어지면 다들 마법을 쓰거나 최소한 회귀자 지식으로 뭔가를 해내던데, 나는 지금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회귀는커녕 전이 원인조차 짐작이 안 갔다. 그냥 지하철역 계단에서 정신을 잃었는데 눈을 뜨니 숲이라니, 이건 인과관계가 아니라 그냥 재난이었다.
혹시 몸에 무슨 표식이라도 생겼나 싶어서 팔을 걷어보고 옷을 뒤적여봤는데, 아무것도 없었다. 특별한 힘도, 안내창도, 시스템 알림음도 없었다. 그냥 평범한 회사원의 몸에, 평범한 회사원의 옷차림 그대로였다. 이럴 거면 대체 나를 왜 데려온 건가. 아니, 데려온 게 아니라 그냥 떨어진 건가. 누가 데려왔다는 증거도 없었다. 그저 재난처럼, 아무 설명 없이 떨어진 거였다.
돌이켜보면 그날 야근이 특별히 이상했던 건 아니었다. 늘 그렇듯 상사가 던져준 일을 밤새 처리했고, 늘 그렇듯 몸은 한계에 다다랐고, 늘 그렇듯 아무도 그 상태를 걱정해주지 않았다. 이런 삶을 삼 년쯤 반복하다 보니 나는 어느 순간부터 내 몸이 신호를 보내도 무시하는 버릇이 생겼는데, 어깨가 굳고 눈이 시리고 손끝이 저려도 그냥 카페인으로 덮어버리곤 했다. 그러니까 이번에도 그런 신호였을 뿐인데, 세상이 나를 그냥 병원으로 보내지 않고 여기로 던져버린 거였다.
생각해보면 억울했다. 병원이었다면 최소한 링거 한 대라도 맞았을 텐데, 여기는 그런 배려조차 없는 곳이었다. 몸이 보내는 경고를 무시한 대가로 죽을 수도 있었던 인간에게, 세상은 죽음 대신 미지의 숲을 선물한 셈이었다. 이게 보상인지 벌인지 판단이 안 됐다. 다만 확실한 건, 이 숲에는 회사도 없고 상사도 없다는 것뿐이었는데 그 사실 하나만큼은 이상하게도 위안이 됐다. 잠깐이지만.
그런 자기연민에 잠겨 있을 때, 저 멀리서 뭔가 터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쾅, 하는 굉음이었고 뒤이어 땅이 흔들렸다.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낮췄는데, 이게 지진인가 싶다가도 곧 그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지진이었다면 이렇게 한 방향에서만 소리가 터지지 않았을 테니까. 소리의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자 숲 사이로 붉은 섬광이 번쩍였고, 그 섬광이 사그라지기 전에 뭔가 거대한 형체가 하늘로 솟구쳤다.
그 형체는, 용이었다.
말 그대로 용이었다. 검은 비늘이 불빛을 받아 번들거렸고, 날개를 펼치는 순간 나무 여러 그루가 그 바람만으로 휘청거렸으며, 입을 벌릴 때마다 목구멍 안쪽에서 붉은 화염이 넘실거렸다. 나는 그 순간까지도 이게 홀로그램이나 특수효과 같은 거 아닌가 하는 헛된 기대를 품었는데, 용이 포효하자 그 소리가 내 흉곽을 그대로 흔들어놓는 걸 느끼면서 그 기대는 완전히 무너졌다. 저건 진짜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두방망이질이라는 표현이 이럴 때 쓰는 거구나, 하고 이상하게 냉정한 생각까지 들었다. 손끝이 떨렸고 등에서는 식은땀이 흘러내렸는데, 이 와중에도 머리 한구석에서는 이거 사진 찍어놓으면 회사에서 다들 안 믿겠다, 라는 실없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사람이 극한 상황에 몰리면 오히려 엉뚱한 생각을 하게 되는 모양이었다. 아니면 그냥 내가 원래 정신이 좀 이상한 걸지도.
그리고 그 용과 맞서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금빛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렸고, 갑옷 표면에는 크고 작은 상처가 나 있었으며, 검을 쥔 손에는 이미 힘이 빠져가는 게 멀리서도 보였다. 그는 몇 번이나 검을 휘둘렀지만 용의 비늘에 튕겨 나갔고, 그럴 때마다 뒤로 몇 걸음씩 밀려났다. 저 사람, 지금 지고 있잖아. 나는 숨을 죽이고 그 광경을 지켜보면서, 이게 내가 알던 세계와는 완전히 다른 규칙으로 돌아간다는 걸 뼈저리게 깨달았다.
거리가 있어서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체구나 움직임으로 봐서는 남자였다. 갑옷을 입은 그 남자는 용의 발톱이 스치기 직전에 몸을 굴려 피했는데, 그 동작 하나만으로도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게 느껴졌다. 나 같으면 저런 몸놀림은 상상도 못 했을 텐데, 저 사람은 이 상황에서도 최소한의 반사신경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밀리고 있다는 게 문제였다. 저 정도로 잘 싸우는 사람조차 밀린다면, 이 용은 대체 얼마나 강한 존재인가.
한 사람이 저 정도 크기의 용을 상대로 검 한 자루 들고 싸운다는 것 자체가, 이 세계에서는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이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축에 속하는 장면 한가운데에 떨어진 셈이었다. 하필이면, 정말 하필이면.
용의 발톱이 땅을 긁을 때마다 흙과 돌이 튀어 올랐고, 그 파편 중 몇 개는 내가 숨어 있는 방향으로도 날아왔다. 나는 몸을 더 낮추고 나무 뒤로 바싹 붙었는데, 심장 소리가 너무 커서 저 용에게 들리는 게 아닐까 하는 비현실적인 걱정까지 들었다.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걱정인 걸 알면서도, 상황이 상황인지라 그런 걱정조차 진지하게 하게 됐다.
숨소리조차 조심스러워졌다. 저 용이 나를 발견하면 어떻게 될까, 하는 질문이 떠오르자마자 답은 바로 나왔다. 죽는다. 그냥 그거였다. 회사에서 야근하다 과로로 죽는 것과, 이세계에서 용에게 밟혀 죽는 것 중 어느 쪽이 덜 억울한 죽음인지 잠깐 진지하게 고민했는데, 그 고민을 하는 것조차 지금 상황에서는 사치라는 걸 깨닫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 순간 남자가 다시 검을 크게 휘둘렀고, 용은 그걸 가볍게 튕겨내며 앞발로 그를 후려쳤다. 남자의 몸이 붕 떠올랐다가 땅에 세게 떨어졌다. 나는 그 광경을 보며 나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저 사람 죽는 거 아닌가. 죽으면 어떡하지. 아니, 그보다 저 사람이 죽으면 저 용이 다음으로 눈독 들일 대상은 누구겠는가. 이 숲에 살아 숨 쉬는 존재가 지금 나 하나뿐이라면.
답은 너무 뻔했다. 도망쳐야 했다. 그런데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이게 그 유명한, 너무 무서우면 몸이 굳는다는 그 현상인가. 이런 걸 직접 겪어보니 확실히 알겠다, 인간의 몸은 극한의 공포 앞에서 생각보다 훨씬 무력하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