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얼떨결에 구국의 성녀라니

4화

손끝에 닿은 건 놀랍게도 용의 꼬리였다. 정확히는 남자를 향해 휘둘러지던 그 거대한 꼬리의 끝부분이었는데, 나는 왜 그 순간 그걸 붙잡으려 했는지 지금도 설명할 수가 없다. 그냥 뭐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고, 몸이 이성보다 먼저 움직인 결과였다. 나중에 돌이켜보면 진짜 미친 짓이었다. 저게 사람 하나를 순식간에 재로 만들어버릴 수 있는 존재였는데, 그 앞에서 손을 뻗는다는 게 정상적인 사고로 나올 수 있는 행동인가. 아니, 절대 아니다. 근데 손이 먼저 나갔다. 뇌가 명령을 내리기도 전에 손끝이 이미 허공을 가르고 있었으니, 이건 반사인지 본능인지 아니면 그냥 정신이 나간 건지 나조차도 헷갈렸다. 손바닥에 닿는 감촉은 뜨겁고 거칠었으며, 마치 화산암을 만지는 것 같았다. 살갗이 익는 줄 알았다. 실제로 익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상하게 아프다는 감각보다 먼저 온 건 그 표면의 진동이었다. 심장 박동 같은 게 손바닥을 타고 전해져 왔는데, 그게 내 심장 소리인지 용의 심장 소리인지조차 구분이 안 됐다. 그 순간, 세상이 잠깐 조용해졌다. 거짓말처럼 조용했다. 방금까지 산을 뒤흔들던 포효도, 갑옷이 부서지는 소리도, 남자의 비명도 전부 뚝 끊긴 것처럼 사라졌다. 나는 그 침묵 속에서 내 숨소리만 크게 울리는 걸 들었다. 이게 뭐야, 나 죽은 건가? 죽으면 이렇게 조용한 건가? 용의 거대한 몸에서 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는데, 그 빛은 마치 물이 빠지는 것처럼 몸의 표면을 타고 흘러내렸다. 검은 비늘 사이사이로 은백색 빛줄기가 스며 나와서, 마치 몸속에 갇혀 있던 뭔가가 빠져나가는 것처럼 흘렀다. 나는 그게 무슨 마법의 부작용이거나 저주 같은 건가 싶어서 손을 떼려 했지만, 이미 그 빛은 내 손을 통해 뭔가를 빨아들이는 것처럼 흐르고 있어서 손이 떨어지지 않았다. 미친, 이게 무슨 상황이야. 손을 떼려고 팔에 힘을 줬는데도 마치 강력접착제로 붙여놓은 것처럼 꼼짝을 안 했다. 이거 나중에 손 잘라야 되는 거 아니야, 하는 생각이 진심으로 들 정도였다. 용의 울부짖음이 점점 작아졌다. 처음엔 산을 뒤흔들 정도였던 그 소리가, 마치 볼륨을 줄이듯 서서히 잦아들었고, 그와 동시에 그 거대한 몸이 눈에 보일 정도로 줄어들기 시작했다. 나는 그 광경을 눈앞에서 보면서도 믿을 수가 없었다. 이게 지금 실시간으로 벌어지는 일인가, 아니면 내가 충격으로 헛것을 보는 건가. 눈을 몇 번이나 깜빡였는데도 눈앞의 광경은 그대로였다. 용의 몸이 마치 바람 빠지는 풍선처럼 쪼그라들고 있었다. 산 하나를 태워버릴 것 같던 그 압도적인 크기가, 방금 전까지 나를 포함해서 이 세상 모든 걸 짓뭉갤 수 있을 것 같던 그 존재감이, 실시간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십 초쯤? 아니 이십 초쯤이었을까, 시간 감각이 완전히 뭉개진 채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중, 용은 어느 순간 완전히 작아져서 강아지 한 마리 정도 크기가 되어 있었다. 방금 전까지 산 하나를 통째로 태워버릴 것 같던 그 존재가, 지금은 내 발 앞에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비늘은 여전히 검었지만 이제는 위협적이라기보다 반짝반짝한 장식품처럼 보였다. 특히 눈. 그 눈은 방금까지 살육의 화신처럼 보였던 존재의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동그랗고 순진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뭐야, 이거. 나는 손을 떼고 뒷걸음질을 쳤는데, 그 작아진 용이 나를 따라 폴짝 몇 걸음 뛰어오더니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저 방금 전까지 사람을 죽이려 들던 놈이 지금 저러고 있다고? 나는 뒷걸음질을 치다가 발이 엉켜서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는데, 그 와중에도 용은 계속 따라오면서 짧은 다리로 폴짝폴짝거렸다. 마치 산책 나온 강아지 같았다. 몇 초 전까지 화염을 뿜던 입에서는 이제 작게 낑낑거리는 소리만 나왔다. 이해가 안 됐지만, 이해가 안 되는 건 이미 이 세계에 떨어진 순간부터 익숙해져야 할 감정이었다. 여기 온 뒤로 이해 안 되는 일이 벌써 몇 개째인지 세는 것도 지쳤다. 그때 뒤에서 무릎이 꺾이는 소리가 들렸다. 둔탁하면서도 축축한 소리, 갑옷이 흙바닥에 부딪히는 소리였다. 돌아보니 남자가 검을 지팡이처럼 짚고 서 있다가, 그대로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나는 반사적으로 그에게 달려갔는데, 가까이서 보니 상처가 생각보다 훨씬 심했다. 등쪽 갑옷은 완전히 뜯겨나가 있었고, 그 아래 살갗이 검붉게 물들어 있었다. 상처 주변으로 피가 흘러내려 흙바닥을 물들이고 있었는데, 그 색이 너무 선명해서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괜, 괜찮으세요?" 나는 최대한 침착한 척 물었지만 속으로는 씨발 이거 사람 죽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에 손이 벌벌 떨렸다. 상처를 어떻게 처치해야 하는지도 모르는데, 여기 응급실도 없고 119도 없다는 사실이 그 순간 새삼스럽게 무섭게 다가왔다. 나 진짜 이 사람 눈앞에서 죽는 거 보게 되는 거 아냐? 남자는 고개를 들어 나를 봤는데,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흔들리며 나를 응시했다. 가까이서 보니 얼굴이 지나치게 잘생겨서 이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잠깐 스쳤을 정도였다. 피 흘리며 죽어가는 와중에도 저 얼굴은 뭐 저렇게 반칙이지, 라는 생각을 하는 내가 정상은 아닌 것 같았지만, 사람이 극한 상황에 몰리면 이상한 데서 딴생각을 하기 마련이라는 걸 그 순간 새삼 깨달았다. "당신이... 방금 그것을..." 그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고 숨소리도 거칠었지만, 눈빛만은 이상하게 또렷했다. "전설급 마룡을... 그 자리에서 봉인하셨습니까." 봉인이라는 말에 나는 순간 멍해졌다. 봉인? 그게 지금 봉인이라는 거야? 나는 그냥 손을 뻗었을 뿐인데, 뭔가에 홀려서 몸이 먼저 움직인 것뿐인데, 저 사람은 그걸 지금 봉인이라고 표현하고 있었다. 그럼 방금 그 빛이 흐르던 게 마법 같은 거고, 내가 뭔가 능력을 쓴 거라는 뜻인가. 근데 나는 그런 거 배운 적도 없고, 이 세계 온 지 아직 며칠도 안 됐는데. "아, 그게... 저도 잘 모르겠는데요, 그냥..." 나는 말을 얼버무렸지만 그는 내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갑자기 무릎을 꿇었다. 앉아 있는 상태에서 그나마 남은 상체를 굽혀 완전히 예를 갖추는 모습이었는데, 등에서 피가 흐르는데도 그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으려는 게 눈에 보였다. 나는 그 순간 아 이거 뭔가 잘못됐다는 직감이 강하게 들었다. 저기요, 그거 하지 마세요, 상처 벌어져요,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는데 정작 나온 말은 없었다. "제7기사단장 선우결, 성녀님을 뵈옵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흔들림 없는 확신이 담겨 있었고, 나는 그 확신 앞에서 아니요 저 성녀 아니고 그냥 회사원인데요,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차마 뱉지 못했다. 그의 상처 입은 몸에서 배어 나오는 존경심이 너무 무거워서, 그걸 그 자리에서 부정하는 게 잔인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등이 저 지경인 사람 앞에서 아니라고 딱 잘라 말하면, 그 사람이 정신적으로 무너져버릴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뭔가 큰 걸 걸고 이 상황에 임하고 있는 사람에게, 그거 다 착각이에요 라고 말하는 게 과연 인간적으로 가능한 일인가. 작아진 용이 내 발치에서 낑낑거리며 꼬리를 흔들었고, 나는 그 두 존재 사이에서 완전히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서 있었다. 한쪽에는 목숨을 걸고 나에게 예를 갖추는 피투성이 기사가 있었고, 다른 한쪽에는 방금 전까지 재앙 그 자체였던 게 강아지처럼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이거 어떻게 수습해야 하는 거지. 아니, 수습이라는 말이 맞는 상황인가 싶을 정도로 이건 이미 내 능력 밖의 일이었다. "저, 일단... 그 몸을 좀 세워야..." 나는 어떻게든 상황을 정리해보려고 입을 열었는데, 선우결이라는 이름의 이 남자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등의 상처는 여전히 벌어져 피를 흘리고 있었고, 나는 그 피가 점점 더 넓게 퍼지는 걸 보면서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이 사람 여기서 이러다 진짜 죽는 거 아니야? 그 순간, 저 멀리서 뭔가 움직이는 기척이 느껴졌다. 나뭇잎이 스치는 소리, 그리고 뒤이어 여러 사람의 발소리. 나는 그 소리에 몸이 얼어붙었다. 설마, 또 뭔가 오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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