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얼떨결에 구국의 성녀라니

5화

선우결이라는 사람을 부축해서 겨우 자리를 옮긴 뒤, 나는 그가 응급처치를 받는 동안 계속 이 상황을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렸다. 성녀님이라니, 이거 진짜 아니라고 말해야 하는데, 라는 생각이 계속 들었지만 정작 입을 열 기회는 자꾸만 미뤄졌다. 붕대를 감는 손길, 상처를 살피는 눈빛, 그 모든 게 다 일사불란해서 내가 끼어들 타이밍을 찾기가 힘들었다. 이럴 때 보면 이 사람들, 훈련이 잘 되어 있구나 싶어서 감탄이 나오다가도, 그 훈련된 손길 하나하나가 나를 향해 존경의 시선으로 바뀔 때마다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주변에 몰려든 다른 기사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나를 볼 때마다 눈빛이 이상하게 반짝였다. 마치 전설 속에서나 나오는 존재를 실제로 목격한 사람들의 표정이었다. 누군가는 아예 무릎을 살짝 굽혔다가 황급히 다시 세우기도 했고, 누군가는 내 쪽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시선을 슬쩍 피했는데, 그게 무례해서가 아니라 너무 경외로워서 그런다는 걸 눈치로 알 수 있었다. 그 시선들이 부담스러워서 나는 자꾸만 몸을 움츠렸는데, 그럴수록 오히려 겸손한 성녀처럼 보이는 모양이었다. 이 오해는 내가 무슨 행동을 해도 더 짙어지는 방향으로만 흘러가고 있었다. 가만히 서 있으면 초연한 성녀, 몸을 움츠리면 겸양의 성녀, 손을 내저으면 자비로운 성녀. 대체 내가 뭘 해야 이 미친 회로가 멈추는 걸까. "성녀님, 부상은 없으십니까?" 젊은 기사 한 명이 다가와 물었는데, 나는 그 호칭이 나올 때마다 속으로 아니라고요, 라고 외쳤지만 겉으로는 그냥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저보다는 단장님이..." "단장님께서는 성녀님의 은총으로 목숨을 건지셨습니다." 다른 기사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끼어들었고, 나는 그 은총이라는 단어가 너무 부담스러워서 얼굴이 화끈거렸다. 나는 그냥 손을 뻗었을 뿐인데. 그것도 사실은 무서워서 반사적으로 뻗은 거였는데. 은총이라니, 내가 아는 은총은 회사 다닐 때 팀장이 어쩌다 한 번 야근 안 시켜주는 날 정도였는데 여기선 스케일이 아예 다르다. 상처를 대충 처치받은 선우결이 다시 몸을 일으켜 세우더니, 여전히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 눈빛이라는 게 참 문제였다. 의심 한 톨 없는, 순도 백 퍼센트의 신뢰. 사람이 어떻게 저런 눈으로 남을 볼 수 있나 싶을 정도로 맑았다. "성녀님을 이런 위험한 숲속에 계속 두는 것은 도리가 아닙니다. 제7기사단 본부로 모시겠습니다." "아, 저 그게, 저는 사실..." 나는 여기서 확실히 끊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입을 열었다. 심장이 두방망이질을 쳤다. 이런 게 무섭다는 감정인가 보다, 하고 스스로 진단을 내리면서도 말은 계속 이어나갔다. "저는 성녀가 아니라, 그냥 이 세계에 우연히 떨어진 사람이에요. 그 마룡을 어떻게 작게 만들었는지도 저도 정말 모르겠고요." 최대한 진지하게 설명했지만, 선우결의 표정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마치 내가 무슨 말을 할지 이미 다 알고 있었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성녀님들은 늘 자신의 힘을 숨기고 겸손하게 말씀하신다고 옛 문헌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가 이렇게 말하는 순간, 나는 아 이건 대화가 아니라 벽이라는 걸 깨달았다. 내가 뭐라고 하든 그는 이미 자기 안에서 완결된 이야기를 갖고 있었고, 그 이야기 속에서 나는 이미 성녀로 확정되어 있었다. 옛 문헌이라니. 대체 그 문헌을 쓴 사람은 누구고, 성녀가 부정하면 그것도 겸손의 증거로 처리해버리는 이 완벽한 논리 구조는 누가 설계한 거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그럴 상대가 이미 없었다. 벽한테 따져봤자 벽이 대답을 해줄 리가. "그런데 정말로 그런 게 아니라..." 나는 다시 한번 시도했지만, 이번엔 다른 기사가 끼어들었다. "성녀님, 겸양이 지나치십니다. 저희가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전설급 마룡이 성녀님의 손길 한 번에 저렇게 순한 존재가 되는 걸요." 그가 가리킨 방향에는 작아진 용이 얌전히 앉아 꼬리를 흔들고 있었는데, 저놈은 지금 상황이 얼마나 골치 아파졌는지 알 리가 없었다. 오히려 이쪽을 보며 눈을 반짝이는 게, 저도 뭔가 대단한 일에 일조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서 얄밉기까지 했다. 야, 너 때문에 이렇게 된 거잖아. 근데 그 조그맣고 순한 얼굴을 보고 있자니 화도 오래 못 갔다. 나는 결국 말을 멈췄다. 논리로 이길 수 없는 신념 앞에서는 아무리 사실을 말해도 통하지 않는다는 걸, 회사에서 팀장을 상대할 때 이미 배웠던 교훈이었다. 팀장이 어떤 결론을 미리 내려놓고 회의를 시작하면, 그 안에서 아무리 논리적인 반박을 해도 그 반박 자체가 팀장 안에서는 이미 예상된 시나리오의 일부로 소화되어버렸다. 그때는 그게 그렇게 억울했는데, 지금 이 순간 그 데자뷔를 다시 느끼고 있다니 웃기지도 않았다. 다만 그때는 팀장이 상대였고 지금은 목숨을 구해준 은인을 향한 절대적 신뢰가 상대라는 게 문제였다. 이건 훨씬 더 깨기 힘든 벽이었다. 팀장은 그냥 짜증나는 사람이었지만, 선우결은 나를 진심으로 존경하는 사람이었으니까. 짜증을 낼 대상도 못 되는 게 더 답이 없었다. "성녀님, 부디 저희와 함께 가주십시오." 선우결이 다시 한번 정중하게, 그러나 절대 거부를 예상하지 않는 어조로 말했다. 그의 눈빛에는 순수한 존경과 신뢰가 담겨 있었는데, 그 눈을 마주하는 순간 나는 이상하게도 거절이라는 단어를 입 밖에 낼 수가 없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다른 기사들도 하나같이 같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 많은 사람들의 기대를 한꺼번에 등지고 돌아설 배짱이, 솔직히 나한테는 없었다. 어쩌면 이건 이 낯선 세계에서 내가 얻은 유일한 안전망일 수도 있으니까, 라는 계산도 슬쩍 끼어들었다는 걸 부정할 수 없었다. 낯선 세계, 낯선 언어인지 아닌지도 모를 말들, 낯선 규칙들 속에서 이렇게 확실하게 나를 지켜주겠다고 나서는 무리가 있다는 게, 사실은 조금 고마웠다. 성녀라는 오해만 빼면. 작아진 용이 내 다리에 몸을 비비며 낑낑거렸다. 마치 자기도 같이 가겠다는 듯한 몸짓이었는데, 나는 그 조그만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손바닥 아래로 느껴지는 비늘의 감촉이 생각보다 따뜻해서, 이 녀석도 그냥 생존을 위해 몸부림친 짐승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나 이 녀석이나 다를 게 없었다. 다들 그냥 살아보겠다고 발버둥친 결과가 여기까지 온 거였다. 이 정체불명의 힘도, 이 오해도, 지금 당장은 풀 방법이 없었다. 풀 방법을 찾자고 머리를 굴려봐도 답이 안 나오는 게, 이게 무슨 게임 퀘스트도 아니고 힌트조차 없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잠시 신세를 지겠습니다." 나는 결국 그렇게 대답했고, 선우결의 얼굴에 안도와 기쁨이 동시에 스치는 걸 보면서 마음이 더 무거워졌다. 그 표정을 보는 순간 조금 전까지 품고 있던 계산적인 마음이 부끄러워질 정도였다. 이렇게 순수하게 믿어주는 사람에게, 나는 대체 언제 진실을 말할 수 있을까. 지금 말하면 배신처럼 느껴질 것 같고, 나중에 말하면 그 나중이 더 늦어져서 더 큰 배신처럼 느껴질 것 같고, 어느 쪽이든 답이 없다는 게 문제였다. 기사들이 진영을 정비하고 본부로 향하는 채비를 서두르는 동안, 나는 짐짝처럼 실려 가는 신세가 되어 이리저리 옮겨지면서도 계속 머릿속으로 어떻게든 이 오해를 풀 방법을 궁리했다. 문헌에 나온 성녀와 다르다는 걸 증명할 방법, 마룡을 작게 만든 게 그냥 우연이었다는 걸 보여줄 방법, 뭐든 하나라도 있어야 했는데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숲 저편 어둠 속에서 뭔가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등골을 타고 오르는 서늘한 감각에,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살펴봤지만 눈에 들어오는 건 그저 흔들리는 나뭇가지뿐이었다. 바람 때문이겠지, 라고 스스로를 다독였지만 그 서늘한 시선의 감각만은 목덜미에 오래도록 남아 있었다. 마치 누군가, 혹은 무언가가 이 모든 상황을 이미 알고 있다는 듯한, 그런 불길한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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