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얼떨결에 구국의 성녀라니

3화

나는 최대한 몸을 낮추고 나무 뒤로 기어들어갔다. 무릎이 진흙에 처박히고 손바닥이 나무껍질에 긁혔는데 그 와중에도 아프다는 감각은 저 멀리 뒷전으로 밀려나 있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는데, 이게 단순한 놀람 때문인지 아니면 진짜 생존 본능이 작동해서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온몸이 뜨거워졌다가 다시 차가워졌다가 했다. 이런 게 진짜 공포라는 감정인가 보다, 나는 그렇게 스스로에게 설명을 붙이면서도 손끝이 계속 떨리는 걸 멈출 수가 없었다. 회사에서 발표 앞두고 손 떨리던 거랑은 격이 다른 떨림이었다. 그때는 그냥 부장님한테 혼날까 봐 떨었던 거지만 지금은 죽을까 봐 떨고 있는 거니까. 비교 자체가 실례였다. 용은 다시 한번 크게 울부짖었고, 그 울음소리와 동시에 검은 화염이 대지를 휩쓸었다. 나무 몇 그루가 순식간에 재로 변하는 걸 보면서 나는 저게 산불 규모가 아니라 그냥 재해라는 걸 확신했다. 소방차 몇 대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국가 재난 문자가 열 통쯤 와야 정상인 스케일이었다. 저 규모의 화력을 아무렇지 않게 뿜어내는 존재가 전설급이라 불릴 만하다는 것도, 굳이 누가 설명해주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저런 걸 상대하는 저 남자는 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아직 살아 있는 건가, 하는 의문도 함께 들었다. 저건 사람이 아니라 사람 모양을 한 다른 무언가가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는데, 그 생각이 맞든 아니든 지금 나한테 중요한 건 저 사람 사정이 아니라 내 목숨이었다. 남자는 다시 검을 치켜들며 뭔가를 외쳤는데, 검신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는 걸 보니 무슨 마법이나 특수한 기술을 쓰는 모양이었다. 저게 이세계 판타지 소설에서 자주 보던 스킬이라는 건가, 나는 그 와중에도 그런 쓸데없는 감상을 하고 있었다. 그 빛의 검이 용의 어깨를 스치자 용이 잠깐 뒤로 물러났고, 나는 그 짧은 순간에 아, 저 사람도 어느 정도 위력이 있구나 하는 안심을 했다가 곧바로 그 안심을 반납해야 했다. 용의 상처는 금세 재생됐고, 남자의 검신은 그 반동으로 쩍 갈라졌다. 갈라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렸는데, 그 소리가 마치 내 마지막 희망이 쪼개지는 소리처럼 들렸다면 너무 과장인가. 아니, 과장 아니었다. 진짜 그런 느낌이었다. 저건 못 이긴다. 누가 봐도 답이 나오는 싸움이었다. 나는 그 순간 이런 생각을 했다. 여기서 조용히 숨어 있다가, 저 남자가 죽든 살든 상관없이 이 상황이 지나가면 몰래 빠져나가는 게 맞는 거 아닐까. 냉정하게 들리겠지만 나는 지금 이세계에 떨어진 지 몇 분도 안 된, 이 세계의 규칙도 모르고 마법도 없고 무기도 없는 회사원일 뿐이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야근하다가 택시 잡으려고 발 동동거리던 인간이 오늘은 용이랑 검사가 싸우는 걸 구경하고 있다니, 인생 참 알 수가 없다는 생각도 잠깐 스쳤지만 지금 그 감상에 빠질 때가 아니었다. 정의감으로 뛰어들었다가는 그냥 같이 죽는다. 나는 그렇게 몇 번이고 스스로에게 되새겼다. 저 사람을 구하겠다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었냐고 묻는다면, 없었다고 답하는 게 정직할 것이다. 나는 그저 살고 싶었을 뿐이다. 그렇게 스스로를 합리화하며 뒷걸음질을 치려는 순간, 발밑에서 마른 가지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딱, 하는 소리는 이 조용한 정적 속에서 유난히 크게 울렸고, 나는 그 소리를 낸 내 발을 저주하며 그대로 몸이 굳어버렸다. 하필 지금, 하필 이 순간에, 하필 나무가지 하나가 왜 거기 있었을까. 세상에 이렇게까지 나한테 악의적인 우연이 존재할 수가 있나 싶었다. 용의 눈이, 아주 천천히, 내가 숨은 방향으로 돌아갔다. 씨발. 그 짧은 순간 내 머릿속에서는 수십 가지 시나리오가 동시에 재생됐다. 도망친다, 어디로. 뒤에는 숲이지만 저 화염 한 번이면 다 타버릴 텐데 그쪽으로 가는 게 의미가 있나. 소리를 지른다, 그럼 더 눈에 띈다. 애초에 누구한테 지르겠다는 건지도 모르겠고. 죽은 척한다, 이미 늦었다. 용이 사람을 시체 감별사처럼 확인할 것 같지도 않았고. 결국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한 채로 나는 그냥 그 자리에 얼어붙어 있었는데, 이게 그렇게 유명한 프리즈 반응이라는 건가 하는 자기분석까지 할 정신은 있었다는 게 스스로도 어이가 없었다. 용의 시선이 나를 완전히 포착하기 직전, 남자가 다시 검을 들고 용의 얼굴 쪽으로 뛰어들었다. 용의 주의가 다시 그쪽으로 돌아가면서 나는 겨우 숨을 내쉴 수 있었다. 살았다, 아니, 아직 안 살았지만 일단 조금 미뤄졌다. 그런데 이번엔 상황이 더 안 좋아졌다. 남자의 검이 용의 눈을 스치며 상처를 냈고, 격분한 용이 날개를 크게 펼치면서 그대로 몸을 뒤집었는데, 그 반동으로 발생한 충격파가 숲 전체를 흔들었다. 마치 태풍 한가운데 서 있는 것처럼 공기 자체가 압력으로 밀려왔고, 나는 그 여파에 밀려 나무 뒤에서 튕겨 나가듯 굴렀다. 팔이며 등이며 온몸이 땅바닥에 부딪히면서 아프다는 감각이 이제는 무시할 수 없는 크기로 돌아왔는데, 그것보다 더 큰 문제가 있었다.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은신할 곳이 사라진 훤한 자리에 나동그라져 있었다. 숨을 곳이 없다. 그 사실을 인지하는 데 걸린 시간은 채 일 초도 되지 않았다. 나는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다리가 떨려서 제대로 서지도 못했고, 손으로 땅을 짚어봐도 그 손마저 힘없이 미끄러졌다. 이 와중에 서 있으려고 안달하는 내 모습이 우습기도 하고 처절하기도 했다. 그 와중에 남자는 여전히 용과 맞서 싸우며 조금씩 밀리고 있었다. 그의 등 쪽 갑옷이 크게 갈라져 있었고, 그 사이로 붉은 피가 배어 나오는 게 이 거리에서도 보였다. 저 사람 이제 정말 죽는구나. 그리고 나도 저 시야 안에 완전히 노출됐구나. 두 가지 생각이 동시에 들었고, 몸이 그 생각을 따라잡지 못한 채로 나는 그냥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도망가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발이 땅에 붙은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이게 바로 다리가 풀린다는 표현의 실제 사례구나, 나는 이 상황에서도 그런 실없는 생각을 했다. 용이 마지막 숨통을 끊으려는 듯 크게 아가리를 벌리며 남자를 향해 달려드는 순간,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정말 아무 생각 없이 몸이 먼저 움직였다. 머릿속에서 뭔가를 계산하거나 결정한 기억은 전혀 없다. 그냥 발이 저절로 앞으로 나갔고, 손을 뻗었고, 그 손끝이 무언가에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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