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봉인 풀고 2주 만에 파혼

1화

궁에 들어온 지 삼 년째 되던 해, 나는 여전히 내가 전생에 야근을 밥 먹듯 하던 회사원이었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있었는데, 그건 이 삶이 아무리 화려한 비단옷과 금박 장식으로 포장돼 있어도 결국 '정략혼 대상자'라는 직함으로 요약되는 또 하나의 계약직이었기 때문이었다. '전생엔 팀장한테 시달렸는데 이번 생엔 왕실한테 시달리는구나.' 게다가 전생엔 최소한 퇴근이라는 개념이 있었지만 이번 생에는 그런 것조차 없었으니, 어떤 의미로는 강등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해동국 왕태자 이도윤의 혼약자라는 자리는 겉으로 보기엔 국모 후보라는 거창한 타이틀이었지만, 실상은 하루하루 태자의 기분과 왕실 어른들의 눈치를 동시에 살펴야 하는 감정노동 직군에 가까웠고, 나는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부터 이 일을 최대한 성실하게, 그러나 마음은 반쯤 빼놓고 처리하기로 마음먹었다. 아침이면 시녀들이 머리를 올려주는 동안 오늘 태자궁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상해보는 게 습관이 됐는데, 대개는 별일 없이 지나가거나 아주 가끔 사고가 터지는 식이었다. 시녀 하나가 비녀를 꽂으며 "오늘은 날이 좋으니 아무 일 없을 것 같습니다, 아씨." 하고 말했을 때 나는 속으로 '그런 말을 하는 날이 제일 위험한 법인데.' 하고 생각했지만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어차피 말해봐야 불길한 예언자 취급이나 받을 게 뻔했으니까. 거울 속 내 얼굴은 삼 년 전 처음 이 궁에 들어왔을 때보다 확실히 무언가 닳아 있었는데, 그게 세월인지 스트레스인지는 나도 정확히 구분할 수 없었다. 태자궁으로 향하는 회랑을 걸으며 나는 오늘도 무사히 하루를 넘기자는 다짐을 속으로 되뇌었는데, 이 다짐은 이 일을 시작한 이후로 하루도 빠짐없이 반복해온 것이라 이제는 거의 주문처럼 몸에 붙어 있었다. 회랑을 지날 때마다 마주치는 궁녀들은 나를 보면 허리를 굽혀 인사했지만, 그 인사에 담긴 눈빛에는 은근한 동정이 섞여 있었다. 아마 다들 알고 있는 거겠지, 오늘도 내가 어디로 향할지를. 그 시선을 받으며 걷는 게 익숙해진 것도 참 서글픈 일이었다. 태자궁 앞에서 마주친 시종장은 나를 보자마자 반가운 기색보다 곤란한 기색을 먼저 드러냈는데, 그 얼굴을 보는 순간 나는 오늘 하루도 순탄치 않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시종장의 얼굴은 이제 거의 표정 하나로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지경에 이르러 있었다.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눈썹 끝을 아래로 늘어뜨리는 그 특유의 얼굴은, 통역하자면 '오늘도 또'라는 뜻이었다. "태자 전하께서 또 자리를 비우셨습니다." 또, 라는 말에 나는 한숨을 삼키며 눈두덩을 지그시 눌렀는데, 이도윤이 자리를 비운다는 건 언제나 딱 하나의 의미였고 그건 바로 궁궐 지하에 있는 그 봉인고 근처를 배회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이번엔 언제부터입니까." 내가 묻자 시종장은 손가락을 접으며 헤아리다가 "반 시진쯤 되었습니다." 라고 답했다. 반 시진이라니, 그 정도면 이미 문고리를 붙잡고 애원하는 수준까지 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도윤은 어릴 때부터 금지된 것에 유독 집착하는 성정을 가진 인물이었고, 그 집착의 종착지가 왕실 대대로 절대 열지 말라고 경고받아온 봉인고라는 사실은 궁 안에서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그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선대왕도, 그 위의 선대왕도 열어보지 않았다는 그 문 앞에서, 대체 저 남자는 무슨 상상을 하며 서 있는 걸까. 나는 시종장에게 알겠다는 말만 짧게 남긴 뒤 지하로 향하는 계단으로 발걸음을 옮겼는데, 이 계단을 내려가는 것도 이제는 익숙한 루틴이 되어버려서 스스로도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이럴 거면 봉인고 입구에 아예 내 이름으로 출입 명패를 걸어달라고 해야겠어.' 아니, 명패보다는 아예 작은 방석 하나 갖다 놓고 상주하는 게 효율적일지도 몰랐다. 계단은 내려갈수록 온도가 낮아졌고, 벽에 걸린 등불은 몇 걸음마다 한 번씩 흔들리며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렸다. 발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리는 그 복도를 걸을 때마다 나는 이 궁에서 가장 외로운 장소가 여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곳에 가장 자주 서 있는 사람은 이 나라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를 사람이었다. 계단을 다 내려가자 어두운 복도 끝에서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고, 나는 그 뒷모습만 보고도 이도윤이라는 걸 단번에 알아챘다. 조각처럼 잘 다듬어진 옆모습에, 왕실 특유의 금빛 머리칼이 어두운 조명 아래서도 은근히 빛나고 있었는데, 어깨선은 거장이 몇 달을 매달려 깎아낸 대리석상 같았고, 그 뒤로 늘어진 옷자락조차 화가가 일부러 배치한 듯 우아하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 화려한 외양과는 달리 지금 그가 하고 있는 행동은 지극히 유치한 것이었다. 그는 봉인고의 거대한 철문 앞에 서서 문틈을 손끝으로 만지작거리고 있었고, 마치 그 틈 사이로 뭔가 비밀스러운 냄새라도 맡으려는 사람처럼 코를 가까이 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나는 이번에도 늦지 않게 왔다는 사실에 안도하면서도 동시에 이 남자를 어떻게 또 설득해야 하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전하, 여기서 뭐 하고 계십니까." 내 목소리에 그가 흠칫 놀라며 돌아보는 모습이, 마치 몰래 야식을 먹다 걸린 사람 같아서 나는 하마터면 웃음이 터질 뻔했다. 손은 아직도 문틈에서 채 떼지 못한 채였고, 눈동자는 순간적으로 흔들렸다가 이내 태연한 표정으로 갈아입혀졌는데 그 전환 속도가 매번 감탄스러울 지경이었다. "아, 서윤. 그냥 궁금해서." 궁금해서, 라는 말이 몇 번째인지 세는 것도 이제 지겨워질 지경이었지만, 나는 최대한 차분한 표정을 유지하며 그의 소매를 붙잡아 끌었다. "지난주에도 궁금하다고 하셨고, 그 전주에도 궁금하다고 하셨습니다." 내가 지적하자 그는 잠시 말을 고르는 눈치더니 "이번엔 좀 다른 이유로 궁금했어." 라는 대답을 내놓았다. 다른 이유라는 게 뭔지 나는 묻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어떤 대답이 나와도 결론은 '궁금해서'로 회귀할 게 뻔했으니까. "이곳은 위험한 곳입니다. 어서 돌아가시죠." 나는 그의 소매를 조금 더 세게 당기며 말했고, 그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결국 순순히 끌려왔는데, 이 정도의 저항이라면 오늘은 그나마 쉽게 끝난 편이었다. 지난달에는 문 앞에 아예 주저앉아서 열 셀 때까지 안 움직이겠다고 버틴 적도 있었으니, 그것에 비하면 이건 거의 협조적인 수준이었다. 회랑을 되돌아 걷는 동안 이도윤은 별다른 말없이 걸었고, 나는 그 옆에서 이 사람이 도대체 저 문 안에 뭐가 있다고 생각해서 이렇게 자꾸 기웃거리는 건지 궁금해졌지만 굳이 묻지는 않았다. 물어봤다가 또 궁금해서, 라는 대답을 들으면 오히려 더 화가 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대신 나는 걸음을 옮기며 그의 소매 끝에 묻은 먼지를 슬쩍 털어냈는데, 그는 그 손짓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회랑을 지나는 동안 창밖으로 스치는 정원의 나무들이 유난히 무성해 보였고, 나는 그 사이로 언뜻 스치는 새 한 마리를 눈으로 좇으며 잠시 다른 생각을 할 여유를 부렸다. 태자궁으로 돌아온 뒤 나는 오늘의 임무를 무사히 완수했다는 안도감에 잠시 숨을 돌렸지만, 이게 오늘로 끝이 아니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이런 소동은 거의 매주 반복됐고, 나는 그때마다 이도윤을 붙잡아 돌려세우는 역할을 맡아왔으니, 어쩌면 나는 왕태자의 혼약자가 아니라 봉인고 전담 관리인으로 채용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월급이라도 나오면 억울하지 않을 텐데.' 하다못해 야근수당이라도 챙겨줘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이 나라엔 그런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창밖으로 저녁 해가 붉게 물들고 있었고, 시녀가 가져다준 차가 식어가는 걸 지켜보며 나는 오늘도 별일 없이 지나갔다는 사실에 마음을 놓았다. 태자궁 마당에서 들려오는 새소리와 저 멀리서 울리는 종소리가 묘하게 평화로워서, 나는 잠시 눈을 감고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 평온함이 그리 오래가지 않을 거라는 걸 그때는 미처 짐작하지 못했다. 봉인고의 그 낡은 철문이, 그리고 그 문틈으로 새어 나오던 서늘한 기운이, 그저 이도윤 한 사람의 유치한 호기심으로 끝날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건 그로부터 며칠 뒤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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