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봉인고 문이 완전히 열리기도 전부터 나는 뭔가 잘못됐다는 걸 느꼈다. 자물쇠가 부서지는 소리, 쇠사슬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 그리고 그 뒤를 잇는 정적. 원래 이런 봉인고에는 낡은 잡동사니나 오래된 유물 몇 개가 들어있어야 정상인데, 이곳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은 그런 평범한 물건이 낼 수 있는 종류가 아니었다. '설마.' 나는 그 설마가 진짜였으면 좋겠다는 마음과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동시에 품은 채 문틈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그 마음의 절반은 이미 도망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봉인고에서 걸어 나온 그것은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었지만, 그 존재감만큼은 도무지 사람이라고 부를 수 없는 무게를 지니고 있었는데, 마치 거장이 대리석을 깎아 만든 조각상이 갑자기 살아 움직이기 시작한 것 같은 위화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흑단처럼 검은 머리칼이 어깨 아래로 흘러내렸고, 그 사이로 드러난 얼굴은 마치 명화 속 신의 초상처럼 지나치게 완벽해서 오히려 섬뜩했으며, 붉은 눈동자는 어둠 속에서도 등불처럼 스스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콧대는 마치 조각가가 자를 대고 깎은 듯 정확한 선을 그렸고, 입술은 얇으면서도 어딘지 잔인한 인상을 남기고 있어서, 나는 그 얼굴 하나를 두고도 몇 문장쯤 감상할 여유가 생겼다는 게 스스로도 어이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미모 감상이라니, 정신이 나간 게 분명했다.
'이건 사람이 아니야.' 나는 본능적으로 그 사실을 깨달았고, 동시에 이도윤도 완전히 굳어버린 채 그 자리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옆으로 눈을 살짝 돌려보니 이도윤의 낯빛은 이미 하얗게 질려 있었고, 입술은 뭔가 말을 하려는 듯 벌어졌다가 다시 다물어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저 인간도 지금 나만큼이나 머릿속이 새하얗겠지, 하는 생각이 잠깐 스쳤지만 그걸 위로라고 삼을 여유는 없었다.
그 존재는 천천히 우리 쪽으로 시선을 돌렸는데, 그 시선이 나에게 닿는 순간 나는 마치 뱀 앞에 선 개구리가 된 기분이었고,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조차 제대로 떠오르지 않을 만큼 몸이 굳어버렸다. 발바닥이 바닥에 붙어버린 것 같았다. 도망치자, 도망쳐야 한다, 라는 생각은 머릿속에서 몇 번이고 울려 퍼졌지만 다리는 그 명령을 철저히 무시하고 있었다. 이럴 때 보면 인간의 몸이라는 게 참 쓸모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랜만이군." 낮고 울리는 목소리가 복도 전체를 채웠는데, 그 말이 누구를 향한 것인지도 알 수 없어서 나는 그저 침을 삼키며 대답을 기다렸다. 그 목소리에는 이상하게도 그리움 같은 것이 섞여 있었고, 동시에 권태로움도 함께 배어 있어서, 마치 아주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존재가 이제 막 깨어나 세상이 얼마나 시시한지를 확인하는 듯한 어조였다.
그는 천천히 한 걸음씩 우리 쪽으로 다가왔고, 나는 이도윤을 등 뒤로 살짝 밀어내며 앞을 막아섰는데, 그 순간 내 행동이 스스로도 놀라웠다. '내가 지금 뭘 하는 거야.' 위협적인 존재 앞에서 도망치는 게 정상일 텐데, 몸은 이미 반사적으로 이도윤을 보호하려는 자세를 취하고 있었으니 이런 걸 두고 직업병이라고 해야 할지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관리직 공무원 생활 몇 년에 몸에 밴 게 이런 거였나, 상급자 앞에서 방패막이 되어주던 습관이 이제는 괴물 앞에서까지 발동하는 모양이었다. 월급도 안 주는데 이런 서비스는 대체 왜 나오는 건지, 나 자신에게 화가 날 지경이었다.
이도윤이 등 뒤에서 뭐라고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는데, 겁에 질린 목소리라기보다는 오히려 나를 말리려는 듯한 다급함이 섞여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을 제대로 들을 정신도 없었다. 눈앞의 존재가 만들어내는 압박감이 너무 커서, 다른 소리는 전부 뭉개진 잡음처럼 들릴 뿐이었다.
그는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입꼬리를 살짝 올렸는데, 그 미소가 어딘지 재미있어하는 표정 같아서 나는 등줄기에 오싹한 기운이 스치는 걸 느꼈다. 그 미소는 사람을 놀리는 미소도 아니었고 위협하는 미소도 아니었다. 그저, 오랜만에 흥미로운 장난감을 발견한 아이의 표정 같았다. 그 비유가 떠오르는 순간 나는 더 소름이 끼쳤다. 나는 장난감이 되고 싶지 않았다.
"인간, 겁도 없이 앞을 막아서다니." 그 말투에는 위압감보다 알 수 없는 흥미가 더 짙게 배어 있었고, 나는 이 상황에서 뭐라도 대답을 해야 할 것 같았지만 입이 도무지 떨어지지 않았다. 뭐라고 말해야 하지. '저는 그냥 직업병이 있어서요'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살려주세요'라고 하기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저 그를 마주 보고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가 손을 뻗어 내 쪽으로 다가오는 순간, 나는 눈을 질끈 감으며 이번 생은 여기서 끝인가 하는 생각이 스쳤는데, 그 짧은 순간에도 '전생에도 이렇게 갑자기 죽었나' 하는 실없는 의문이 떠오른 걸 보면 나도 어지간히 정신이 나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죽기 직전에 이런 쓸데없는 생각이나 하고 있다니, 나중에 누가 내 마지막 순간을 되짚어본다면 참 한심하다고 생각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순간에는 정말로 그 생각밖에 나지 않았다.
그런데 예상과 다르게, 그의 손끝이 내 몸에 닿는 순간 느껴진 건 고통이 아니라 서늘하고 부드러운 물결 같은 감각이었다. 마치 차가운 강물에 손끝을 담갔을 때 느껴지는, 아프지는 않지만 분명하게 이질적인 그런 서늘함이었다. 그 감각은 순식간에 내 가슴 안쪽으로 스며들었고, 나는 마치 얼음물에 통째로 잠기는 듯한 서늘함을 느끼며 숨을 크게 들이켰다. 심장이 한 박자 늦게 뛰는 것 같은 이상한 어긋남이 느껴졌다.
'이게 뭐지.' 몸속에서 뭔가가 소리 없이 헤집고 다니는 듯한 이상한 감각이 이어졌는데, 아프지는 않았지만 낯설고 이질적인 느낌이 온몸의 신경을 곤두세웠다. 마치 누군가가 내 안에 들어와 방을 하나하나 열어보며 뭔가를 찾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고, 나는 그 손님을 쫓아내고 싶었지만 몸이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이도윤이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아주 멀리서 들리는 것 같았다. 나는 대답하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 감각은 몇 초쯤 되지 않는 짧은 순간 동안 이어지다가, 갑자기 무언가에 놀란 듯 빠르게 빠져나갔고, 나는 그 순간 다리에 힘이 풀리며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무릎이 딱딱한 바닥에 부딪히는 통증이 오히려 반가울 지경이었다. 아, 나 아직 살아있구나, 하는 실감이 그 통증을 통해서야 겨우 돌아왔다.
그가 한 걸음 물러서며 나를 내려다보는 표정이 조금 전과는 다르게 묘하게 흔들리고 있었는데, 마치 예상치 못한 걸 발견한 사람의 얼굴 같았다. 방금까지 흥미로워하던 표정에서, 이제는 뭔가를 다시 계산하는 듯한 얼굴로 바뀌어 있었다. 그 변화가 나는 더 무서웠다. 흥미로운 장난감이었다가 갑자기 연구 대상으로 승급한 기분이랄까.
"…재미있군." 그가 낮게 중얼거린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 말투에 담긴 어떤 확신 같은 것이 내 귀에 오래도록 맴돌았다. 그는 혼잣말처럼 그 말을 하고는 더 이상 아무 설명도 덧붙이지 않았고, 나는 그 침묵이 오히려 더 불안했다. 뭐가 재미있다는 건지, 나한테서 뭘 발견했다는 건지,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채로 그저 바닥에 주저앉아 그를 올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이도윤이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나를 부축하려 다가왔지만, 그 존재는 이미 몸을 돌려 복도 어둠 속으로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고, 나는 그 뒷모습을 보며 이 만남이 이대로 끝난 게 아니라는 불길한 예감을 지울 수 없었다. 그의 발걸음 소리가 점점 멀어지는데도 어째서인지 완전히 사라진 것 같지 않은 기분이 들었다. 마치 그가 여전히 어딘가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는 것 같은, 근거 없지만 확신에 가까운 감각이었다.
"괜찮으세요? 정신 좀 차려보세요." 이도윤이 내 어깨를 붙잡고 흔들며 물었는데, 그 목소리에는 여전히 떨림이 남아 있었다.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사실 하나도 괜찮지 않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솔직하게 대답할 여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이게 대체 뭐였을까.' 몸속에 남은 서늘한 잔향이 아직도 가슴 한복판에서 맥박처럼 뛰고 있었고, 나는 그 감각을 떨쳐내려 애쓰면서도 동시에 그것이 결코 완전히 사라지지 않을 거라는 걸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 내 안에 씨앗 하나를 심어놓고 사라진 것 같은, 그런 불길한 확신이 들었다. 그리고 그 확신은, 나중에 돌이켜보니 결코 틀린 예감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