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열병인지 진심인지

2화

왕태자의 방문 소식이 전해진 순간부터 공작저는 완전히 다른 공기로 채워졌는데, 사용인들은 며칠 전부터 복도의 은식기를 하나하나 다시 닦았고 정원사는 이미 만개한 꽃들을 굳이 다시 손질했다. 계단 난간의 나뭇결까지 기름으로 문질러 광을 냈고, 대접실에 깔린 카펫은 두 번이나 걷혔다가 다시 깔렸는데, 그 모든 소란이 서아의 눈에는 마치 전쟁을 앞둔 진영의 정비처럼 보였다. 서아는 그 소란스러움 한가운데서도 이상하게 마음이 차분했는데, 아마도 아버지의 서재에서 목격한 그 밤의 무게가 아직도 가슴 어딘가에 눌러앉아 있어서인 듯했다. 방으로 돌아와 옷을 갈아입는 동안에도 그녀는 몇 번이나 손끝이 옷의 끈을 놓쳤는데, 시녀가 대신 매어 주는 손길이 어쩐지 낯설게 느껴졌다. '이건 그냥 인사일 뿐이야.' 스스로에게 그렇게 되뇌었지만, 그 말이 스스로도 완전히 믿기지는 않는 것 같았다. 대접실로 들어서기 전, 할머니인 정혜원 전공작부인이 서아의 옷깃을 마지막으로 정리해 주며 낮게 당부했다. "고개를 너무 숙이지도, 너무 세우지도 말거라." 설란국 공주 출신인 할머니의 목소리에는 늘 흔들림이 없었고, 서아는 그 단단함이 부럽기도 하고 조금은 무섭기도 했다. 감정보다 책임을 우선하는 사람이라는 걸 어릴 때부터 봐 왔기에, 지금 이 순간에도 할머니의 눈빛은 마치 전쟁을 준비하는 사령관처럼 냉정해 보였다. 할머니의 손끝에서는 은은한 백단향이 났는데, 그 향이 서아에게는 어릴 적 품에 안겨 있던 기억을 떠올리게 하면서도, 지금은 그 품이 자신을 전장으로 밀어내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만들었다. "두려우냐." 할머니가 짧게 물었을 때, 서아는 순간 대답을 고르지 못했다. "조금요." 솔직하게 말해버린 스스로에게 놀랐지만, 할머니는 그 말에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그저 고개를 한 번 끄덕였을 뿐이었다. 그 무표정이 위로인지 무관심인지, 서아는 판단할 수 없었다. 문이 열리고 이현우가 들어섰을 때, 서아는 그가 자신과 같은 열다섯이라는 사실이 순간 믿기지 않았다. 키는 이미 성인 남성에 가까웠고, 자세에는 흐트러짐이 전혀 없었으며, 그를 둘러싼 시종들조차 그의 걸음 속도에 맞춰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그의 걸음이 이미 그 자리의 속도를 정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마치 무대 위에 서 있는 배우를 보는 것 같았는데, 그 배우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이 자리, 자신을 향해 걸어오고 있다는 사실이 서아의 등줄기를 서늘하게 만들었다. 그가 걸어오는 동안 문 밖에서 스며드는 늦가을의 공기와 함께 은은한 향이 함께 실려 왔는데, 나무 향인지 그의 옷에 배인 향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서아는 그 향을 맡으며 문득 자신이 지금 얼마나 작은 자리에 앉아 있는지를 실감했는데, 대접실의 넓은 창과 높은 천장조차 그의 존재 앞에서는 오히려 좁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강서아 영애를 뵙습니다." 이현우의 목소리는 낮고 평이했지만, 그 안에는 어떤 감정도 새어 나오지 않도록 눌러놓은 듯한 단단함이 있었다. 서아는 예를 갖춰 인사를 올리면서도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라 잠깐 헤맸는데, 그가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이 예상보다 훨씬 진지해서였다. 또래 소년이라면 있을 법한 어색함이나 호기심 같은 것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그 눈빛에는 이미 무언가를 결정해 놓은 사람의 확신 같은 것이 담겨 있었는데, 서아는 그것이 무엇을 향한 확신인지 짐작이 가지 않아 불편해졌다. 그런 눈으로 자신을 보는 사람을 서아는 지금까지 만난 적이 없었다. 아버지의 서재에서 보았던 그 어른들의 눈빛과도 달랐다. 다과가 놓인 자리에서, 이현우는 필요한 말 외에는 거의 입을 열지 않았다. 찻잔이 놓이는 소리, 은쟁반이 부딪치는 소리마저 유난히 크게 들리는 정적 속에서, 어른들의 정치적인 대화가 오갔다. 공작이 왕실의 근황을 묻고 왕태자의 시종이 형식적인 답을 내놓는 사이, 이현우는 가끔 서아를 쳐다보았는데, 그 시선이 노골적이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그녀에게 고정되어 있었고, 서아는 그 시선의 무게가 손끝을 미세하게 떨게 만든다는 걸 느꼈다. 찻잔을 든 손이 흔들릴까 봐 서아는 애써 무릎 위에 손을 올려두었는데, 그마저도 어색해서 다시 찻잔을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그 작은 몸짓 하나까지도 이현우의 눈이 놓치지 않고 따라가는 것 같아서, 서아는 차라리 창밖의 정원으로 시선을 돌려버렸다. '이 사람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도, 서아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혼약이라는 건 결국 정치적인 계약이 아닌가, 그런데 왜 저 사람은 마치 이 자리에 진심을 담아야 한다는 듯한 눈으로 자신을 보는 것인가. 왕실의 예법 같은 걸까, 아니면 그저 낯선 상대를 관찰하는 습관 같은 걸까. 서아는 어느 쪽도 확신할 수 없었다. 이현우 역시 같은 순간, 다른 방향에서 같은 고요를 곱씹고 있었다. 그는 강서아라는 이름을 서류로만 접했을 때는 그저 정략의 한 조각이라 여겼는데, 실제로 마주한 그녀는 예상보다 훨씬 작고, 예상보다 훨씬 침착했다. 다른 귀족 영애들처럼 화려한 언사로 자신에게 잘 보이려 애쓰지 않았고, 오히려 최소한의 예만 지키며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 거리가 이현우에게는 낯설었다. 지금까지 만난 사람들은 대부분 그의 신분 앞에서 자신을 지우거나, 반대로 지나치게 드러내려 애썼는데, 강서아는 둘 중 어느 쪽도 아니었다. 찻잔을 든 손이 떨리는 걸 보면서도, 그는 그것이 두려움 때문인지 다른 이유 때문인지 궁금해졌는데, 그 궁금함 자체가 낯설어서 스스로도 조금 당황스러웠다. '재미있군.' 그는 그 감상을 스스로도 어이없어하며 삼켰는데, 재미라는 감정이 이 자리에 얼마나 부적절한 것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이 소녀가 자신을 두려워하면서도 눈을 피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만족스럽게 느껴졌다. 지금까지 그를 마주한 이들은 대개 시선을 떨구거나 지나치게 웃음을 흘렸는데, 강서아는 그저 정원 쪽으로 눈을 돌렸을 뿐, 두려움을 감추려 애쓰지도 않았다. 다과회가 끝나갈 무렵, 이현우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처음으로 서아에게만 들릴 만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다음에는, 조금 더 편하게 이야기하고 싶소." 그 말이 청유인지 명령인지 서아는 구분할 수 없었지만, 어쨌든 그것이 그의 방식대로의 다정함이라는 걸 어렴풋이 느낀 것 같았다. 서아는 짧게 고개를 숙였을 뿐, 대답은 하지 못했다. 목이 메는 것 같기도 하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그런 것 같기도 했는데, 어느 쪽인지는 그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그가 떠난 뒤, 대접실에는 그의 잔향처럼 은은한 향과 함께 묘한 긴장의 여운이 남아 있었다. 시녀들이 조심스레 다과상을 치우는 소리마저 평소보다 조심스러웠고, 열려 있던 창으로 들어오던 바람도 이제야 다시 실감 나게 서아의 뺨에 닿는 것 같았다. 할머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 침묵 속에서 서아는 자신이 방금 지나온 이 짧은 만남이 앞으로의 삶을 결정지을 수도 있다는 무게를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할머니가 자신의 어깨를 한 번 가만히 짚었다가 놓았을 뿐인데, 그 손길이 무언가를 위로하려는 것인지, 아니면 각오하라는 뜻인지 서아는 끝내 물어보지 못했다. 그날 밤, 서아는 창밖의 어둠을 바라보며 이현우의 눈빛을 다시 떠올렸다. 방 안의 촛불은 이미 꺼져 있었고, 창틀에 걸린 차가운 밤공기가 손끝에 닿을 때마다 낮에 느꼈던 그 시선의 온도와는 전혀 다른 서늘함이 스며들었다. 그 확신에 찬 시선의 근원이 사랑인지, 단순한 소유욕인지, 아니면 그저 왕가의 습관 같은 것인지, 그녀는 아직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문득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이 다시 귓가에 맴돌았다. 다음에는, 조금 더 편하게 이야기하고 싶소. 그 다음이라는 게 언제일지, 그리고 그때 자신이 무엇을 준비하고 있어야 할지, 서아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다만 오늘 이 짧은 만남으로 무언가가 이미 시작되어버렸다는 것만은, 이상하게도 분명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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