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이현우가 다녀간 뒤 며칠이 지나도록, 서아는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은 물음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밤이면 천장을 바라보며 같은 생각을 몇 번이고 되풀이했는데, 진짜 사랑과 순간의 열병을 구분하는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결국 사랑의 결과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것뿐이라는 생각이 점점 확고해져 갔다. 어머니의 초상화 속 그 표정, 편지 속에 눌러 쓴 글씨의 흔들림. 그것들이 진짜였는지, 아니면 시간이 지나며 색이 바랜 낡은 감정의 껍데기에 불과한지, 서아는 알아야 했다.
'알아야 한다. 그래야 이 혼약도, 이 자리도, 내가 무엇을 딛고 서 있는지 알 수 있을 테니까.'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손끝이 차가워지는 것 같았지만, 서아는 그 냉기를 애써 무시하며 결심을 다졌다.
결심 끝에, 서아는 아버지 강도윤을 찾아가기로 했다. 서재로 향하는 복도는 유난히 길게 느껴졌고, 발끝에 스치는 카펫의 감촉마저 낯설게 느껴질 정도였다. 서재 문을 두드리기 전, 그녀는 잠시 숨을 고르며 손끝을 매만졌는데, 이 요청이 얼마나 무례하게 들릴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문고리를 잡은 손에 살짝 힘이 들어갔다가 풀리기를 몇 번이나 반복한 뒤에야, 서아는 겨우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라."
낮고 단조로운 목소리가 들려왔고, 서아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서재 안은 늘 그렇듯 종이와 잉크 냄새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아버지, 어머니를 만나고 싶습니다."
강도윤은 서류를 내려놓으며 오랫동안 딸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 속에는 놀람과 함께, 언젠가는 올 것이라 예감했던 순간에 대한 피로감이 섞여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손에 쥐고 있던 펜을 천천히 내려놓았는데, 그 동작이 어쩐지 무언가를 내려놓는 듯한 무게를 지니고 있었다.
"그건."
그가 말을 잇지 못하고 침묵하는 사이, 서아는 물러서지 않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그날 서재에서 보았습니다. 초상화도, 편지도."
강도윤의 얼굴에서 순간 핏기가 빠지는 것 같았는데, 그는 곧 시선을 창밖으로 돌리며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창밖으로는 정원의 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고, 강도윤은 그 흔들림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네 할머니가 반대할 것이다."
그것은 거절이 아니라 조건이었고, 서아는 그 미묘한 차이를 놓치지 않았다. 아버지의 목소리에 담긴 것은 완강한 거부가 아니라, 오히려 이 일이 이미 자신의 손을 떠난 것에 대한 안도와도 같은 것이었다.
"할머니께는 제가 직접 말씀드리겠습니다."
서아의 대답에 강도윤은 잠시 놀란 눈으로 딸을 바라보았고, 이내 무언가를 삼키듯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그날 저녁, 강도윤은 딸과 함께 정혜원을 찾아갔다. 정혜원의 방으로 향하는 복도는 유독 조용했고, 두 사람의 발소리만이 대리석 바닥에 낮게 울렸다. 정혜원은 응접실 소파에 앉아 뜨개질감을 손에 든 채, 두 사람의 요청을 다 듣고도 한참 동안 바늘을 놓지 않았다. 실이 손가락 사이를 오가는 소리만이 정적을 채우고 있었고, 서아는 그 침묵이 길어질수록 가슴이 조여드는 것을 느꼈다.
"그 아이를 만나서 얻을 게 무엇이냐."
정혜원의 물음은 차가웠지만, 서아는 그 냉정함 뒤에 숨은 걱정을 느낄 수 있었다. 할머니의 눈빛은 손녀를 향한 것이면서도, 동시에 오래전 잃어버린 무언가를 향한 것처럼도 보였다.
"진실입니다."
서아의 대답은 짧았지만, 그 안에는 흔들리지 않는 단호함이 담겨 있었다. 정혜원은 손녀의 얼굴을 오래도록 응시하다가, 마침내 뜨개질감을 무릎 위에 내려놓았다. 그 손짓 하나에도 오랜 세월의 무게가 실려 있는 듯했다.
"허락하마. 다만 조건이 있다."
서아는 숨을 죽인 채 다음 말을 기다렸다. 심장이 조금씩 빨라지는 것을 느끼며, 손끝을 무릎 위에서 가만히 그러쥐었다.
"호위와 함께, 반드시 하루 안에 돌아와야 한다. 그리고."
정혜원은 잠시 말을 끌다가, 뜻밖의 이름을 덧붙였다.
"왕태자 전하께도 이 일을 알려야 할 것이다. 그분의 허락 없이 영애가 영지를 벗어나는 일은, 이제 개인의 결정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 말에 서아는 순간 말이 막혔는데, 이현우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 한다는 것이 왜인지 다른 종류의 긴장을 불러왔기 때문이었다. 아버지의 비극을 마주하러 가는 길에, 자신의 혼약자가 어떤 방식으로든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 낯설고 불편했다.
'왜 하필 지금, 그 이름이 여기서 나오는 걸까.'
서아는 속으로 되물었지만, 답은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정혜원의 말이 정치적인 절차에 불과하다고 스스로를 다독이려 했지만, 가슴 한편에서 이는 미묘한 동요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강도윤은 그 조건에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고, 오히려 안도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는데, 서아는 그 표정에서 아버지가 이미 오래전부터 이런 순간을 두려워하면서도 기다려왔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어쩌면 아버지 역시, 자신의 딸이 이 진실 앞에 홀로 서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밤, 서아는 이현우에게 서신을 쓰기 위해 책상 앞에 앉았다. 촛불이 은은하게 흔들리며 종이 위에 그림자를 던졌고, 서아는 그 그림자를 한참 바라보다가 겨우 펜을 들었다. 펜을 든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는데, 무엇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서였다. 어머니를 만나러 간다는 말, 그 뒤에 숨겨진 아버지의 비극과 자신의 불안한 물음들을 이 짧은 서신에 담을 수는 없었다.
몇 번이나 문장을 쓰다가 지우기를 반복했다. 처음에는 사정을 자세히 설명하려 했지만, 쓰면 쓸수록 문장이 길어지고 감정이 흘러넘쳐서 결국은 종이를 구겨 옆으로 밀어냈다. 두 번째, 세 번째 시도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그녀는 짧게 몇 줄만 적었다.
'영지의 어머니를 뵈러 갑니다. 허락을 구합니다.'
서신을 봉투에 넣고 봉인을 하는 동안, 서아는 문득 이현우가 이 소식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궁금해졌다. 그가 이 요청을 순순히 허락할지, 아니면 지난번 연회에서처럼 자신의 방식대로 그녀 곁에 서겠다고 나설지, 예측할 수가 없었다. 촛불을 끄고 침대에 누웠지만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고, 서아는 몇 번이나 뒤척이며 창밖의 어둠을 응시했다.
다음 날 아침, 답신은 예상보다 빠르게 도착했다. 시녀가 조심스럽게 방문을 두드리며 봉투를 내밀었을 때, 서아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멈추었다.
서아가 떨리는 손으로 봉인을 뜯어 펼친 종이 위에는, 짧고 단호한 한 문장만이 적혀 있었다.
'나도 함께 가겠소.'
서아는 그 문장을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 글자 수는 적었지만, 그 안에 담긴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다. 어머니를 만나러 가는 그 길에 왜 이현우가 동행하려는 것인지, 그것이 다정함인지 또 다른 형태의 확인인지 알 수 없어 손끝이 차가워지는 것을 느꼈다.
'허락을 구했을 뿐인데, 왜 동행까지 자처하시는 걸까.'
서아는 종이를 손에 쥔 채 창가로 다가갔다. 창밖으로는 아직 어둠이 짙게 남아 있었고, 그 어둠 속에서 그녀의 다음 걸음이 어디로 향할지, 아무런 확신도 서지 않은 채로 하루가 시작되고 있었다. 멀리서 새벽을 알리는 종소리가 낮게 울렸지만, 서아의 마음속 불안은 그 소리에도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