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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그날 밤, 하은은 오랜만에 깊은 잠에 빠졌으나, 그 잠은 결코 평온하지 않았다. 낮 동안 도현과 나눈 대화들, 그리고 강서윤의 방 앞에서 느꼈던 서늘한 공기, 그 모든 것들이 뒤섞여 무거운 앙금처럼 가슴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었기 때문인지, 잠자리에 눕는 순간부터 몸은 이상하게도 축축한 긴장감에 휩싸여 있었고, 이불을 목까지 끌어올리고서도 좀처럼 온기가 스며들지 않았다. 꿈속에서 그녀는 다시 그 화재의 밤으로 돌아가 있었는데, 붉은 불길이 창밖을 가득 채우고 있었고, 복도 저편에서 유모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으며, 발밑은 이미 뜨겁게 달아오른 마룻바닥이었다. 타닥, 타닥. 무언가가 타들어가는 소리가 벽 너머에서부터 스멀스멀 스며들어왔고, 매캐한 연기가 코끝을 찔러왔으며, 눈앞은 붉은 빛과 검은 그림자로 어지럽게 일렁이고 있었다. "하은 아가씨, 이쪽으로……!" 유모의 손을 잡고 뛰던 그 짧은 순간, 하은은 열린 문틈으로 어머니의 뒷모습을 보았는데, 강서윤은 촛대 하나를 든 채 자신이 놓은 불길 속에 우두커니 서 있었고, 그 얼굴에는 슬픔도 후회도 아닌, 텅 빈 무표정만이 남아 있었다. 그 눈빛이 너무나 고요해서, 오히려 그것이 더 소름 끼치도록 무서웠다는 것을, 하은은 꿈속에서도 똑똑히 느끼고 있었다. '왜…… 왜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을 하고 있는 거야.' 한때는 누구보다 다정했다고 전해지던 그 사람이, 지금은 자신의 손으로 지른 불길 속에서 눈물 한 방울조차 흘리지 않은 채 서 있다는 사실이, 어린 하은의 마음에 알 수 없는 균열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어머니……!" 그렇게 부르는 순간 천장이 무너져 내렸고, 뜨거운 열기와 함께 시야가 새하얗게 타올랐다. 번쩍. 하은은 숨을 몰아쉬며 잠에서 깨어났고, 온몸이 식은땀으로 젖어 있었으며, 심장은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폐 속 깊은 곳이 뻐근하게 조여왔고, 손끝은 아직도 그날의 열기를 기억하는 듯 미세하게 떨려오고 있었다. '또…… 그 꿈이야.' 전생에서 그녀가 게임 화면을 통해 수도 없이 지켜본 그 결말이, 이제는 자신의 실제 목숨이 걸린 미래로 바뀌어 있다는 사실이 새삼 뼈저리게 다가왔고, 그녀는 이불을 걷어차고 일어나 앉아 창밖의 어둠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달빛조차 없는 캄캄한 밤, 창밖의 정원수들은 그저 검은 실루엣으로 서 있을 뿐이었지만, 하은의 눈에는 그 어둠 속에서도 자꾸만 붉은 불꽃이 어른거리는 것 같아, 그녀는 몇 번이나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뜨기를 반복했다. 게임 〈보석의 서약~그대를 위한 러브스토리~〉는, 전생의 그녀에게 그리 특별한 작품은 아니었다. 그저 밤마다 캐릭터에게 선물을 보내고 대화를 걸며 애정도를 올리는, 흔한 방치형 연애 시뮬레이션 중 하나였을 뿐이었고, 여주인공 외의 서브 캐릭터들은 각자의 배경 서사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중 강서윤이라는 이름은 '비극적인 조연'으로 기억에 남아 있었다. 특별히 인기가 많은 캐릭터는 아니었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더욱 처절했던 배드 엔딩 때문에 몇몇 유저들 사이에서는 화제가 되었던 것으로 기억했는데, 남편의 사랑을 갈구하다가 결국 스스로를 파괴해버리는 그 결말은, 당시의 하은에게조차 손끝이 서늘해질 정도로 인상적이었다. 다만 하은이 다른 플레이어들과 달랐던 점은, 그녀가 유난히 이 서브 캐릭터들의 배드 엔딩을 전부 클리어했다는 사실이었는데, 그 이유는 단지 완벽주의적인 성격 때문이었을 뿐 별다른 의미는 없었다. 도전 목록에 체크 표시가 하나라도 비어있는 걸 견디지 못하는 성격 탓에, 밤을 새워가며 온갖 루트를 다 밟았던 그 시절의 자신을 떠올리면, 지금 와서는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지만. 그런데 지금, 그 무의미했던 완주 기록이 자신의 목숨을 구할 유일한 지식이 되어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아이러니한지, 하은은 이불을 다시 끌어당기며 생각했다. '그러니…… 이 지식을 헛되게 쓸 순 없어.' '추덕질이야. 그게 유일한 답이야.' 원작 속 강서윤의 파멸은 정확히 '애정도가 남편에게 집중되어 있는데, 그 애정이 돌아오지 않는 상태가 임계점을 넘었을 때' 발생하는 구조였고, 그렇다면 답은 단순했다. 애정의 방향을 바꾸면 되는 것이었다. 남편이 자신을 봐주기를 바라는 마음 대신, 남편이라는 존재 자체를 '멀리서 응원하고 기록하고 소소하게 기뻐하는' 대상으로 재정의하면, 강서윤의 애정도는 더 이상 남편의 반응에 종속되지 않을 것이었다. 그것은 전생에서 흔히 보던 '갓생 덕질'의 방식과 정확히 같은 구조였다. 좋아하는 대상이 나를 몰라줘도 상관없이, 그 존재가 잘되기를, 무탈하기를 바라며 소소한 기록을 남기고 스스로 만족하는 그 방식이라면, 강서윤은 더 이상 남편의 무관심 때문에 자기 자신을 태워버릴 이유가 없어질 것이라고 하은은 확신했다. 생각이 거기까지 이르자, 하은의 머릿속에는 전생에서 즐겨보던 어느 팬 계정의 문구가 떠올랐다. '그 사람이 날 몰라도 괜찮아. 나는 그냥 그 사람이 행복하기만 하면 돼.' 그런 마음가짐이라면, 강서윤도 얼마든지 버틸 수 있을 것이었다. 날이 밝자마자 하은은 자리에서 일어나 세수를 하고 옷을 갈아입었는데, 어젯밤의 악몽 때문인지 얼굴은 조금 창백했지만, 눈빛만은 어느 때보다 또렷하게 빛나고 있었다. '오늘 안에 도현에게 이 계획을 완전히 설명해야 해.' 다음 날 아침, 하은은 열 살 오라버니 도현을 다시 불러 세워 이 계획을 자세히 설명했다. 정원의 나무 그늘 아래, 두 사람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마주 앉았고, 하은은 어젯밤 꿈에서 본 광경까지는 굳이 말하지 않은 채, 오직 강서윤을 구할 방법에 대해서만 차근차근 설명을 이어나갔다. "그러니까, 어머니한테 아버지를 '팬'처럼 좋아하게 만들자는 거지." 도현이 정리하듯 되물었고, 하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직접 다가가서 상처받는 대신, 조금 떨어져서 지켜보고 기록하고 응원하는 거야. 그러면 아버지가 무시해도 어머니는 무너지지 않아." 말을 하면서도 하은은 손짓을 곁들여가며 설명을 덧붙였는데, 팬이라는 개념이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는 낯설 수밖에 없다는 걸 알면서도, 도현이라면 그 핵심만큼은 금방 이해할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쉽게 말하면, 짝사랑을 하더라도 상대의 반응에 목매는 게 아니라, 그냥 그 사람이 잘 지내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 만족하는 방식으로 바꾸는 거야. 그러면 상대가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나는 여전히 행복할 수 있어." "그게 정말로 가능할까." 도현의 목소리에는 의구심이 섞여 있었지만, 그 눈빛에는 이미 이 계획에 발을 들이기로 한 사람의 각오가 얼핏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고, 도현은 팔짱을 낀 채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렸다가, 다시 하은을 향해 물었다. "만약 어머니가 그 방식을 받아들이지 않으신다면?" 그 질문에 하은은 순간 말을 멈추었는데, 도현의 우려가 결코 근거 없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강서윤이라는 인물은, 원작 속에서도 남편에 대한 집착이 병적으로 깊었던 캐릭터였고, 그 애정의 방향을 하루아침에 틀어놓는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닐 것이었다. '그래도…… 시도해봐야 해.' '다른 방법이 없으니까.' 하은은 잠시 숨을 고른 뒤, 다시 도현을 바라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쉽지 않을 거야. 나도 알아. 하지만 지금 이대로 두면, 어머니는 결국……" 거기까지 말하고 하은은 잠시 말을 멈췄는데, 차마 '불타 죽는다'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낼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도현의 얼굴에도 순간 어두운 그림자가 스쳤고, 그는 더는 묻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일단은…… 네 말대로 해보자." 그렇게 말하는 도현의 목소리에는, 아직 완전히 걷히지 않은 불안이 남아 있었지만, 그럼에도 하은과 함께 이 길을 걸어보겠다는 결심만큼은 분명하게 배어 있었고, 하은은 그 눈빛을 마주하며 속으로 다짐했다. '반드시…… 반드시 이번에는 다른 결말을 만들어낼 거야.' 두 사람 사이에는 잠시 무거운 정적이 흘렀지만, 그 정적 속에서도 서로를 향한 신뢰만큼은 조금씩 두터워지고 있었고, 이제 남은 문제는 오직 하나, 강서윤이라는 사람의 굳게 닫힌 마음을 어떻게 두드릴 것인가 하는 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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