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학원 복도 한가운데서 나는 걸음을 멈췄다.
수업이 끝나고 다음 강의실로 넘어가는 그 짧은 틈,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지나가던 중이었다. 그런데 복도 끝에서 낯선 실루엣이 나타났다. 화려한 예복, 목에 두른 왕실 문양의 스카프, 그리고 그 뒤로 따라붙은 근위병 두 명.
'저거 딱 봐도 왕실 사람인데.'
시종은 나를 발견하자마자 걸음을 재게 움직였고, 내 앞에 도착해서는 무릎을 꿇듯 허리를 깊게 숙였다. 그 각도가 어찌나 정중한지, 지나가던 학생들이 다 걸음을 멈추고 이쪽을 쳐다봤다.
"청하 공작 영애님, 폐하께서 뵙기를 청하십니다."
'폐하가 나를? 왜?'
등줄기로 서늘한 기운이 스쳤다. 심장이 쿵, 하고 한 번 크게 뛰었다가 이내 평소 박동으로 돌아왔다. 이런 순발력은 전생 회사원 시절에 부장님 호출받을 때마다 길러진 건데, 이럴 때 쓰라고 만들어진 능력은 아니었을 텐데 말이다.
나는 최대한 태연한 얼굴을 유지하며 봉투를 받아 들었다.
손끝이 살짝 떨렸지만 겉으로는 티 내지 않았다.
'침착해, 서윤아. 여기서 흔들리면 진짜 이상한 애 된다.'
나는 한서윤이다.
청명 왕국 청하 공작가의 영애이자, 왕태자 이현의 사촌이자 정략 약혼녀.
흑발과 검은 눈동자를 가진 이 세계 최고의 미녀로 불린다.
그리고 사실은, 대한민국에서 야근하다 과로로 죽은 서른두 살 회사원이었다.
죽고 나서 눈을 뜨니 열일곱 살짜리 몸에 들어와 있었고, 이름도 얼굴도 낯선데 기억은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처음엔 그냥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예쁘고, 돈 많고, 왕태자랑 결혼까지 정해져 있고.
'이 정도면 로또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이상하게 익숙한 구조가 눈에 밟혔다.
색이 진할수록 미인으로 친다는 이 세계의 미의 기준, 흑발 흑안의 왕태자, 그리고 그 옆에 붙어 있어야 할 나.
딱 봐도 이거, 악역 영애 전생물 냄새가 진하게 났다.
문제는 내가 이 장르를 자세히 알지 못한다는 거였다.
전생에 그런 소설을 몇 편 읽긴 했는데, 제목도 줄거리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하필 이럴 때 기억력이 왜 이렇게 후지지.'
회사 다닐 때는 엑셀 함수며 거래처 이름이며 그 많은 걸 다 외웠는데, 정작 내 목숨이 걸린 이 소설 줄거리는 왜 하나도 기억이 안 나는지 억울할 지경이었다.
확실한 건 딱 하나였다.
이런 이야기 속 악역 영애는 대개 좋은 결말을 맞지 못한다는 것.
사약을 마시거나, 마차 사고를 당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신전 광장에서 공개적으로 죄를 낭독당하고 끌려가거나.
'셀 수 없이 많은 죽음의 루트 중 하나에 걸리기 싫어서 그동안 얼마나 조심했는데.'
그래서 나는 지난 몇 년간 나름대로 애를 썼다.
하녀들에게 함부로 하지 않았고, 이현 앞에서 유치한 갑질도 하지 않았고, 특히 여주인공으로 추정되는 인물 근처에는 아예 얼씬도 하지 않았다.
파티에서 누가 나를 도발해도 웃으며 넘겼고, 시녀가 실수로 찻잔을 깨도 벌금 대신 격려금을 얹어줬다.
'이게 다 목숨 부지용 투자다, 투자.'
조심하고 조심하며 십 대를 보냈다.
'이 정도면 플래그 다 피했다고 봐도 되지 않나.'
그런데 오늘, 왕실 소환장이 날아왔다.
나는 시종을 따라 걸으며 머릿속으로 최근 며칠을 되짚었다.
특별히 사고 친 것도 없었다.
수업도 성실히 들었고, 파티에도 적당히 참석했고, 이현하고는 그냥 사촌 겸 약혼자로서 예의 바르게 지냈다.
'그럼 왜 부르는데.'
혹시 지난주 다과회에서 내가 무심코 던진 말이 문제였을까? 아니면 두 달 전 시녀장한테 준 휴가가 규정 위반이었나?
아무리 뒤져봐도 딱히 걸리는 게 없었다.
'그럼 정말 나 아무 짓도 안 했는데 이런 거야?'
그게 더 무서웠다. 아무것도 안 했는데 걸리는 거, 그게 딱 악역 영애물 클리셰의 정석 아닌가.
소환장 봉투를 열어보니 안에는 짧은 문장 하나뿐이었다.
"신전으로부터 정식 고발이 접수되었으니, 청하 공작 영애는 정해진 날에 출석하라."
나는 그 자리에 잠깐 굳어버렸다.
'고발? 나를? 무슨 죄로?'
글씨는 딱 열 몇 글자밖에 안 되는데, 그 안에 담긴 무게가 상상 이상이었다. 죄목도, 고발인도,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그냥 나오라는 말뿐.
'이거 완전 판결 다 내려놓고 통보만 하는 거 아니야?'
지나가던 학원생들이 힐끔거렸다.
소곤소곤, 소곤소곤.
다들 청하 공작 영애가 신전에 고발당했다는 소식을 벌써 아는 눈치였다.
소문이 왕실 소환장보다 빠른 게 이 세계 국룰인가 싶었다.
'아니 나도 방금 알았는데 너네가 어떻게 먼저 알아.'
정보의 유통 경로가 나보다 학생들이 빠른 이 상황이 어이가 없었지만, 지금 그런 걸 따질 여유가 없었다.
"영애님, 안색이……."
시종이 걸음을 늦추며 조심스레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나는 웃으며 대답했지만 속으로는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이거 완전 그 흐름이잖아. 악역 영애, 여주 괴롭힘 혐의, 신전 고발, 단죄식.'
소설 줄거리는 기억나지 않아도 이 정도 클리셰는 몸으로 안다.
전생에 그렇게 많은 웹소설을 정주행했으면서 왜 하필 이 상황에 도움이 될 기억만 싹 날아갔는지, 신이 있다면 따지고 싶었다.
복도 창밖으로 정원이 보였다.
그곳에 낯익은 뒷모습이 서 있었다.
갈색 머리, 갈색 눈, 최근 학원에 편입한 남작가 영애 채아영.
시골에서 자라서 예절은 어설프지만 이상하게 사람을 끄는 애였다.
말투도 소탈하고, 걸음걸이도 시녀들 것과는 다르게 자유로웠다.
그리고 소문으로는, 여신의 사랑을 받아 마법력이 남다르다고 했다.
힘을 쓸 때 온몸이 분홍빛으로 물든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 소문을 처음 들었을 때부터 나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저게 그 히로인이구나.'
확신이 들자 오히려 마음 한구석이 편해졌다.
남주인공 옆에서 알콩달콩할 여자애를 굳이 미워할 이유가 없었다. 나는 그냥 여기서 빠지고 싶은 조연이었을 뿐이니까.
그 옆에 서 있는 사람도 보였다.
흑발과 검은 눈, 이 세계 최고의 미남으로 불리는 왕태자 이현.
두 사람은 꽃밭 사이에서 마주 보고 웃고 있었다.
거리가 멀어서 대화 내용은 들리지 않았지만, 저 표정은 못 알아볼 수 없었다.
'저거 완전 연애하는 얼굴인데.'
나는 발걸음을 멈추고 그 둘을 잠깐 지켜봤다.
이현이 채아영의 머리에 붙은 꽃잎을 떼어주는 순간, 나는 확신했다.
이건 정략 약혼자의 눈빛이 아니었다.
저건 애정이 뚝뚝 흐르는 눈빛이었다. 나한테는 평생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는 그런 눈빛.
'잘됐다.'
진심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현과 결혼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사촌이라는 것도 부담스러웠고, 무엇보다 이 세계 왕비 자리는 딱 봐도 격무 그 자체였다.
결재해야 할 서류만 하루에 백 장, 후궁들 눈치, 시녀들 관리, 그 사이에서 웃는 얼굴 유지까지.
전생에 야근으로 죽은 사람은 두 번째 삶에서는 최대한 편하게 살고 싶었다.
'왕태자비? 됐어, 나는 사양이야.'
그냥 공작 영애로 조용히 살다가, 적당한 시골 영지 하나 물려받아서 널브러져 사는 게 내 최종 목표였다.
다만 문제는, 그 마음과 지금 손에 들린 신전 고발장이 정확히 반대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는 거였다.
혼약 파기는 반가운데, 고발은 반갑지 않았다.
'설마 저거랑 이거 세트로 오는 거 아니야?'
혼약 파기 전에 악역 영애를 먼저 처리하고, 그다음 순리대로 남녀 주인공이 손을 잡는 구조. 소설이라면 딱 그런 순서로 흘러갈 것 같았다.
'아 진짜, 나 그냥 조용히 살고 싶다고 했잖아.'
누구한테 하는 하소연인지도 모르겠는 말을 속으로 삼켰다.
시종이 다시 나를 불렀다.
"영애님, 폐하께서 기다리십니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소환장 속 날짜는 정확히 일주일 뒤였다.
일주일.
그 짧은 시간 안에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왜 고발을 당했는지, 이 이야기가 어디로 흘러가는지 전부 알아내야 했다.
'일주일 안에 목숨을 지켜야 하는 건가, 이거.'
전생에 프로젝트 마감도 일주일 만에 해낸 적이 있으니, 이것도 어떻게든 되겠지 싶었다가, 이건 야근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걸 곧 깨달았다.
등 뒤로 정원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이현과 채아영의 웃음소리였다.
맑고, 다정하고, 나와는 아무 상관 없는 웃음.
나는 뒤돌아보지 않고 걸었다.
발걸음 소리만 복도에 또각또각 울렸다.
그리고 그 소리 사이로, 손에 들린 소환장이 유난히 무겁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