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단죄식이 준 선물

4화

국왕이 손에 든 서류를 천천히 펼쳤다. 종이 넘어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대전 안 모두가 숨을 죽이고 그를 바라봤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조건이라니, 뭔 조건.' 심장이 이상하게 뛰었다. 처형이라는 단어가 나올까, 유배라는 단어가 나올까. 머릿속으로 온갖 시나리오가 빠르게 지나갔다. "청하 공작 영애의 죄는 결코 가볍지 않다." 국왕이 말을 이었다. 목소리가 대전 전체에 낮게 깔렸다. "하지만 청하 공작가가 그동안 왕국에 세운 공로 또한 무시할 수 없다." 한태호 아버지가 대전 한쪽에서 고개를 숙이고 서 있었다. 파벌 정치에서 패배한 책임자로서, 아버지는 이미 이 결과를 어느 정도 예상했던 눈치였다. 어깨가 축 처져 있었고, 두 손은 앞으로 모은 채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아버지 표정 보니 벌써 각오한 얼굴이네.' 저 얼굴을 보고 있자니 오히려 내가 더 초조해졌다. 아버지가 저 정도로 각오했다는 건, 정말로 나쁜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하여 본 왕은 처형이나 유배 대신, 청하 공작 영애의 신분을 낮춰 새로운 혼처를 지정한다." 대전이 다시 얼어붙었다. 누군가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눈을 깜빡였다. '처형이 아니라 결혼? 이거 완전 다른 각도인데.' 순간적으로 안도감이 밀려왔지만, 그와 동시에 불안감도 함께 찾아왔다. '혼처를 지정한다는 게 대체 무슨 뜻이야.' 좋은 곳으로 시집보낼 것 같지는 않았다. 이 상황에서 좋은 혼처가 나올 리가 없지 않은가. "새로운 혼처는 은강 변경백, 선우진이다." 순간 대전 곳곳에서 낮은 웅성거림이 터졌다. 귀족 몇 명은 대놓고 입가에 손을 갖다 대며 웃음을 참는 표정을 지었다. 어떤 이는 옆 사람과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고, 또 어떤 이는 대놓고 킥킥거리는 소리를 참지 못했다. '뭐야, 저 반응들. 저 사람 뭔데 다들 저렇게 반응해.' 이름조차 처음 들어보는 사람이었다. 변경백이라는 직위는 알겠는데, 그 앞에 붙은 반응들이 심상치 않았다. "은강 변경백이라니, 그것도 참……." 뒤편에서 누군가 소곤댔다. "왕국 최고로 못생긴 남자 아닌가." "색이 그렇게 옅다며. 거의 백발에 가깝다던데." "듣기로는 눈동자 색도 회색에 가깝다고 하더군." "차라리 유배가 나았을 뻔했지, 저런 사람한테 시집가느니." 나는 순간 헛웃음이 나올 뻔했다. '지금 나 벌 받는 거야, 아니면 그냥 사람들 놀리는 거야.' 저 소곤거림들이 하나같이 진지한 걱정처럼 들리는 게 더 웃겼다. 마치 처형보다 더 끔찍한 형벌이라는 듯한 얼굴들이었다. 이 세계는 색이 진할수록 아름답다고 평가하는 곳이었다. 흑발 흑안인 나와 이현이 최고의 미남미녀로 불리는 이유도 그거였다. 왕국 전역에서 흑발흑안이라면 무조건 미남미녀 취급을 받았고, 그 반대로 색이 옅으면 아무리 이목구비가 뚜렷해도 못생긴 것으로 취급받았다. 심지어 사교계에서는 색의 농도로 등급을 나누어 수군거리는 일도 흔했다. 은강 변경백이라는 사람은 그 기준에서 최고봉이라 불릴 정도로 색이 옅다고 했다. 말 그대로 왕국에서 가장 못생긴 남자. 귀족들이 지금 저렇게 술렁이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전생 기준으로 생각하면 그냥 은발에 회안인 거잖아. 그게 뭐가 못생긴 거야.' 오히려 전생 감성으로는 희귀하고 신비로운 외모에 가까웠다. 국왕이 나를 향해 물었다. "청하 공작 영애, 이 처분을 받아들이겠는가." 대전 안 모든 시선이 나에게 쏠렸다. 이현도, 채아영도, 아버지도, 조롱하던 귀족들도 전부. 숨소리조차 조심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나는 잠깐 숨을 골랐다. '생각해보자.' 왕태자비 자리는 애초에 사양이었다. 격무, 정치 싸움, 여신의 총애를 받는 히로인과의 삼각관계 후보. 매일같이 신전 눈치를 봐야 하고, 사교 모임마다 뒷담화의 표적이 되는 삶. 생각만 해도 벌써 피곤했다. 반면 지금 제시된 자리는 변경백 부인. 변경, 즉 왕도에서 멀리 떨어진 곳. 권력 다툼과 거리가 있고, 신전의 눈초리에서도 벗어날 수 있는 위치. 왕도에서 벌어지는 온갖 암투와 눈치 싸움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외모가 어떻든 그게 대체 뭐가 중요한가. 전생에 서른두 살까지 살면서 얻은 결론이 하나 있었다. 얼굴로 밥 먹여주지 않는다. 그리고 그 결론은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유효했다. "받아들이겠습니다." 내 대답에 대전이 다시 한번 조용해졌다. 이번엔 조롱의 웅성거림이 아니라, 당황의 침묵이었다. 국왕조차 살짝 눈썹을 치켜올렸다. 심지어 서기관으로 보이는 사람이 붓을 멈추고 나를 쳐다볼 정도였다. "이 처분을…… 받아들인다고?" "예, 폐하." 나는 최대한 담담하게 대답했다. 속으로는 완전히 다른 계산이 굴러가고 있었다. '왕비는 부담스럽고 변경백 부인은 자유로워. 이건 상이지, 벌이 아니야.' 게다가 변경이라면 신전에서도 손이 닿지 않는 곳일 확률이 높았다. 어쩌면 이건 내가 바라던 것보다 더 완벽한 결과일지도 몰랐다. 귀족들이 서로 눈치를 주고받았다. 누군가는 내가 자존심을 버리고 살길을 택했다고 생각하는 눈치였고, 또 누군가는 내가 뭔가 숨겨진 계략을 꾸미고 있다고 의심하는 표정이었다. 심지어 몇몇은 안타깝다는 듯 나를 향해 혀를 차기도 했다. 둘 다 틀렸다. 나는 그냥 진심으로, 아주 순수하게 좋아하고 있었다. '다들 왜 저렇게 심각한 표정이야. 나는 지금 속으로 방방 뛰고 있는데.' 대신관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그 표정이 마치 내가 뭔가 크게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단죄를 받는 자리에서 그렇게 순순히 받아들이다니." "이것이 폐하의 처분이니, 신하로서 당연히 따라야지요." 나는 최대한 예의 바르게 대답했다. '속으로는 만세를 부르고 있지만.' 대신관의 눈빛이 미묘하게 흔들리는 걸 보니, 내가 이렇게 얌전히 나올 줄은 예상 못 한 모양이었다. 한태호 아버지가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흔들렸다. 딸이 못생긴 남자와 강제로 혼인하게 됐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무너지는 모양이었다. 입술을 몇 번이나 달싹였지만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그런데 내가 저렇게 태연하게, 심지어 살짝 웃는 얼굴로 받아들이자 아버지 눈에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서윤아……." '저기, 아버지, 저 진짜 괜찮은데요.' 오히려 이렇게까지 슬퍼하시니 마음이 조금 불편해질 지경이었다. 나는 아버지를 향해 살짝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괜찮다는 뜻으로 보였으면 좋겠는데, 아버지 얼굴은 여전히 참담해 보였다. 이현은 저 뒤에서 복잡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채아영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 모두 내가 이렇게 태연할 줄은 예상하지 못한 눈치였다. 이현의 눈빛에는 죄책감과 당혹감이 함께 섞여 있었고, 채아영은 아예 시선을 피하는 듯했다. '뭘 그렇게 미안한 얼굴이야, 나는 완전 만족인데.' 누가 보면 내가 억지로 참는 줄 알겠다. 국왕이 자리에서 일어나 판결을 마무리했다. "그렇다면 청하 공작 영애의 처분은 이대로 확정한다. 은강 변경백과의 혼사는 왕실이 정식으로 주관할 것이다." 대전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하나둘 흩어지기 시작했다. 발소리와 옷자락 스치는 소리가 뒤섞여 대전을 채웠다. 누군가는 나를 힐끔거리며 지나갔고, 누군가는 애써 시선을 피했다. 나는 그 모든 시선을 무시한 채 대전을 나서며 옆에 있던 시녀에게 조용히 물었다. "은강 변경백에 대해 아는 것 있어?" 시녀가 목소리를 낮추며 대답했다. 주변을 한번 살피고는 몸을 살짝 내 쪽으로 기울였다. "소문으로는 외모만 그렇고, 실은……." 그녀가 말을 끝내기 전, 뒤에서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돌아보니 이현이었다. 숨을 몰아쉬며 방금까지 달려온 듯한 얼굴이었다. "서윤아,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을까." 나는 그를 바라보며 속으로 짧게 한숨을 삼켰다. '이제 와서 무슨 얘기.' 시녀가 하려던 말이 궁금해서 죽을 지경인데, 하필 이 타이밍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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